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파르헤지아] '이건희 초일류'가 한국을 일으킨 비밀

2020-10-27 10:18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 많은 것을 놓고 갔다. 다만 그는 '초일류(超一流)'라는 낱말 하나로 남았는지 모른다. 25일 별세한 이건희 회장을 보는, 남은 자의 시선이다. 

그는, '초일류'란 낱말 하나로 남았다

초일류. 이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사실 약간 우스꽝스런 말이었다. 1987년 이건희 회장이 취임할 당시 이 나라는, '일류병(一流病)'같은 걸 앓고 있었다. 일류라서 앓는 병이 아니라, 삼류, 사류를 살면서 일류의 냄새만이라도 풍기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전후(戰後) 세계적 '상거지'의 평균 가난에서 벗어나면서 우린 산업화의 맛을 알게 됐고 세상이 같은 세상이 아니라 '물'에 따라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됐다. 천국과 지옥 사이는 '물'들의 등급이 생겼다. 일류 물이 있고 삼류 사류 물이 있다. 하류에서 노는 물들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엿보게 된 일류들의 삶을 꿈꾸며, 오직 일류가 되는 걸 성공과 행복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다.

일류학교를 나와 일류회사에 들어가 일류 신랑신부감을 만나고 일류 의상을 걸치고 일류 아파트에 일류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일류 호텔에서 일류 음식을 먹는 장면들을 머리 속에 전국민이 핀업해 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게 소위 일류병이다.
 

[1993년 미국의 경제지 포춘과 인터뷰 하는 이건희 회장.[삼성제공,연합뉴스]]


일류병은 '고도성장 병'이었다

그때는 이 병이, 우리가 세계의 속도보다 더 빠른 변화 속에 있고, 치열한 경쟁심이 치솟는 시기에 있어서 생긴 병인 줄 몰랐다. 일종의 '고도성장 병'이었다. 남과 비교하고 남보다 더 잘되기를 무섭도록 강렬하게 원하는 에너지가 우리를 바꾸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병(病)이 우리의 힘인 줄 몰랐던 셈이다. 

'초일류'라는 말은, 모순이 숨은 말이다. 일류가 이미 가장 앞선 것인데, 그것을 능가하는 앞의 '물'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일류를 힘주어 강조하는 말로 '초일류'를 썼을 거라는 짐작도 있었다. 중대한 의식 전환을 불러 일으킨 말이라는 것을, 이 말이 나왔을 당시에 깨달은 이는 많지 않았다.

초일류는 일류를 넘어선 일류다.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는 그동안 남의 것을 베끼고 남의 제품을 분해해서 그대로 만들어 제품이라고 내놓는 '따라쟁이 수법'으로 산업화를 이뤄왔다. 그간 우리의 노력과 열정은 오직 미국과 일본같은 선진국이 해놓은 것을 빨리 베끼는 것을 상책으로 아는 노력과 열정이었다. 저것이 일류니까 일류 비슷하면 일류가 되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래선 평생 이류 삼류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했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따라하고 베끼는 방법은, 2등이 한계다. 

일류를 뛰어넘는 일류를 꿈꾸다

저 일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류를 뛰어넘어야만 진짜 일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요즘 흔한 표현으로 하면 '선도력(先導力)'이다. 선도력을 지니려면 잘 개발하고 잘 만들고 잘 다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하고, 고도의 집중력으로 인간의 한계를 치고나가야 하고, 그것을 밀어붙일 소신과 실패에 대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혁신은 여기에서 나온다.

일류병에 걸린 한국인의 경쟁심과 자존감에 주목했을 그는, '일류'의 개념을 재정립함으로써 초일류 에너지로 만들었다. 세계적인 일류가 되기 위해선 첨단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그 노하우와 브랜드를 자산화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 반도체 강국이었다. 우리 국민이 지닌 치밀한 손기술과 창의적 집중력이 이 초일류의 스퍼트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스마트폰이나 TV를 비롯한 다양한 가전의 명성 또한 거기서 나왔다.

한국의 제품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면서, 이 나라는 '못사는 낯선 국가'의 오명을 벗기 시작했다. 한국의 외교나 혹은 정치적인 역할과 결정들이,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게 결코 아니다. 오직 저 초일류의 철학이, 한 국가의 의식 전반을 훌쩍 뛰어넘어 가게 한 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초일류가 대한민국의 혈액 속에 흐르면서, 이 나라의 의식 수준과 이 나라의 생활방식과 이 나라의 비전과 철학이 그에 걸맞는 것으로 건너왔다고 할 수 있다.

나라를 바꾼 생각의 혁명

요컨대 초일류는 일개 기업의 '혁신 방식'이 아니었고, 이 나라를 삼류 사류의 미몽을 깨워 일류를 넘는 일류로 건너가게 하는 비밀이었다. 나라 전체의 생각하는 방식을 확 바꿔버린 '생각의 혁명'이었다. 그의 죽음은, 삼성의 오너 경영자 하나를 보낸 것이 아니다. '초일류'로 쏘아올린 대한민국의 가능성을 다시 증폭하여 또다른 초일류로 건너가는 강력한 꿈을 꾸는 것이 그의 삶에 응답하는 길이다. 그의 공과(功過)를 왈가왈부 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교착에 빠진 이 나라가 '한 사람이 일으킨 위대한 혁명'을 그와 함께 그냥 보내버리지 않는 일이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