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성동일·김희원 '담보', 아는 맛이 주는 안정감
2020-09-28 00:18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정말이지 바쁜 한 주였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개봉을 미뤘던 영화들이 추석 연휴에 맞춰 개봉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상황을 예측할 수 없어 매일 개봉 일정과 취재 일정이 변경돼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영화사들은 추석 연휴 전 모든 행사를 마무리하고 추석 연휴 동안 본격적으로 홍보를 진행하려 한 주에 행사 일정을 집중시켰다. 영화 '디바' '검객'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담보' '국제수사' 등 정신없이 취재 일정이 흘러갔다.
하지만 예년과 달리 올해 추석 영화에 대한 호기심은 덜했다. 코로나19로 몇 차례나 개봉 일정을 변경한 터라 이미 예고편이며 보도자료 등을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본 영화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영화 '담보'(감독 강대규)를 보고 싶었던 건 추석 연휴를 앞두고 조금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있지 않나. '아는 맛'을 먹고 싶은 날이. 취향과 별개로 뻔한 이야기의 영화를 보고 싶었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위트 있으며 꽉 막힌 해피엔딩으로 안도감을 주는 영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JK필름이 제작한 '가족 영화'는 믿음직한 구석이 있었다. '국제시장' '히말라야' '공조' '그것만이 내 세상' 등을 통해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왔기 때문이다. '신파' '클리셰 투성'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 관객의 공감을 얻으며 흥행에 성공해왔다. JK필름의 감성이 보편적이고 많은 이들을 공감하도록 만들었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한 우물'만 파고 있으니. 이 장르에서는 JK필름을 따를 이가 없었다.
영화 '담보'는 1993년 인천을 배경으로 한다. 두석(성동일 분)은 군대에서 만난 후배 종배(김희원 분)와 함께 대부업을 하고 있다. 거칠고 까칠한 성격이지만 인정이 많아 떼인 돈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다. 사장의 눈총을 받던 두 사람은 독한 마음을 먹고 조선족인 명자(김윤진 분)를 찾아간다.
명자는 딸 승이(박소이 분)와 함께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다. 불법 체류자인 탓에 제대로 된 일거리도 구할 수 없고 급여를 떼이기도 한다. 두석과 종배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해도 명자는 그저 시간을 달라며 사정할 뿐이다. 두석과 종배도 사정이 어렵긴 마찬가지. 돈을 마련할 때까지 아이를 담보로 맡겠다며 승이를 안고 떠나버린다.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했지만 두석과 종배는 떼인 못을 받지 못했다. 누군가 명자를 신고해 강제 추방을 당하게 되어서다. 마음이 급해진 명자는 두석에게 "아이가 입양될 때까지 함께 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음 약한 두석과 종배는 입양 전까지 승이를 돌보게 되고 세 사람은 부쩍 가까워진다. 승이가 입양을 가던 날 두석은 큰아버지라는 남자를 보며 찜찜해 한다. 좋은 곳으로 입양 간다는 말이 어딘지 미심쩍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던 두석은 승이를 떠나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두석은 승이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부잣집으로 이사 갔던 아이는 알고 보니 룸살롱으로 팔려가 잡일을 도맡고 있었다. 두석은 분노하며 승이를 데려오고 자신의 호적에까지 올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유사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 '가족의 탄생'이나 '어느 가족'처럼 피가 섞이지 않아도 유대 관계를 형성하며 가족이 되는 이야기는 여느 가족 영화만큼이나 뭉클하다. 영화 '담보' 역시 유사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업을 하며 거칠고 까칠하게 살았던 두 남자가 어린아이를 키우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따뜻하고 유쾌하게 그려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필자의 짐작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 예상대로 영화 '담보'는 JK필름 고유의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었다. '가족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이 영화는 안정적인 분위기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잊을 만 하면 등장하는 클리셰는 오히려 필자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JK필름 표 클리셰들은 알면서도 뭉클해지는 데가 있어서 영화 중후반에 이를 때 울컥 감정이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가 떨어졌다. 관객들을 자극하기 위해 클리셰를 반복하고 '떡밥 회수'를 위해 강박적으로 복선을 깔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쿠키 장면인 결혼식 신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까지 남았다. 엔딩 장면을 보고 뭉클해졌던 게 머쓱해질 정도다.
예상을 벗어난 점은 캐릭터들이었다. 앞서 영화 '하모니'를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리고 이들을 어우러지게 했던 강대규 감독은 영화 '담보' 속 대다수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소모해버렸다. 두석과 승이를 제외하고는 인물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면적이었다. 룸살롱 마담이나 승이의 큰아버지, 명자 어머니 등이 명확하게 흑과 백으로 나뉘었고 기능적으로 쓰였다. '클리셰'와는 다른 문제였다. 이런 캐릭터들을 배우 나문희, 김재화 등 베테랑 배우들이 맡았다는 게 마음에 걸릴 정도였다. 주연인 종배도 마찬가지. 안정감을 위한 구색 맞추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두석과 종배 그리고 승이가 유대감을 가지고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천천히 쌓아나가길 바랐다. 인물의 내면이나 변화 등을 차근차근 보여준다면 영화 말미 더욱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을 거였다. 하지만 '담보'로 데려온 아이가 '보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많은 부분 생략됐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인물들이 가족이 되기까지 큰 고민이나 갈등도 벌어지지 않았다. 관객들이 두석 가족과 유대감을 쌓을 만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상영관을 나선 뒤에도 오래도록 떠올랐던 건 아역배우 박소이였다. 올해 유일하게 4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황정민의 딸 역을 맡았던 박소이는 '담보'를 통해 전작과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울고, 웃고,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운 그는 '담보'의 아쉬운 점들을 상쇄하곤 했다. 배우 성동일, 김희원, 박소이의 케미스트리는 동화 같은 사랑스러움을 가지고 있어 극장을 떠나는 길이 씁쓸하지만은 않았다. 29일 개봉. 러닝타임은 113분이며 관람등급은 12세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