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6)] 마지막 숨을 끄는 게 '소식'

2020-12-14 11:22
3만번의 저녁을 읊은 제자 시를 류영모가 고친 뜻

[다석 류영모]



3만번의 저녁을 읊은 시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연하던 게 이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오래 살려고 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다. 사람은 대개 100년을 넘어 못사는 것을, 지나간 사람들을 통해 알면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한사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약 83세다. 남자는 80세이고 여자는 86세다.

앞으로 자신이 이 지상에 얼마나 더 우물쭈물하고 있을지 계산하는 일은 초등학교 산수다. 남은 해가 20년이라고 치자. 우린 그 시간이 지금껏 살아온 것과 같은 품질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유와 희망을 지니고 있을 때의 삶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지금의 나와 죽음 사이의 시간에는, 스무 개의 봄이 있다. 스무 번의 설날을 맞고, 스무 번의 한가위 달을 만날 것이다. 스무 번의 홍시가 달리고 스무 번의 첫눈이 올 것이다. 조금씩 뚜렷이 늙고 사위어 가는 육신이 그것을 맞을 것이다.

이것을 여생(餘生)이라고 한다. 남은 달란트가 적다고 푸념할 필요는 없다. 평균 수명이 의미하듯, 모든 사람의 목숨의 기한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대개는 비슷하게 수렴하도록 되어있다. 조물주의 계획에 의해 평균 수명이 정해져 있다면,  남들보다 더 많은 수명을 가지려고 하는 욕심은, 어쩌면 남의 수명을 훔치는 것과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지닌 수명을 알차고 가치있게 누리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71세의 류영모는 치명적인 낙상(落傷)에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 그는 일찍부터 나이를 세지 않고 날수를 세며 살았다. 한 해를 단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 한해에 닿는 삶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고를 당했을 때 2만6000날의 고빗사위를 넘겼던 류영모는 그로부터 4000날을 더 살아, 3만번째의 저녁을 맞게 된다. 1972년 5월 1일이 그날이었다.

제자 박영호(1935~  )는 스승을 위해 '삼만석(三萬夕)'을 기리는 시를 썼다.

參萬日新始公元(삼만일신시공원)
稀貴年古成經典(희귀년고성경전)
存心觚硬異風俗(존심고경이풍속)
養性圓滿合天父(양성원만합천부)

                            박영호의 '삼만일(參萬日)'


삼만번 하루를 살며 큰 길의 처음을 새롭게 열었네
칠순 희년과 팔순 귀년이 쌓이는 동안 경전(
經典)을 이뤘네
하늘마음 보존함이 참으로 굳으니 여느 세상살이들과는 달랐다
속알을 길러 둥글고 가득해지니 하느님 뜻에 맞았다

                          박영호의 '3만번의 하루'


류영모는 제자의 시를 읽고는, 3행과 4행을 고쳐주었다.

心如一 調風俗(심여일 조풍속)
養性圓滿參氣天(양성원만참기천)

마음은 '하나'와 같으며 세상살이들에 맞춰 살았다
속알을 길러 둥글고 가득해지니 하늘의 기운에 들었다


류영모의 삶을 읽는, 제자와 스승 본인의 관점이 미세한 차이지만 흥미롭다. 박영호는 스승이 '존심고경(存心觚硬, 하늘마음을 보존함이 굳셈)'을 실천했다고 높이 세웠지만, 류영모는 늘 하느님 닮기를 애썼다는 정도의 겸양으로 낮췄다. 또 박영호는, 스승이 시속(時俗)을 벗어나 다른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류영모는 굳이 세상을 벗어나거나 멀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과 함께하며 조화와 교화에 힘썼음을 조풍속(調風俗)으로 표현했다. 가족들과의 관계나 제자들과의 인연도 담담하지만 성기지는 않았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인심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제자가 표현한, 합천부(合天父, 하느님과 하나됨)란 말 또한 너무 크고 호방한 표현인지라, 하늘에 대한 겸허와 인간의 노력을 다하여 오로지 그 기운에 들어가고자 애쓰는 면모를 참기천(參氣天)이란 말로 그려주었다.
 

[류영모의 직계 제자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참기천(參氣天)은 류영모 철학의 본령

이 의미심장한 교열(校閱)은, 류영모가 스스로의 생을 어떻게 생각하며 삶의 기틀을 세워왔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연경반 강좌를 통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세상에 알리고자 평생 노력했으며, 많은 제자들과의 교감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수행을 독려하고자 했다. 하느님의 '하나'와 같은 맘으로 시종여일 세상의 허튼 일들을 바르고 고르게 하고자 했다는, 心如一 調風俗(심여일 조풍속)은 류영모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養性圓滿參氣天(양성원만참기천)은, 저마다의 속알을 제대로 키워 하느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류영모 프로그램의 전부다. 이것이 명실상부한 영생(永生)이다. 육신의 영생을 추구하는 것은 허황하고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오로지 하느님에게 닿아 생령(生靈)을 얻는 것 외에는 영생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지금의 많은 신앙인들에게도 필전(必傳)해야할 메시지다. 그는 이렇게 강의했다.

