[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4)] 하루가 일생이다, 예수의 시간을 살다
2021-02-01 10:55
다석의 재발견-참삶사상(下) 하루살이 철학, 예수 공생활처럼 전생애가 '솟남의 대기(待期)'
하루살이는, 예수의 '죽음 앞의 기도'와 같다
류영모의 사상은 얼나(성령)와 몸죽얼삶(죽음)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신에게로 나아가는 인간의 수행을 강조하는 이 같은 사상체계가 육체가 영위하는 현실의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기기에, 몸삶을 경시하고 고행(苦行)을 권하는 사상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해다. 탐진치 수신론(修身論)은 얼나와 접속하는 삶을 향한 매뉴얼일 뿐이다. 이번에 주로 언급할 '하루살이 사상' 또한, 주어진 삶을 어떻게 값지고 의미있게 살 것인가를 모색한 류영모의 실천적 통찰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우리의 시간인식이 절박하지 않고 치열하지도 않기에 손가락 사이로 물을 흘려보내듯 쉽게 삶을 흘려보낸다는 점을 문제적으로 보았다. 예수는 30대가 되어서야 사람들의 시야에 의미있게 등장했고, 3년 정도의 공생활(公生活) 끝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았다. 3년이란 시간, 혹은 30여년이란 시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수명으로 보자면 아주 짧다. 예수는 요절(夭折)한 것인가. 그 삶이 짧았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인류 최고의 기적을 일궈낸 그 행적'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삶의 시간가치를 매긴다면 예수의 삶은 많은 사람들의 생을 합친 것보다 긴 날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1년 단위로 나이를 따지는 인간 관행의 '느린 시계'를 버리고, 얼나의 삶을 재는 '예수의 시간'으로 살기로 했다.
'언제나 죽는 날' 사형수論에 기반
衆生無他死刑囚(중생무타사형수)
判決宣告虛誕日(판결선고허탄일)
猶豫期間壽夭日(유예기간수요일)
뭇생명이란 다름 아닌 사형수라네
종신형 살면서 집행일을 기다리네
판결은 헛되이 태어날 때부터 선고됐고
유예기간은 오래 살고 일찍 죽는 날 차이
다석한시 '창조시말(創造始末)'
왜 날수계산을 하게 됐는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고통은 그날에 충분하다"고 했던 예수의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형수 인생관'에 기반하고 있었던 점이 중요하다. '언제나 죽는 날'일 수 있는 시한부의 삶이자, 신에게로 솟나는 시간을 대기(待期)하는 하루하루. '대기자(待期者) 의식'을 긴박하게 유지하려는 그의 강고한 뜻이 담겼다. '예수의 시간'을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니다. 언제나 유감없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나날이다. 예수 삶의 모든 시계는 죽음에 맞춰져 있다. '육신의 죽음이 인간의 완전한 멸망'이라고 생각해온 사람들에게, 죽음의 다른 개념(영적인 부활)을 알려준 일은 그야말로 생의 인식혁명이었다. 생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아서 죽음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신으로의 귀일(歸一)이라면, 삶은 신을 맞기 위한, 아주 절박하고 중요한 준비기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 위에서, 사는 날들은 절실해지고 진지해진다.
자, 여기 또 한번 푸른 날이 밝았다.
