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칼럼] 화해로 가는 길, 골령골에서
2020-10-26 09:11
대전의 낭월동, 많은 사람들이 산내 골령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에도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6·25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발생했던 대전형무소 정치범 학살사건의 현장으로, 현재는 여러 사람이 뜻을 모은 유해발굴사업이 한창이다. 사건 발생 후 반세기 이상 묻혀 있었던 유해들의 일부를 2007년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발굴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의 발굴은 역사의 꼬인 매듭을 풀고 비탄과 절망의 장소를 평화와 안식의 장소로 바꾸어가는 긴 과정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극과 야만의 연쇄
한적한 골짜기 곤룡골이 처참한 죽음의 장소 ‘골령골’로 바뀐 것은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3일 만이었다. 대전과 인근 농촌의 보도연맹원 약 1400명이 이곳으로 끌려와 사흘간 죽음을 당했다. 7월 4일부터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1800명이 이곳에서 적절한 절차 없이 처형당했는데, 최초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유명한 조선정판사 사건의 주범으로 간주된 이관술이었다고 한다. 희생자들 중에는 4·3사건이나 여순사건에서 체포된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곳은 단순한 비극의 현장이 아니라 전쟁의 정당성을 다투는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된 장소이기도 하다. 7월 13일, 당시 김태선 치안국장이 정치범 처형 사실을 밝히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와 시카고 데일리 뉴스 키이스 비치 특파원 등이 이를 보도했고, 소련의 타스통신이 이를 다시 보도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북한은 해방일보를 통하여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주한 미 대사관의 에드워드 중령은 이 사건의 경과를 생생하게 담은 사진과 함께 ‘정치범처형보고서’를 미 육군 정보부에 전송했고, 이 자료는 만들어진 지 49년이 지난 1999년에 재발견되어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길잡이가 되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북한 인민군들도 자신들의 선전과는 달리 9월 25일과 26일, 대전형무소에서 군경 포로와 우익인사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대전형무소 특경대에서 일했던 이준영은 수복 직후에 8명의 인력으로 471구의 시체를 수습하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는 귀중한 증언을 오래전에 했다. 당시 미군 전쟁범죄조사단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총 1557명이었다.
골령골에 묻혀 있는 유해들은 2007년 6·25전쟁 57주년을 맞이하여 진실화해위원회가 처음으로 발굴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여서 학살의 증거를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에서 유해 발굴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자 2014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발족했고, 2015년 2월, 짧은 기간 다시 발굴을 시도했지만 본격적인 발굴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희생자 유족회는 길이 35m의 봉분을 조성하여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명명했다. 다행히 2017년 이곳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들의 위령시설 조성지로 확정되었고, 작년 6월에는 윌링턴의 부인이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전을 방문하여 과거를 증언하기도 했다.
지난 6월, 6·25전쟁 70주년사업회는 국군유해 봉환 행사를 의미있게 치렀다. 그러나 민간인 유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다. 우리가 희망하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에는 모든 전쟁 희생자 가족들이 실감할 수 있는 화해 프로젝트가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민간인 희생자 유해뿐 아니라 북녘 땅에 흩어져 있는 국군 유해나 장진호 주변의 미군 유해 발굴이 중요하다. 일각에서는 이를 화천 파로호의 중국군 유해 발굴과 연계하여 추진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최근의 미·중관계를 보면, 화해로 나아가는 길은 아직 아득하고 멀게 느껴지지만, 전쟁의 희생자들을 가족이나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인간의 도리에 속한다. 인도주의적 희망은 언제나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