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4)] "우리 만남은 바람꽃이었소" 류영모의 탄식
2020-12-07 10:30
류달영과 현동완, 류영모가 아낀 제자들
스승이라는 말 속엔 허허벌판이 있다. 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크고 굳센 어른 하나 서 있다. 스승은 말하지 않는다. 그 삶이 거울이 되어 내내 한 존재를 비춘다. 스승은 원래 앞날을 예언하는 여자무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죽음이 늘 가깝게 내려와 있던 맨발의 시절에 부락의 중심에 좌정하고 앉아 가야할 길을 읽어내던 지혜로운 자였다. 스승이 교육이라는 백년대계를 책임지게 된 것은 거기서 연유한 것일까. 그 뒤 부처의 가르침에 한 나라가 귀의하면서 왕을 길러내는 스님을 스승이라 불렀다. 한 사람의 덕망이 어린 왕자에게로 스며들어가 교화중생(敎化衆生)의 눈밝음과 향기가 되는 것. 그것이 스승의 옛뜻이다.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는 것. 거기엔 허허벌판에서 허허벌판으로 이어지는 진수(眞髓)의 이동이 있다. 누군가가 나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가슴에 평생 지지 않는 해를 달아 거는 일이다. 나를 스승으로 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또한 나를 해 삼아 세상을 비춰보는 것이다. 눈 내리는 막막한 삶에 문득 홀로 서서 앞을 내다보고 하늘을 쳐다보는 스승. 그 스승의 안광(眼光)을 빌려 세상을 읽고 다시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야 말로 인생공부의 간명한 요약이다. 류영모는 하느님의 말씀을 체현(體現)한 '예수'를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큰 길을 연, 스승이 되었다. 그가 말하고 행하는 '참(眞)'을 실감하고 인식한 제자들이 그를 모셨으며, 본받고 따르고자 했다. 그중에 류달영과 현동완의 길을 살펴본다.
박정희의 재건국민운동과 류달영
류영모는 세상에서 뭔가를 도모(圖謀)하는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의 정신적 기반이 된 두 제자를 두게 된다. 그의 씨알사상으로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함석헌이 그의 제자였고, 역시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 이후 국가재건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이후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주춧돌을 놔줬던 류달영(1911~2004) 또한 그의 제자였다. 말하자면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중요한 국가발전의 축을 기초한 두 사람이 그를 사사(師事)한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였다.
류달영은 박정희가 설립한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맡았다. 권력 찬탈을 한 박정희에게 뜻을 굽혀 복무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사정권을 싫어한다. 국민운동의 첫째 목적은 군정(軍政)을 단축시키는 데 있다." 박정희는 5·16 이후 권력을 잡은 뒤 위축되고 이반된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재건국민운동을 구상했다. 박정희는 그 본부장에 함석헌을 생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유진오에게 맡겼는데, 그는 두 달을 맡고 물러났다. 이후 유달영에게 본부장직을 제안했다. 그 또한 바로 거절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끈질기게 그에게 요청을 했다. 그때의 상황을 류달영은 이렇게 회고한다.
"1961년 이 나라에는 불행하게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정신개혁과 생활혁신을 목표로 재건국민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을 폈다. 유진오가 초대 재건운동본부장을 두 달 맡고 내가 2대 본부장으로 위촉되었다. 직위는 총리와 동급이었다. 내가 그 직책을 맡기까지는 적지 않은 사연이 있다. 하루는 박정희 장군이 나를 불러 본부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대학에서 학구의 생활로 일생을 보내려는 것이 나의 소신이라고 했다. 두 번째 만나서는 거절하면서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며칠 뒤에 추천자 명단을 내놓았더니 웃으면서 모두 검토가 끝난 인물들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인편으로 서너 차례 교섭이 왔으나 번번이 거절했다. 여섯 번째의 면담에서 그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는 수락하지 못할 만한 조건 3가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을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3가지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정부는 일체 간섭을 안 한다는 조건이었다. 류달영은 박정희의 육고초려(六顧草廬) 끝에 철저한 자율을 약속받고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이 됐다. 이 제안을 수용한 까닭은 덴마크 그룬트비처럼 위기의 나라에 정신운동을 일으켜 후진적 정치와 경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애국적 열정 때문이었다. 류달영이 본부장이 되고난 다음, 그의 스승 류영모는 위촉장을 받았다. '중앙위원'으로 모시고자 하는 요청이었다. 중앙위원에는 함석헌, 이관구, 고재욱, 김팔봉, 김재준, 김활란이 포함되어 있었다. 류영모는 제자 류달영의 좋은 뜻을 도와주자는 생각에서 이를 응낙했다. 물론 류영모가 생각하는 '재건'의 의미는 훨씬 컸던 것 같다.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 위촉장을 받고난 뒤 류영모는 YMCA연경반에서 그 일을 공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재건(再建)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 같습니다. 새삼스레 재건이 뭡니까. 우주혁명이라고 하는데 우주재건이라고 해야 합니다. 석가와 예수는 우주재건을 가르쳤습니다. 우주 자체는 자연이라 내버려두고 나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우주혁명이란 인간혁명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이 뚜렷해야 합니다. 내 속에 하느님이 보낸 성령인 얼이 뚜렷하면 됩니다."
