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생태문명의 맹아를 담은 다석 사상
2021-02-24 16:06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⑥ 이정배 교수<하>
이정배 교수의 스승인 변선환 전 감신대 학장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폭탄 선언과 함께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간 대화를 중심으로 종교간 대화를 활성화하는 운동도 벌였다. 그러다 결국 보수적인 기독교계 목사들의 표적이 되다시피 해 소속된 감리교단으로부터 출교(黜敎)당했다. 변선환 신학을 계승한 대표적인 제자가 이정배 교수다.
-변선환 학장이 1992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주도하는 교리수호대책위원회로부터 출교 조처를 당했더군요. 김홍도 목사는 지난해 광화문에서 광복절 태극기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를 대형교회 부흥 목사로 데뷔시켜준 사람인데요.
"그 당시 변 교수는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었죠. 70,80년대부터 부흥목사들이 교회들을 크게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로 교회가 엄청난 권력기관이 됐고, 부흥목사들이 교단 정치를 하면서 신학대를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대학을 학문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변선환 박사가 눈엣가시였던 것이지요. 변 학장은 신학대학을 금권과 교권으로부터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흥목사들은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 학장의 신학적 소신을 이단(異端)이라고 몰아 출교를 시켰죠. 나도 그 때 교수였는데, 변 학장이 출교당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습니다, 학생들 수백 명이 출교를 막으려고 금란교회에 몰려갔다가 교회가 동원한 어깨들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종교인 중에서도 개신교가 유달리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태도를 가진 것 같아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가 주로 성경 구절로부터 도출되었다고 말했는데, 주로 어떤 구절을 인용합니까?
“보통 구약성서 출애굽기 20장 3절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가 대표적입니다. 이 두 구절을 이웃 종교를 부정하는 원리로 쓰죠. 하지만 구약성서의 경우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백적으로 했던 말입니다. 자신들 하느님이 최고, 절대라 고백함으로써 종살이하던 이국땅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가 다수의 종교가 되고, 제국주의라고 비판 받는 마당에 고백적으로 이야기했던 언어를 교리적인 차원으로 바꿔놓으면 이런 기독교의 정체성은 사람 잡는 정체성이 되어버리죠. 이런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예.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유불선에 능통한 다석이 정작 동학을 언급하지 않았고, 언급하더라도 부정적인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여기서 다석과 동학을 연결 지어 생각해봐야겠다는 학문적인 관심이 생겨났지요. 그 연결 고리가 바로 천부경이었습니다. 천부경에 근거해서 동학을 보았고 바로 그 동학의 빛에서 다석 사상을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동학을 단지 부적을 신뢰하는 비합리적 종교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천부경은 천지인, 3재 사상의 틀로 구성되었습니다. 천부경의 상경은 하늘, 중경은 땅, 하경은 인간을 주제 삼았습니다. 그 중 하경의 핵심은 ‘인중천지인(人中天地一)’이란 말 속에 담겼는데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중심이란 사상입니다. 한 유교 학자는 여기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넣은 ‘천인무간(天人無間)’을 보기도 했지요. 저는 이 말을 갖고서 동학과 다석을 회통(會通)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 이론과도 변별된다고 여겼지요, 종교다원주의는 큰 틀에서 기독교를 유일 절대의 종교로 보지 않고 제 종교가 저마다 자기 식대로 구원의 길을 간다는 가치 다원주의를 적시합니다. 예수와 붓다 공자 같은 위대한 성인들이 궁극적 실재의 다른 표현이란 것이 서구 종교다원주의 이론의 골자입니다.