생각하라, 네 어찌 이날을 헛되이 보내려 하는가
영원으로부터 이 새 날은 비롯되어
영원 속으로 밤이 되면 돌아가거늘
-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의 '오늘' 중에서
그는 오산학교 시절 학생들 앞에서 이 시를 읊었다. 시간을 귀하게 여기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죽음을 인식하며 삶의 순간을 읽는 '예수의 시간'을 살아가는 신앙적 수행을 제자들에게 심어준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심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시간이 심판이요 역사가 심판이다. 허송 세월이란 있을 수 없다. 깨어서 사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찌꺼기다. 찌꺼기는 돌볼 것이 못 된다. 내일을 찾으면 안 된다. 내일은 아직 도착되지 않은 손님이다. 언제나 오늘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인생은 어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오늘 오늘 오늘에 있다. (1957, 다석어록)
무릎꿇기, 일일일식, 칠성판 취침은 '하루살이 수행'
류영모의 삶 속에서 규칙적으로 이뤄진 많은 수행은, 예수처럼 시시각각을 느끼며 살아가는 타임스케줄을 의식한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겨울에도 찬물로 몸을 씻고, 위좌(危坐)의 고통스런 자세로 앉아 의식하며 한숨 한숨을 쉬는 일, 고행하듯 사방천지를 걸어다니는 보보수행(步步修行), 저녁 한끼만으로 식(食)을 최소화하고 해혼으로 금색(禁色)하는 몸짐승 제어의 수행, 그리고 칠성판 관짝에 깔개도 없이 누워 주검처럼 잠에 드는 취침수행까지 그는 시시각각을 살았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아침은 뱃속에서 나올 때요 저녁은 죽는 때"라고 말한 그 뜻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는 '종일건건 석척약(終日乾乾 夕惕若-주역)'이라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애쓰며(건건(乾乾)이 그런 뜻이다) 해가 지면 더욱 조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밤낮 없이 가는 것을 알면 우리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듯이 한번 픽 웃고 죽는 길에 들어갈 수있다." (1957, 다석어록) 이것이 하루살이 정신이다. 하루살이라는 곤충은 딱 하루만 사는 건 아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애벌레로 물 속에서 살다가 반쯤되는 성충으로 변태를 한 뒤에 날벌레로 육상생활을 시작한다. 탈피를 한 이 날벌레는 서둘러 교미를 하고 알을 낳는다. 일주일쯤 날아다니며 제 할 일을 마친 뒤 죽는데 인간의 눈에는 금방 죽는 것처럼 보여서 하루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루살이의 삶에서 '하루'란 일생에 가깝다. 하루살이가 사람의 삶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아득해 보일까. 하루살이처럼 치열하게 매일을 산다면, 그 삶은 얼마나 길고 아득한 것일까. 우리에게 살 날이 하루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 하루가 얼마나 아깝고 달콤하겠는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하루를 의식하고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만, 그 하루 속에 채울 콘텐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더 중요하다. 예수는 그 '하루'에 무엇을 했는가.
"하루란 뜻은 하느님을 위하여 일할 오늘을 말한다. '할 우(上)'. 우(上)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일거리를 받아 놓은 오늘이란 우이기도 하다. " 류영모의 말이다. 하느님을 위해 일할 오늘. 예수는 그 오늘을 살았고 그 오늘을 죽었다. 살기에도 좋은 날이고 죽기에도 좋은 날이다. 칼라일은 평생을 3만날(약 82세)로 잡아 그 하루하루를 의식하면서 살라고 했지만, 류영모는 그에 더하여 9억번의 숨을 쉬면서 그 찰나찰나를 인식하며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마음을 닦으라고 권했다. 그 9억번의 숨숨 동안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것이 수행의 근본이요 핵심이다.
진선미(眞善美)가 하느님 마음이다
우리는 삶에서 '진선미(眞善美)'를 이상적인 가치로 여긴다. 인간의 지성(인식능력)이 지향하는 정점이 진(眞), 윤리(실천능력)가 지향하는 것이 선(善), 감성(심미능력)이 향한 것이 미(美)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가치관이 칸트에 와서 지적, 윤리적, 미학적 탁월성의 3종세트로 확립되어 근대의 가치관을 이루게 된다. 류영모는, 상대세계에서의 진선미 추구는 바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의 촉수가 받아낸 '신의 향기'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더할 나위 없이 참된 것이 신이며, 더할 나위 없이 선한 것이 신이며,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것이 신이다. 그 절대적 가치를 받아내는 인간의 지향이야 말로 신앙의 본질적 면모가 아닌가.
"미(美)는 선(善)이 있어야 미다. 선(善)은 진(眞)이 있어야 선이다. 미(美)는 만지면 없어진다. 선(善)은 자랑하면 없어진다. 이 세상에서는 흔히 이만하면 미(美)다. 선(善)이다라고 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진선미가 없다. 절대(絶對)에서는 이 세상에서처럼 진선미가 따로따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의 하느님께서는 진이면서, 선이면서, 미일 것이다. 진.선.미의 하느님이시다." (1960, 다석어록)
류영모는 '민신불인(民身不仁, 인간육신은 신을 닮지 않았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企待眞善美(기대진선미) 副産貪瞋痴(부산탐진치)
신이 뜻하고 기다린 것은 진선미인데 / 오히려 태어난 건 탐진치로다.