이후 류영모는 1년 8개월 뒤에 류달영이 본부장에서 물러났을 때 중앙위원을 그만두었다. 당시의 상황을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정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육사8기 출신 군인들의 행패도 적지 않았어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때 국민운동은 민간인이 주도한 민주적 향토건설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에 의한 관주도 운동이었습니다. 국민운동의 방법은 덴마크 부흥의 핵심이었던 연수원 교육의 실천이었어요. 서울에 중앙연수원을 비롯하여 각 시도에 시도연수원 그리고 시군에 시군연수원을 세운 뒤 향토건설을 위해 청년교육을 실시한 것입니다."
즉 재건국민운동은 민주적인 운동으로 시작했으며 류달영이 생각했던 덴마크 농촌 부흥의 '국가번영 시나리오'를 실천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일을 국민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나서서 진작하고 추동(推動)하여 이끌고 나가는 '새마을운동' 쪽으로 바꾼 것이다. 류영모는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철학과 취지는 류달영의 민주적인 재건국민운동에서 나왔으나, 실행 방식은 독재정권의 강제적인 스타일로 진행된 변종이었다는 얘기다.
류영모와 류달영은,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국가번영 철학의 바탕을 제공하였으나, 그 권력의 전횡에는 동의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다. 박정희가 류달영에게서 얻은 민주적 방식의 농촌 부흥과 경제 발전을 꾀했더라면 이 땅에 산업화와 민주화가 함께 이뤄지면서, 박정희 정권이 독재의 말로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석헌 또한 민주화를 위한 치열한 투쟁 대신 정신적인 추구를 하는 데 평생의 열정을 쏟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역사에는 만약(萬若)이 없다. 긴 상처로 점철된 비극의 결말이 남았을 뿐이다.
1922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YMCA로 파견된 그는 4년간 퀘이커교도와 교류하며 정신적인 눈을 새롭게 떴다. 1926년 귀국해, 당시 복음사회주의 경향에 반대하여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YMCA 소년 평화구락부가 그 활동의 중심이었다. 기도회와 체력 단련, 그리고 사회봉사가 수련 내용이었다. 이 운동은 전 연령을 망라한 '참운동'으로 전개된다.
현동완은 '류영모 금요강화(講話)'를 개설하여 참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 운동은 기독교 교계 내에서 반발에 부딪쳤고 보수세력과 사회복음주의의 저항에 흔들리게 된다. 현동완은 YMCA연합회 순회간사를 맡으면서 참운동을 확장하고자 하였으나 기독교 청년회의 반발로 1937년 사임을 하고 함북지방에 은둔한다.
해방 이후 그는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으로 일했고 1948년에 서울YMCA총무를 맡는다. 그는 복음운동의 대중화를 외치며, 매주 3대 신앙강좌(류영모, 한에녹,함석헌)를 열었다. 현동완은 식민지시대에 불굴의 의지로 지속했던 류영모 강좌를 다시 열어, 해방 공간으로 이어지는 정신운동을 전개한 셈이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꾸준히 류영모를 강단에 모셨던 그는 1957년 3월 총무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1959년 병을 얻어 난지도 삼동소년촌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3년 눈을 감는다. 그의 생은 YMCA와 함께했으며, '류영모 강좌'와 함께한 것이기도 하다.