하지만 다석은 그 차원을 넘어서지요. 예수 석가 뿐 아니라 우리 인간도 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인중천지일, 모든 인간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없이 계신 이가 인간 속에 ‘바탈’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서구는 붓다 공자 같이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서 다원주의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없이 계신 하나님’을 인간 개개인의 마음(바탈)속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덜 없는 상태에서 뛰쳐나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하나님에게 나갈 수 있는 존재라 본 것입니다. 그런 힘이 예수 뿐 아니라 우리 인간 속에 있다고 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인간 속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귀일사상의 핵심입니다. 예수가 그랬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도 예수처럼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되고 성불(成佛)하고,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과정에서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 귀일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엿새 만에 우주를 창조하고 일곱 번째 되는 날에 쉬었다고 하는데요. 다윈의 진화론으로 보면 허황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다석을 연구하는 이 교수의 학문적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다석을 연구하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서구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적 토양에서 기독교를 이해했던 감리교의 토착화 신학 전통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다석 사상은 지금까지 그 어떤 토착화 신학보다 도발적이고 창발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로써 일본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능가하는 한국적 신학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지하듯 일본 선불교를 배경으로 한 교토학파는 공(空·Śūnyatā) 개념을 갖고서 신의 죽음 이후의 신학을 재정립했습니다. 서구신학이 로고스 개념을 가지고 신학을 만들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공 사상의 개념으로 신학을 재구성한 일본적 기독교가 서구에서도 주목받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교만 아니라 민족 고유한 천부경에 터해 유불선을 통섭한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훨씬 탈(脫)서구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이라 여겼습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다석만 연구한다든지, 함석헌 박영호 김흥호 등 어느 한 인물에 치중한 개별 연구를 넘어서야 하다고 생각 합니다. 다석과 함석헌 간의 차이가 있고, 함석헌과 김흥호가 다르고 박영호와 김흥호 간의 변별력 그 자체가 다석 학파의 기독교를 성립시키는 주요한 근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석 연구자들 간에도 무수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의 논쟁을 벌이기보다 어떻게 다석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는가를 봐야 옳습니다. 이 점에서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모든 분들을 연구하고픈 학문적 욕심이 있습니다. 일본의 교토학파의 기독교처럼 한국에는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있음을 서구에 알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대속적인 기독교 대신 수행적인 기독교를, 배타적인 기독교가 있었다면 불이(不二)적이고 귀일적(동양적) 기독교를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석 학파의 계보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을 통해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다석을 알게 됐는지에 따라 시각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김흥호 선생을 통해 다석에 입문한 신학자입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다석 사상을 수용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다석 사상은 아직 이단처럼 취급받습니다. 그럴수록 김흥호 선생은 다석을 교회 밖의 다원주의자 사상가로만 자리매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교회 안에서 다석을 정착시키고자 애쓰셨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게서 모순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화여대와 감신대라는 기독교 학교 안에 있었기에 다석을 기독교 틀 안에서 가르쳤습니다. 다석을 교회의 교사로서 만들고자 하신 것이지요. 다석 사상을 교회 안에 들여놓겠다는 생각을 나는 동의하고 지지합니다. 물론 다석 사상을 기독교 밖에서 더 넓게 이해하는 것에 찬성하지만요.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김흥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을 배웠기에 대속을 버리고 자속만 취하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석에게 예수가 유일한 스승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물론 인습적인 구세주로서 예수의 이해는 버렸지만요.”
불교계 유교계에서도 다석 연구자 많이 나와야
-불교계 유교계에서도 다석에 대해 연구하는 분이 있나요?
“더러 있기는 하지만 주로 기독교 신학자들이 다석을 연구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웃 종교들에서 다석 연구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유교에서는 고인이 된 도원 류승국 교수가 대표적으로 다석을 좋아했고 연구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 혹은 기독교를 바탕한 종교학자들의 연구만으로 향후 다석 사상이 충분히 발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안병무 선생이 다석 사상을 민중신학으로 발전시킨 것은 큰 공헌입니다. 다석 사상을 세상에 알린 박영호 선생의 공로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다석 사전을 만들고 있는 가톨릭 정양모 신부의 역할도 대단합니다. 다석을 한국의 하이데거로 여기며 그의 말 속에 담긴 철학적 뜻을 살핀 철학자 이기상 교수의 역할도 높이 평가합니다.
-시인 고은이, 다석에 대해 ‘총기가 넘치나 부질없는 생각을 한 늙은이’라고 코멘트를 한 게 있던데요.
“<만인보>에 적힌 이 표현에 대해 정양모 신부가 제일 분노했지요. 고은 시인으로서는 다석이 한글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과 소통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으로서는 다석의 언어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은 시인은 다석이 왜 한글을 그렇게 풀어내려고 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석의 종교관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다석의 삶 중에는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중학교까지만 가르치고, 자신도 일본 유학을 갔다가 그만두고 돌아오고….
“다석의 행동 중에 기행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결혼한 날 신부를 놔두고 일주일 동안 목포 처가에 혼자 갔다 온 일도 있고, 그리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사경을 헤맨 일을 두고도 말이 많습니다. 오산학교 교장을 했고 교육자로 살았음에도 아마 다석 입장에서는 자녀들을 자기 방식대로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고 배우도록 하려던 것이 아니었겠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스스로 하는 공부, 기계적인 학습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일종의 홈스쿨링(homeschooling)이나 가정교육(home education)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러운지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데요. 이 교수는 글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던 데요.
“오늘날 동성애는 과거 천동설 지동설 논쟁처럼 이제 과학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 식물 세계도 동성애의 비율이 대략 10% 남짓 정도 된다고 하죠. 단지 지금까지는 과학적으로 증명을 못했을 뿐입니다.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를 여러 권 펴낸 유발 하라리도 최근 커밍아웃했죠. 기독교는 동성애의 성적 문란함에 초점을 맞추지만, 역사적으로 성소수자(性少數者·sexual minority)들이 창조적인 일을 엄청나게 해냈습니다. 동성애를 병이나 죄로 다루기보다는 그들 성정체성(성지향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이고 복음이라 생각합니다.”
동성애를 범죄로 보지 말고 성 정체성 인정해줘야
-성경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구절이 더러 있지요?
