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9)] 바보새의 눈물과 다석의 고함소리
2020-11-04 09:40
류영모의 길, 함석헌의 길…스승과 제자의 절연(絶緣) 사건
[조금은 특별한 내용이 있는 시리즈에 들어가며, 필자의 말 = 어떤 의미에서든, 류영모와 함석헌 두 분이 모두 '큰 사람'인 만큼, 그 주체의 삶과 선택을 기반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다석의 원칙에는 맞지 않았지만 바보새(함석헌)의 길이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는 없고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다석의 비판을 함부로 일반화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길을 간 것이었고, 뉘우침까지도 그의 길이었다. 지금 읽어야할 건, 다석의 철두철미(徹頭徹尾)다.]
류영모는 함석헌을 파문(破門)했다. 은둔의 스승이 명망(名望)의 제자를 기소했다. 파문이랄 것도 없다. 그저 마음의 문을 닫아건 것이다. 마음이 오가던 실바람의 틈을 봉한 것이다. 류영모는 함석헌의 재능과 깊이를 아꼈다. 몹시 아꼈다. 그랬기에 그 파문으로, 함석헌보다 스스로가 더 아파했다. 류영모가 돌아간 뒤, 함석헌은 기일(忌日)마다 찾아와 사죄와 후회와 함께 오열했다. 스승에 대한 죄책감보다, 자기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욕은 오로지 자기 계율일 뿐이며, 파계 또한 자기 계율로부터의 이탈일 뿐이다. 하지만 그 계율이 아니고서는 오롯한 절대에 대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라고 류영모는 생각했을 것이다. 함석헌은 그 계율의 빛과 힘을 머리로 알았지만, 그것을 '몸'의 끝까지, '맘'의 바닥까지 믿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믿는 스승을 깊이 존경하고 몹시 우러렀을 뿐인지도 모른다. 분노와 실망은, 어쩌면 자기 문을 걸고 스스로의 내부를 확인하는 '원칙'의 소동(騷動)인지도 모른다. 스승 또한 제자가 오로지 자기의 믿음과 자기의 길을 따라오기만을 바라는 것이 옳았는가. 그 차이와 차질이, 격노할 일이었는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잘못 알았던 건 아니었던가. 혹은 '함석헌이 보여준 모순'이야말로 또한 사상과 믿음을 구하는 뒷사람들의 큰 연구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격동하는 사회의 선두에서 목숨을 걸고 옳음을 외칠수록, 내면의 방황과 자기 이탈이 깊어졌던 그 모순의 생. 두 사람은 같은 날에 태어나 하루 차이로 모두 돌아갔다. 남은 것은 등돌린 '원칙'의 서늘한 온도와 격한 마음의 먼지들이다.
나를 꽉 붙잡을 팔은 없더냐
나를 듬석 안을 가슴은 없더냐
나를 환하게 비춰줄 얼굴은 없더냐
저 해와 같이
밝고 빛나고 뜨거운 저 태양과 같이.
아니야요 아니야요 그걸 모르지 않아요
하나 사랑은 시내처럼 잠잠해야 해요
이래도 좋아요 끊었다 잇는 가는 속삭임 이대로 좋지 않아요
함석헌의 시 '내 마음에 주는 사랑' 중에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함석헌
함석헌(1901~1989)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종교사상가이며 언론인, 민권운동가, 빼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평북 용천 출신으로 평양고보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절했다. 1921년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고 여기서 류영모를 만난다.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모임에 참가해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이후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등과 함께 무교회 신앙클럽을 만들었고, 1927년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하고 글을 기고한다. 1928년 오산학교 교사가 되어 역사와 수신(修身·도덕)을 가르친다. 1934년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연재했다. 1940년 계우회(鷄友會, 도쿄대 농학부의 조선인 학생 독립운동 단체) 사건에 연루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옥살이를 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간 복역한다.
해방 이후 신의주 학생 반공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됐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뒤 1947년 3월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때 다시 스승 류영모를 만난다. 1956년 장준하의 천거로 '사상계' 논객으로 활약한다. 1961년 장면이 국토건설단을 창설했을 때 정신교육 강사로 초빙됐다. 5·16이 있던 1961년 사상계에 쿠데타를 비판하는 신랄한 글을 썼다. 1962년 미국 국무성 기독교도들의 특별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퀘이커교도를 접한다.