육신을 제어하며 살아가는 류영모의 길은, 탐진치의 짐승을 버리고 진선미의 얼나를 추구하는 오롯한 일획(一劃)이었다. 탐진치를 극복하는 것이 신의 '참'을 만나는 것이며, 신의 절대적인 '선(善)'에 합류하는 것이며. 신의 오롯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다. 상대세계의 진선미는 실속이 없는 구호에 가깝지만, 그래도 신을 닮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
가온찍기는 '예수의 시간' 살이의 좌표
한편 류영모는 찰나 속에서 영원을 만나는 방법으로 '가온찍기'라는 독창적인 사유 체계를 제시했다. 가온찍기는 영원히 가고가고 영원히 오고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 속에 있는 나의 긋(點)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깨달음을 구하는 이 방식은, 다석이 추구한 '하루살이(일일주의)'의 순간순간 실행파일이었다. 지금의 의미를 핀포인트로 새기는 이 훈련은, 예수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스스로의 좌표(座標)를 단속하는 류영모 특유의 시공간 인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예(禮)를 닦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이겨야 한다고 말했고, 도(道)를 얻기 위해서 아침에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다. 석가는 도를 닦고 진리를 말하며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 목숨이 하루나 한 시간 혹은 숨 한번만 남았다 하더라도 부지런히 하겠다고 결연히 말한 바 있다. 석가는 이것을 '지혜로운 이가 죽는 생각을 잘 닦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류영모는 세상의 많은 선각(先覺)이 삶의 시간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꿰뚫어 자신의 하루살이 일생을 채워나갔다. 아호로 쓴 '다석(多夕)'은 하루 한끼의 저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둠이 내리는 시각을 신의 기운과 조우할 수 있는 때로 귀하게 여기는 뜻을 담았다. 오늘은 '오! 늘' 한결같으면서도 새로운 감동을 주는 현재다. 그것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부터 시작된다.
대기(待期)는 결별을 위한 것이다. 대기가 끝나면 예수가 십자가로 향하는 것처럼 결별의 기도를 해야 한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의지처는 얼나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떠날 때는 맘이 시원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직 준비가 못된 것이다. 의지하지 않을 곳에다 의지했기 때문에 죽을 때 시원하지 못하다." (1960, 다석어록) 시원하게 죽으려면 시원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다석의 참삶사상이며, 기독교의 참된 수행의 요체다.
다석 긔림노래(4) - 하루살이
백년도 일년도 한철도 한달도 없다
하늘시계엔 그런 바늘이 없다
그저 눈뜨고 눈감는 하루를 살아라
오직 눈감고 눈뜨는 개벽을 살아라
오, 늘 내게 와 있는 오늘
오, 늘 내가 숨 쉬는 목숨
오, 늘 지나가면 없는 오늘이 있다
오, 늘 기다려도 없을 오늘이 있다
캄캄한 영원에서 온 오늘
아득한 미래에서 온 오늘
내게는 오직 오늘이 있다
내게 단하루 안긴 날이 있다
누군가가 내게 준
아무 말 없이 그냥 준
참으로 놀라운 하루가 있다
영원에서 길어온 오늘이 있다
어둠에서 빛까지 깊이 스미는
빛에서 어둠까지 무슨 영문인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말숨이 있다
나즉히 부르는 음성이 있다
새벽이 있고 한낮이 있고 어둠이 있다
먼동이 트고 햇살이 쬐고 빛이 꺼진다
하루 공부로 하늘을 보라
하루살이로 하늘을 보라
하루마다 늘 하늘을 보라
하늘보며 늘 하루를 살라
영원도 무한도 하루로 시작된 것
하루가 끝나면 영원도 무한도 하루살이다
오늘 받은 하루를 살 수 있을 뿐
하루를 쓸 수 있는 사형수일 뿐
하루를 품에 안은 가난한 자일 뿐
하루를 숨쉬는 꽃송이일 뿐
우리의 눈길에 우리의 콧속에
우리의 가슴에 우리의 발밑에
우리와 함께 살아 숨쉬는 하루를 사랑하라
하루를 같이 사는 모든 것들을
눈물겹게 사랑하라 아낌없이 포옹하라
하루가 지나면 오늘은 없다
하루가 지나면 내일도 없다
영원의 심연으로 하루를 던지는 셈
가만가만 숨을 쉬며 하루를 다 쉬어라
하루이면 3만번을 숨쉬고
일년이면 천만번을 숨쉬고
평생이면 9억번을 숨쉬나니
한 숨을 평생으로 살고
하루를 영원으로 살아라
오늘 쉬는 숨이 영원의 마지막 숨이니
숨쉬는 순간마다 맥박 뛰는 순간마다
틈틈이 하루하루 그때를 살아라
오, 늘 내게 와 있는 오늘
오, 늘 내가 숨 쉬는 목숨
오, 늘 지나가면 없는 오늘
오, 늘 기다려도 없을 오늘
하루 공부로 하늘을 본다
하루살이로 하늘을 본다
하루살이가 하루 공부다
하늘보며 오, 늘 하루를 산다
이빈섬(필자의 시인필명(詩人筆名))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