“구약 롯기에 남색(男色) 이야기가 있고, 로마서에 보면 어린 소년들을 성적으로 농락하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사실 동성애의 문제로 보기보다 권력의 문제로 봐야 옳은 거지요. 설령 성서 어느 부분에 그런 기록이 있다 할지라도,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XY 염색체만 알았는데 XXY 염색체도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성지향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들을 자꾸 억압하고 몰아치면 음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고 나쁜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어요. 이들을 불행한 존재로 만든 데는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책임이 큽니다.”
-세월호 아픔에 참여하는 이 땅의 신학자들 모임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데, 한국에서 세월호를 바라보는 시각도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팩트는 분명히 있는데 서로 다른 오피니언을 만들며 싸우잖나요. 세월호를 가지고 정치가들이 이데올로기 싸움을 조장했어요. 팩트를 명확히 밝히면 오피니언 간의 갈등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시민 사회와 함께 정치인을 움직여 진실 규명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합니다. 지금도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어머님들 추위에 노숙하고 있어요.”
이정배 교수의 부인은 여성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은선 세종대 명예교수다. 성균관대 동양철학 대학원에서 ‘조선 유교의 종교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편과 함께 스위스 바젤에서 신학대학 박사 논문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공부를 더해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갖게 됐다.
“저희 집사람에 대해 물어줘서 고맙습니다. 부부관계를 너머서 학문적 동지로 살고 있습니다. 바젤 대학에서 변선환 선생 내외분과 같은 교수 지도 하에 논문을 썼습니다. 지도 교수는 알버트 슈바이처와 칼 야스퍼스를 배경으로 독창적인 신학 활동을 하던 분이었지요. 그의 지도하에 변 선생 내외는 기독교와 불교, 우리 부부는 유교를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저는 주자학 쪽으로, 저희 집사람은 양명학을 주제로 기독교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은선 교수는 부족한 한문 공부를 더하면서 8년에 걸쳐 한국 철학 분야에서 유교의 여성 종교성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향후 미래가 중국 문명과 미국 문명의 갈등으로 본다면, 종교로는 유교와 기독교가 될 텐데, 지금과는 다른 유교가 필요하고, 지금과는 다른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비판적인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설립한 한국 신(信) 연구소를 통해 기독교를 유교적으로, 여성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로 학문적 토론의 장이 열리며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70년과 기독교’라고 하는 책은 2년간 작업해서 이번에 출판합니다. ‘종교개혁 500년과 이후 신학’ ‘3·1 선언 100주년과 이후 기독교’ 등의 책도 앞서 펴냈지요. 이은선 교수의 선친인 고 이신 박사의 연구서 ‘환상과 저항의 신학’, 그리고 해천 윤성범 교수 탄생 100주년을 추모한 ‘우주 보편적 영성으로서의 성과 효’란 책도 발간했습니다.”
부암동 집 대문에 현장(顯藏)아카데미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유승국 선생의 작명이다. 인(仁)의 주역적 표현이 현장이라고 한다.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진다고 해서. 횡성에서는 화전민의 집을 사서 20년째 가꾸며 예배드리고 농사를 짓고 수확도 함께 한다. 횡성은 노동과 기도의 수행 공동체이고, 부암동은 학문 공동체다.
-생태신학에 관한 논문을 많이 쓰던데요. 다석의 가르침과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다석을 생태 신학적으로 연구해서 외국어 논문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더라고요. 우선 앞서 말씀드린 일식(一食)의 개념을 simplicity(단순함)로 본 것이 생태적인 사유(思惟)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다석의 말씀 중 중요한 것으로 견물생심(見物生心)과 견물불가생(見物不可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견문불가생, 즉 물건을 보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다석의 가르침이에요. 서구의 신학과 철학에서 존재는 언제나 ‘있음(유·有)’ ‘Sein'의 차원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있음’을 우선하는 세계관에서 견물생심의 유혹은 결코 소멸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견물불가생이 가능하려면 있음보다 ‘없음’을 더 중요시하고, 빛보다 ‘어둠’에 무게중심을 두는 새로운 철학이 요구됩니다.
알다시피 유영모 선생의 아호인 ‘다석(多夕)’엔 저녁 석(夕)이 3개 들어있지요, 이기상 교수가 ‘태양을 꺼라’라고 멋지게 풀어서 다석 사상의 핵심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빛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의식의 세계죠. 그런데 다석은 ‘빛(의식)을 꺼라’ ‘태양을 꺼라’고 말합니다. 빛이 꺼질 때 광대한 우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다석은 생각의 빛을 끄고 보이는 세계를 단절하는 의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있음을 근거로 하는 서구적 인식으로는 우리의 자본주의 문명을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을 있게 하는 테두리를 먼저 보는 것, 그렇게 하면 견물불가생, 물건을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놔둘 수 있지 않은가요?”
부암동은 다석이 과수원을 가꾸고 축산을 하고 수행을 하며 살던 구기(舊基)동에서 버스 두세 정거장 거리다. 원래 인터뷰를 횡성 현장아카데미에서 하려고 했으나 눈이 많이 오고 찻길이 험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이 교수와 우리 일행은 두 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부암동의 한 식당에서 치킨과 볶음밥을 먹고 눈길을 걸어가다가 헤어졌다.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