1970년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1974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탄원에 서명했고 10·26 사건 이후 윤보선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한다. 1979년과 1985년 미국 퀘이커 단체가 함석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1980년 11월 위장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사건 연루 혐의로 재판정에 섰고, 징역 1년을 선고받는다. 나중에 복권되었다. '씨알의 소리'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8년간 폐간됐다가 1988년 복간됐다. 5공화국 시절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의 고문직을 지냈다. 1989년 별세했다.
숨가쁜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나마 다시 일별(一瞥)하는 까닭은, 세상에 드러난 '민권운동의 대부' 함석헌이 아닌 류영모의 '1호 제자'로서의 영욕(榮辱)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를 지낸 철학자 김용준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화학 빼고는 다 함 선생께 배웠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 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난센스야. 그건 함 선생의 일부이고 80퍼센트는 도를 찾아 헤매던 구도자였어요." 김용준은 또 함석헌이 6·25 직전에 전쟁을 예감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 바로 일주일 전에 함 선생이 '이 백성들이 왜 이러지, 지금 밑에서는 용암이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그 위에 살짝 덮인 암반을 마치 만세반석처럼 여기고 까불고 있으니 이게 언제 터질지 몰라.'라고 하셨지요. 아마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런 식이 아니었나 싶어요."(2004년 9월 6일 조선일보 이유선 기자, 김용준 인터뷰)
1947년 3월 북한에서 월남한 함석헌은 류영모를 본받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류달영은 "함석헌 선생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류영모 선생을 닮으려 했다"고 증언한다. 스승처럼 한복을 입고 하루 한끼를 먹었으며 모든 길을 걸어다녔다. 금요일에는 류영모의 모임에 빠짐없이 나가 스승의 말씀을 들었고 일요일에는 스승을 모시고 일요집회를 열었다. 류영모는 함석헌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내 뒤에 오는 자가 나보다 앞선 자라>는 것은 이즈음 진리의 발달이 그러합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 척하더라도 내 말을 듣고 뒤좇아 오는 사람은 언젠가는 나를 앞설 것입니다. 나 역시 미완고(未完稿)를 완결짓기를 바라나 내 손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내 뒤에 오는 이가 할 것입니다."
톨스토이를 두고, 괴테를 봤습니다
이렇게 기대를 했던 함석헌에게서 불미(不美)한 소문이 있었다. 류영모가 날마다 투철하게 실천해온 수행이 즉 '탐진치의 짐승'을 벗어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수욕(獸欲)을 떨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제자를 본 것이었다. 1947년, 류영모 57세, 함석헌 46세. 스승은 제자의 허물을 자신의 허물로 받아들여 8일간 단식을 했다. 함석헌은 스승이 단식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기동으로 찾아왔다. 그는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실덕(失德)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류영모가 나직이 물었다. 한참 뒤에 함석헌이 대답을 했다.
"그동안에 톨스토이를 두고 괴테를 읽어보았습니다."
류영모는 깜짝 놀랐다. 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족(失足)'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톨스토이가 일러준 '신과의 대화'를 놓고, 괴테의 '엇나간 사랑'을 취했다는 말은, 몸나에 빠진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닌가. 뉘우침이 아니라 미화였다. 이 문제가 류영모가 추구해온 신앙의 본령을 뒤엎는 참담한 배교(背敎)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류영모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희망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것이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 월식과 같아, 잘못하였을 때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게 되고, 고쳤을 때는 다 우러른다고 하였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요."
1971년 류영모는 함석헌의 불미행(不美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된다. 이때는 몹시 노했다. "오늘 함석헌의 선생 노릇을 해야겠습니다. 한국의 간디라고, 씨알의 소리에 맞아야 될 이가 씨알의 소리를 해요. 씨알을 속이는데 하느님도 속이려나." 전병호가 나서서 말렸다. "함 선생이 그렇다면 그런대로 놔두시지 어찌하여 이토록 상심하고 분노하십니까?" 그러자 류영모는 말했다. "나와 그 사이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하고 모르는 체 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도 그럴 것입니다."
함석헌 강좌에 찾아가 꾸짖다
류영모는 함석헌에게 조용히 지내라고 권고한다. 함석헌은 스승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왕성하게 사회활동에 나선다.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를 위해 그가 할 일이 많아졌다. 1971년 세운상가 4층의 중앙신학대학에서 함석헌의 일요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류영모는 그곳을 찾아갔다. 스승을 보자 함석헌은 반색을 하면서, 수강생들에게 류영모를 소개했다.
