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미터 9초대'의 國格을 생각함
2020-11-03 18:04
정세균 국무총리는 축사를 통해 스포츠가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을 높이 평가하고, 체육인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도 축하 영상 메시지와 기념 조형물을 보내왔다. 100주년 사업으로 각종 전시회와 심포지엄 개최, 기념우표 발행, 체육인 인명사전 발간, 상징조형물 설치, 타임캡슐 제작 등도 진행 중이다.
한국은 스포츠사회학의 관점에서 스포츠의 순기능이 비교적 잘 작동된 나라 중의 하나다. 8‧15 광복 전에는 민족감정을 고양시킴으로써 민족국가 형성(nation-state building)에 도움을 줬고, 광복 이후에는 국민통합과 연대(Integration & solidarity)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국민 개개인의 건강을 증진시킴으로써 건강한 공동체(healthy community)를 유지하도록 했고, 각종 국제대회에서 발군의 성적을 거둬 국가위신(national prestige)을 높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는 계층이동의 사다리(ladder of hope)도 돼주었다.
스포츠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스포츠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중의 하나다. 맥락은 다르지만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하버드대)은 저서, <혼자서 볼링하기>(Bowling Alone 2000년)에서 “미국사회에 볼링 하는 사람들은 늘어나는데 볼링리그(대회)는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 사회가 갈수록 개인화, 파편화 되면서 사회적 연대(連帶)가 무너지고 있음을 볼링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다. 연대는 사회적 자본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함께할 때 공동체는 발전한다. 변화를 주도할 힘도 생긴다. 퍼트넘의 ‘볼링’을 ‘스포츠’로 바꿔보면 스포츠가 사회적 자본인 ‘연대’의 바로미터이자 수단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스포츠를 중우(衆愚)정치의 도구라는 3S(스크린 섹스 스포츠)의 하나로 보는 인식이 진부하지만 그런 예다. 우리도 권위주의 시절, 체제에 대한 반발로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일부 지식인들은 ‘국민 우중화(愚衆化)’를 우려해 탐탁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영신 연세대 교수는 스포츠가 때로는 ”내재된 정치적 상징성으로 인해 국민을 그가 속한 공동체와 동일시하게 만들고, 승리를 통해 우월성을 확인함으로써 인간의 지배 지향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조직과 규칙에 순응토록 함으로써 체제의 보수화(保守化)를 돕는다”고 지적한다. (<스포츠사회학 플러스> 2002년)
그럼에도 그동안 한국 스포츠가 일궈낸 성취에 대해선 누구라도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스포츠의 순기능들이 유기적으로 잘 결합됐고, 그 과정에서 지도자와 선수 개개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필자가 주니어 기자 시절 겪었던 일이다. 탁구 유망주 한 아이가 추석 때 고향집에 가지 않고 텅 빈 체육관에서 혼자 연습중이길래 코치에게 책망하듯 물었다. “명절인데 좀 쉬게 하지…” 코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습을 중단할 수 없고, 집에 가봤자 변변한 차례상 하나 못 차리는 식구들 얼굴 보기 미안해서 안 간다는 거였다. 나는 그때 그 선수의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라떼’ 타령하지 말라고? 글쎄다. 그런 선수들이 있었기에 우리 여자탁구가 한때 중국을 누르고 세계정상에 올랐었다.
대한민국이 올림픽에서 수확한 금메달이 모두 몇 개인 줄 아는가. 1976년 양정모가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딴 이래 총 121개(하계90, 동계 31)다. 은메달은 112개(하계 87, 동계 25), 동메달은 104개(하계 90, 동계 14개). 메달 개수(個數)가 올림픽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으로 인정받는 데는 이런 성적이 밑받침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대한체육회 창립 100주년> 2020년 이종세)
중국 일본도 9초대로
그럼에도 일부 폭력적인 지도자들, 선수선발의 공정성 시비, 은퇴 후 선수들의 진로와 생계문제 등은 여전히 우리 스포츠의 발목을 잡고 있다. 빛나는 성취의 뒤안길에 온존하는 이런 그늘까지도 걷어낼 수 있는 대한체육회가 되어야 한다. 이에 덧붙여 지극히 개인적일 수도 있는 부탁 하나만 하자. 한국체육 100년에 걸어보는 필자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제발 육상 남자 100m 기록 좀 단축시켜줄 수 없을까. 솔직히 좀 부끄럽다.