"이 땅 위에서 몸으로 영생(永生)한다는 것은 미신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절대(絶對) 유일(唯一)의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고 하느님에게 붙잡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지요. 성경에 내 말을 믿겠느냐는 말은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는 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나 선지자를 믿는 게 아니에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 속에 보내신 이(얼나)를 믿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성(佛性)이 자기에게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내 속에 하느님의 아들(얼나)이 와 있음을 믿는 것이지요. 예수하고 우리하고 차원이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석가는 우리와 똑같습니다. 얼나를 깨달으면 예수와 석가와 한생명입니다."

직계 제자 박영호는 누구인가

박영호 선생(1935~ )은  류영모(1890~1981)의 직계 제자로 꼽힌다. 그는 1971년부터 다석전기 집필 준비를 시작했다. 스승이 읽은 책을 읽고, 스승의 삶을 구술받고, 스승이 직접 쓴 일지를 필사했다. 그가 집필에 들어간 것은 류영모가 눈을 감은 1981년부터였고 4년 만인 1985년에 책을 냈다. 문화일보에 다석사상에 관한 글을 325편 연재했고,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 5권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류영모와 사제(師弟)의 깊은 연(緣)을 맺었을까. 그 삶을 잠깐 들여다보자.

박영호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7세로 헌병대로 징집된다. 당시 공업학교 학생이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영혼이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밤마다 눈만 감으면 해골과 시신들이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악몽을 경험했다. 그 무렵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었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에 매달려 전집을 모두 읽었을 무렵, 우연히 당시 사상계에서 함석헌의 글을 접했다. 큰 감명을 받았던 그는 편지를 썼고 40여통의 글을 교환하면서 그를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1956년 함석헌의 천안 농장으로 가서 함께 생활한다. 낮에는 과수원에 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했고 밤에는 성경과 톨스토이, 사서삼경과 고문진보, 그리고 간디 자서전을 읽으며 토론했다. 3년간의 고귀한 수업이었다.

1959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함석헌의 스승인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한다. 경기도 의왕에서 농장 6천평을 개간해 밭으로 일궈 농사를 지으면서 매주 금요일 빠짐없이 서울로 올라와 YMCA연경반에서 류영모 강의를 들었다. 류영모의 구기동 자택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5년간의 열정적인 '수도'생활이었다. 1965년 9월 류영모는 제자 박영호에게 '단사(斷辭)'라는 말을 건넸다.

"나는 제자들을 모으지 않습니다. 흩어서 모두가 제 노릇 하기를 바라지요. 박형도 나를 찾아올 생각도 안 나야 하고 편지 쓸 생각도 안 나야 됩니다. 이를 단사라고 하지요. 단사를 해야 합니다."

단사는 주역 계사 하편에 나오는 말이다.

夫易 彰往而察來 而微顯而闡幽 開而當名 辨物正言斷辭 則備矣
(부역 창왕이찰래 이미현이천유 개이당명 변물정언단사 즉비의)

주역은 과거를 밝히고 미래를 살피는 것이다. 안 보이는 것을 드러나게 하고 숨은 것을 내보이는 것이다. 공개를 하여 마땅한 이름을 붙이고 사물의 이치를 변별하고 말을 바르게 하되 그 구구함을 끊으니 그래야 갖춰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언단사'로 바른 말의 줄기를 얻었으면 거기서부터는 스스로 그 정수를 터득해나야 하는 것을 뜻한다. 주역이 세상과 인간의 변화를 밝히지만 그것에서 통찰을 얻은 뒤엔 구체적인 것에 적용하고 응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직접 해야 한다는 논리를 빌린 것이다.

이후 그는 스승을 떠나 5년간 독자적으로 수행공부하는 시기를 가졌다. <새 시대의 신앙>이란 책을 낸 것은 그 결과였다. 류영모는 그에게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고 쓴 엽서를 보내준다. 이후 류영모는 그에게 전기 집필을 허용했다. 