"정주 오산학교 학생 때 저를 가르쳐주신 은사님이신 류영모 선생께서 방금 이곳에 오셨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많아 한 서울에 있으면서도 찾아뵙지 못했는데,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저의 잘못을 용서하시는 것으로 알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씨알의소리' 편집장으로 있던 문대골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영의 말을 했다. "이 자리에 선생님의 선생님께서 오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처럼 사진기를 갖지 못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함께 계신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서입니다. 선생님의 선생님께서도 한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원이란 사랑과 죄악이 뒤범벅이 된 것이라 믿습니다."
류영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구원은 사랑과 죄악이 뒤범벅이 된 것이라고 말한 이는 밖으로 썩 나가시오. 사랑과 죄악으로 뒤범벅이 된 것이 어찌 구원이 된단 말이오. 구원이란 탐진치의 삼독의 욕심에서 벗어나 진리로 자유하는 것이오. 그래서 예수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어요. 온갖 유혹으로 헤매지 않으려면 자각을 해야 합니다. 진리의 나를 깨달으려면 모든 욕심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하는 데 제일 힘든 것이 식색(食色)입니다. 색(色)이 강한 듯 하지만 사실은 더 강한 것이 식(食)입니다. 그런데 함(咸)은 육십이 지났는데도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70살의 제자 함석헌은 81살의 추상 같은 목소리에 사색이 되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흰 머리칼과 흰 수염이 한없이 무안한 표정이 되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겠는가. 류영모는, 제자를 용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식색의 짐승 삶을 살면서 고결한 뜻을 외치는 이율배반을 바로잡으러 온 것이었다. 함석헌으로서는 마음속 깊은 부끄러움과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부심 사이에서 충격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탈을 본질적으로 회개하지 않았고, 끝내 류영모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류영모는 '도부동 무거래(道不同 毋去來, 가는 길이 다르니, 오고 갈 것이 없다)'를 선언했다.
한 사람 봤구나 했더니 잘못 봤는가
그러나 일기에는 씌어 있었다. "우리 언니(함석헌)는 큰 그믐이 될수록 위로 틔울 줄은 모르고 밑으로 빠져들어감으로 보이니 나는 모르겠어요, 영결(永訣, 영원한 이별)인지도. 그가 헤맬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벗이여 갔는가. 오랜 벗이여 아주 갔는가. 다시 돌아올 길 없는가. 나는 허전하구나. 한 사람 봤구나 했더니 본 처음이 잘못이던가."
1989년 함석헌은 죽음을 앞두고 이런 글을 썼다.
"하느님은 시간이니 공간이니 무슨 이 따위 작용이 들어갈 데가 없는 초월한 절대의 자리지. 그런 것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말로 해줘야지. 그것을 직접 자세하게 말하기도 어렵지만, 말로는 표시가 안되는 것이니까. 그 자리를 체험해야 돼요. 큰 무슨 경계 같은 게 있나봐요. 내 안에도 영계(靈界)가 있어요. 아마 나는 이 정도에서 이러다가 죽을는지 모르겠소마는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모르는 게 아닌가,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것을 반성할 수 있어요."(1989년 씨알의소리 2월호)
1982년 2월 3일 류영모 1주기에 함석헌이 참석했다. 사람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잘못 되었으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잘못이 많으나 그래도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라 솔직히 말할 수 있습니다."
1988년 3월 13일 서울 혜화동에 있는 도산기념회관에서 열린 류영모 추모 모임에서 3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그는 눈물을 보이며 참회의 말을 다시 했다.
"무조건 잘못되었으니 용서하시길"
한때 함석헌의 제자였고, 류영모의 '마침보람'(졸업장)을 받은 제자가 된 박영호는 <씨알의 말씀>(다석 한시 16수를 풀이한 책)의 서문을 함석헌에게 부탁했다. 그 참회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한 배려였다.
함석헌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글도 읽어보고 서문도 쓰지요." 그러나 서문을 쓰지 못한 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다. 1989년 2월 4일 5시25분에 숨을 거뒀다. 3월 13일 생월생일이 같은 두 사람은, 하루 차이로 돌아간다(류영모는 2월 3일에 눈을 감았다). 박영호는 간결하지만 인상적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표현했다. "류영모도 함석헌도, 따지고 보면 모두 하느님의 작품이기도 하다." 류영모는, '얼'로는 예수도 나도 같은 하느님의 씨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