한국 최고기록은 2017년 김국영(29‧광주시청)이 세운 10초07이다. 우사인 볼트(34‧자메이카)의 세계기록 9초58은 물론 다른 아시아 선수들의 기록에도 한참 뒤진다. ICT(정보통신기술)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세계최고인 한국이 왜 100m 달리기에서만 뒤질까. 김국영 이전에는 고 서말구 선수(2015년 사망)의 10초34(1979년 멕시코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한국 최고기록이었다. 이 기록이 무려 31년 동안 깨지지 않고 있다가 2010년 김국영(당시 10초31)에 의해 경신됐다.
한국처럼 ‘빠른 나라’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 세대(30년)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까지 이룬 초고속 압축성장의 나라, 10대 스포츠 강국에, 매사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나라에서 10초34로 31년을 버티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타고난 신체적 한계 때문이라고? 그럼, 수영의 박태환 선수는 어떻게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나. 신체적 조건으로 치면 수영이 육상보다 동양인에게는 더 불리하다는 게 통설 아닌가.
아시아도 이미 9초대로 들어섰다. ‘아시아의 탄환’으로 불리는 중국의 쑤빙톈(蘇炳添)과 카타르의 페미 오구노데가 9초91로 나란히 아시아 최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 뒤를 일본의 사니 브라운 압델 하키무(9초97‧일본 최고기록)와 기류 요시히데(棟生祥秀‧9초98)가 쫓고 있다. 페미 오구노데는 나이지리아에서 귀화한 선수다. 사니 브라운도 가나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귀화했다. 기록단축에 순혈주의만 고집할 건 아닌 듯하다.
‘기본’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우리도 귀화선수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17‧안산 원곡고 2년)가 있다. 부모가 콩고인인 비웨사는 한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때 귀화했다. 100m 최고기록은 10초79로 스타트와 근력을 보완하면 장차 9초대 진입도 가능하다는 평가다. 비웨사뿐일까. 글로벌 시대, 늘어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스포츠 잠재력을 찾아내 대선수로 키워내는 것도 한국체육의 또 다른 백년 과제일 것이다. 참고로 쑤빙톈의 신장은 173㎝이고, 일본 육상 최초로 9초대 진입에 성공한 기류 요시히데는 175㎝다. 신장은 근력을 비롯한 여러 신체 조건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큰 게 낫지 않나 싶다. 김국영은 176㎝이지만 우사인 볼트는 195㎝다. 비웨사는 오래 전에 182㎝를 넘었고, 지금도 크는 중이라고 한다.
한국체육 100년의 과제로 ‘100m 9초대 진입’을 제안하는 것은 육상이 모든 스포츠의 기본이기 때문인 것은 맞다. 100m를 잘해야 중거리, 장거리도 잘하고, 축구, 농구, 배구, 야구도 잘 한다. 나는 거기에 더해 100m 달리기가 갖는 ‘기본’이라는 상징성에 주목하고 싶다. 뭐든 기본이 잘 갖춰져야 한다. 100m기록이 10초대인 한국 스포츠와 9초대인 한국 스포츠는 그 공고함이나 발전 가능성에서 큰 차이가 있을 터다. 100m를 9초대에 끊는 탄탄한 기본(기초) 위에서 우리 스포츠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바른 스포츠 선진화의 길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치, 경제, 문화에서 소소한 일상(日常)에 이르기까지 ‘기본’이 중요함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이는 ‘질서’라는 말 앞에 굳이 ‘기초’를 붙여 ‘기초질서’라고 쓰는 데서도 드러난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역대 정권의 공통된 대국민 슬로건이기도 했다. 압축성장 탓에 사회 전반이 “기초가 부실하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100m 9초대 진입이 한국 스포츠에서 기본(기초)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고, 그런 인식이 다시 전 사회로 확산돼 ‘기본이 튼튼한 나라’를 만드는 데 기폭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축을 박차고 나가는 스프린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