문학가이자 목사였던 황광은은 현동완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세기 종로의 성자였습니다. 그는 분명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은 복이 있다고 외친 그 주님께 미쳤던 것입니다. 그가 커피를 안 마신 것은 나라를 위함이었고, 고기를 안 먹은 것은 세계평화를 위함이었습니다. 하루 한끼씩 안 먹은 것은 불행한 고아를 위함이었고, 사과를 안 먹은 것은 병자를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는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불우한 형제에게 다 나눠주고 남은 한 벌로만 살았습니다. 그는 머리 둘 집이 없었습니다. 난지도 소년촌 단칸방을 병실로 쓰다가 거기서 돌아갔습니다."
오직 이웃의 삶, 고통받는 불우한 이들의 벗으로 살고자 했던 현동완은, 그 실천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스승 류영모를 통해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것이다. 스승의 '참'이야 말로, 그리스도에 미친 삶에 다름 아니었기에 그는 그 '참'을 필생의 신앙으로 삼아 죽음까지 나아갔을 것이다.
류영모는 난지도 소년촌으로 그를 문병한 뒤 '다석일지'에 이렇게 썼다.
언님 이제 아무 일도 못보심 만큼 싸흐심!
벽새에 앉은 이 아운 한우님 계로만 생각
한님계 이기신 님계 이길 싸움만 봅소사!
(형제여, 이제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만큼 홀로 싸우고 있구려.
벽 사이에 앉은 이 동생은 하느님이 거기 계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거기를 이기신 님의 거기, 이기는 싸움만 바라보시기를.)
류영모에게 현동완은, 그가 세상에 내놓을 복음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평생의 '복음집사(執事)'였다. 1963년 현동완이 돌아간 뒤 류영모의 YMCA연경반은 끝이 났다. 전택부가 총무를 이어받았으나, 그는 '류영모 강좌'를 만들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35년 강연역사가 급작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류영모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겨놓았다. "창주도 이젠 우리 인생 만났다던 것이 바람꽃만이었던 것을."
류영모가 80세 때 문득 제자에 관해 남긴 말이 있다. 그의 제자들에게는 뼈아픈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무가 많으면 그 속에는 반드시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낢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 사람은 많으나 재목으로 쓸 만한 사낢은 없을까. 내가 여든을 살면서 아직껏 저 사람이면 사낢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류영모는 나무 중에서 쓸 만한 나무를 가리켜 '낢(材)'이라고 표현하면서, 뛰어난 제자를 '사낢'이라 표현했다. 낢은 '날(飛)'과 남(生)'이 함께 들어가, '뛰어오르는 후생'의 의미가 된다. 사람의 낢이니 인재(人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제자 중에서 '저 사람이면 뒤를 맡길 인재라 할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70년에 한 말이니, 이미 많은 제자들이 품을 거쳐 떠나간 다음이다. 그의 사상과 길을 온전히 믿고 맡길 이를 찾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했을 것이다. 제자들에 대한 폄하나 불신이라기보다는, 류영모의 잣대와 기대하는 높이가 만들어내는 미흡이라고 봐야 하리라.
하지만 류영모의 아낌과 칭찬을 받은 제자는 적지 않았다. 함석헌이 구속되었을 때 류영모는 하느님께 하는 기도는 영원한 생명만 구해야지 세상 일을 어찌해 달라고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그가 구속되었다 하니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김흥호가 공부 모임에 다녀오느라 약혼녀에게 파혼당한 것을 두고도, 그의 열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류승국이 석가와 공자, 예수처럼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갈 수 있겠다고 말했을 때도 기뻐했다. 서완근이 천안 광덕에서 농촌운동을 했을 때도, 류달영이 <새 역사를 위하여>란 책을 썼을 때도 칭찬을 했다.
35년간의 강의에 찾아왔던 사람들 중에는, 한학자 범부 김정설, 논어를 영어로 번역한 변영태,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신도안의 정도령이라 불린 양도천, 시인 김관식, 도인 대오 석종섭 등도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간 모임은 광화문 문정길 사무실에 있었던 모임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