[류영모의 시 '소식(消息)' 읽기]

소식이란 말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좀 오묘한 말이다. 대개 쓰는 말로서의 의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사정을 알리는 말이나 글'이다. 언론에서는 상황이나 동정을 알리는 보도, 혹은 일반적으로 뉴스 전체를 소식이라고 부른다. 지난 시대엔 왕에게 조목별로 자세히 보고하던 계목(啓目)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그런데 좀 더 깊은 뜻으로는 '천지의 시운(時運, 시간에 따른 흐름)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이나 순환하는 것'이란 의미가 있다. 주역에서는 음양(陰陽)이 번갈아가며 도는 것을 소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런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큰 깨달음'을 말하기도 한다. 우주의 근본적이고 영원한 진리가 인간의 인식망에 포착되었을 때, 그것을 소식이라고도 부른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식'이라고 표현한다. 복음이라는 말을 '기쁜 소식'이라고 푼다.

소식은 한자로 消息이라고 쓰는데 이 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소(消)는 '불을 끄는 일이나,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것'이고 식(息)은 '숨을 쉬거나 무엇인가를 멈추고 쉬는 것'이며, '숨'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식(息)은 생물이 생존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가라앉아 안정이나 평온을 찾는 경우를 말하기도 하고, 자식(子息)이란 말에 들어있는 의미처럼 '자라나고 생겨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소식은 '사라짐과 생겨남, 혹은 죽음과 탄생'이라고 풀 수 있다. 

'소식'이란 말을 류영모는, '숨[息]을 끄는[消] 것'이라고 풀었다. 즉 죽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유에 도달한 사람은 류영모가 처음일 것이다. 9억4천만번의 숨으로 이뤄져 있는 목숨은 마지막 숨을 끄면서, 한 소식을 듣는다. 하늘로 올라가 기천(氣天)에 참여하는 깨달음의 소식이다. 해박한 지식에서 피어났을, 언어의 질감과 오의(澳意)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솜씨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류영모 한시 '소식(消息)'. 한번 읽어보자. 

消息消息何消息 宇宙氣候平消息(소식소식하소식 우주기후평소식)
尋消而息人消息 與消寢息自消息(심소이식인소식 여소침식자소식)

소식소식하는데 무슨 소식 말인가
우주의 기후는 아무 일 없는 게 소식이네
누가 죽었나 누가 살았나 묻는 게 남들의 소식이지만
죽음과 더불어 잠자고 쉬는 게 내 소식이라네

寢息無恙一姑息 父母有養多子息(침식무양일고식 부모유양다자식)
九億四千萬回消 無量不可思議息(구억사천만회소 무량불가사의식)

무탈하게 잠자는 것이 한가족이 쉬는 것이고
부모가 잘 기르는 게 자식들 쉬는 것이네
9억4천만번 숨을 쉬니
무한히 불가사의한 숨을 쉬네

壹氣衆生同胞消 非候一也獨胎息일기중생동포소 비후일야독태식)
消遺有待食消化 休息無他要氣息(소유유대식소화 휴식무타요기식)

한 기운의 뭇생명은 아들딸 낳는 소식
영원한 하나는 독생자가 태어나는 소식
남은 배를 끄려면 기다리면 먹은 것은 소화되고
휴식은 다른 게 아니라 숨 고르는 것이네

隱顯事物萬化消 活殺心身一氣息(은현사물만화소 활살심신일기식)
便消利見死消息 通息窮消活消息(편소리견사소식 통식궁소활소식)

사물이 숨었다 드러나는 것은 만물변화의 소식이고
심신이 살고죽는 건 한 기운이 숨쉬는 소식이네
제멋대로 이로운 것만 듣는 것은 죽은 소식이요
큰 소식을 통하고 궁구하는 건 살아있는 소식이네

歌消舞息固孤單 消舞息歌眞消息(가소무식고고단 소무식가진소식)
消息象中消息子 氤氳氣壹通消息(소식상중소식자 인온기일통소식)

노래와 춤을 소식으로 삼으면 외톨 되는 길이지만
큰 소식을 노래하고 춤추면 참소식이다
소식의 느낌이 있는 중에 소식이 오고
합쳐진 기운 하나가 소식과 통하는 것이네

心可配地重 身克奉天敏(심가배지중 신극봉천민)
脫則生 套故則殞(탈즉생 투고즉운)
直前勁志勤地來 何上毅氣冲天去(직전경지근지래 하상의기충천거)

마음은 땅을 벗삼으면 묵직해질 수 있고
몸은 하늘 우러르면 민첩함을 이길 수 있네
벗으면 사는 것이요 죽음을 덮어쓰면 죽는 것이다
방금전에 굳센 뜻으로 부지런히 땅에 왔다가
어찌 대단한 기세로 하늘 올라가는가

[빈섬 풀이]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