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 아방강역고-2]‘고려시대, 만주는 우리 땅’ 스모킹건 50선

2020-09-05 07:00
고려의 동북경계는 고구려를 넘어섰다
고려 초부터 말년까지 공험 이남과 삼척 이북은 동계라 일컬어...
금(金)황실 조상 대대로 고려를 ‘부모지국’으로 삼아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중국 대표 포털사이트 바이두에는 오래 전부터 고려시대 동북부 경계선을 만주 중부지방으로 표기해놓고 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고려 이후 현재까지 고유 영토관은 한반도로 축소된 까닭은 무엇일까?

허구한 날 우리들이 아득한 '고구려 발해적 만주는 우리땅'이나 '중국 동북공정' 운운이나 하는 걸로 장한 체하게 만든 원흉은 누구일까.

위와 같이 한·중 양국의 대표 사서를 근거로 작성한(그것도 고려 영역을 최소화 한 것) 지도를 봐도 상당수가 믿지 못하고 ‘환단고기’ 류의 사이비 민족주의자로 폄하하는 까닭은 뭘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다음 '고려시대 만주는 고려땅’ 스모킹건 50선(한국 사료 30선, 중국 사료 20선)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측 사료는 『고려사』, 『고려사 절요』, 「조선왕조실록」과 정약용의 『여유당전서』30선 만으로 중국 측 사료는 『사고전서』에서만 20선만으로 「환단고기」류 등 위서 논란이 많은 유사 사료는 물론 사료 가치가 있다고 공인된 여타 주요 문헌들을 모두 배제하더라도 ‘만주는 고려 땅’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매우 많았다. 그 중 50개를 엄선하는 것도 꽤나 힘들었다. 

(좌)중국 포털 바이두는 한중 주요 사료를 근거로 고려의 동북부 경계를 헤이룽장성 남부지역으로 표기한 도편을 게시하고 있다. (우)한국 기존 학계 교과서상의 고려 판[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1. 고려의 동북경계는 고구려를 넘어섰다.

“고려의 사방 경계는, 서북은 당 이래로 압록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
- 고려사 제56권 지志 10권 지리 1

2. 고려 초부터 말년까지 공험 이남과 삼척 이북은 동계라 일컬었다.

"동계(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이다. 성종 14년(995년)에 영토를 나눠 10도(道)로 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군현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했다. 정종 2년(1036년)에 동계라 불렀고, 문종 원년(1047년)에 동북면이라 불렀다. 뒤에 함주(咸州) 이북지역은 동여진(東女眞)에 편입됐다. 예종 2년(1107년)에 평장사 윤관(尹瓘)이 원수가 돼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을 뒀으며, 공험진(公嶮鎭)의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중략)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
- <고려사> 제58권 지 12권 지리 3

3. 함주대도독부· 북청주부· 갑주부는 동만주, 연해주였다.

1)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이다. 예종 2년(1107년)에 원수(元帥) 윤관 등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쳐서 내쫓았다. 〈예종〉3년(1108년)에 주를 설치해 대도독부로 삼았고, 진동군(鎭東軍)이라 불렀다. (중략)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州)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鎭)이 9성이다. 
2) 북청주부(北靑州府)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9성 때에 명칭은 상세히 알 수 없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돼 삼산(三散)이라 불렀다. 공민왕 5년(1356)에 옛 영토를 수복하여 안북천호방어소를 설치했다.
3) 갑주부(甲州府)는 본래 허천부(虛川府)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기거하던 곳으로 자주 전란을 겪어 사람이 살지 않았다. 공양왕 3년(1391)에 비로소 갑주라 부르면서 만호부를 설치하였다. 봉천대(奉天臺)에 있다.
- <고려사> 제58권 지12권 지리3 동계

기존의 고려판도 동계 안변도호부(등주)이북에는 1)함주대도독부 2)북청주부 3) 갑주부 설치가 설치돼 있다. 특히 공험진을 비롯한 함주대도독부의 9성은 흑룡강성 중부 이하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등 연해주를 포괄하는 지역에 설치됐다. 이에 대한 고증은 다음편에 하기로 한다

4. 금(金)황실 조상 대대로 고려를 ‘부모지국’으로 삼았다
 

금태조 황실 3대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父母之國)로 삼았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동여진 사신들이 9성을 돌려주길 청하다.
“옛날 우리 태사(太師)인 영가(盈歌)(금태조 아골타의 조부)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조상도 대국[大邦, 고려]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오아속(烏雅束, 금태조의 본명)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父母之國)’로 삼고 있습니다. (중략 )만약 9성을 되돌려줘서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우리는 하늘에 맹세하여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잘 타이르고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고려사> 세가 제13권 1109년 예종4년 6월 27일(음)

5. 금(金)태조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

"금(金)의 임금 아골타(阿骨打)가 아지(阿只) 등 5인을 통해 서한을 보내 이르기를, 우리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쪽 지방에 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大國)이라고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父母之邦)’라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섬겨왔습니다."
- 고려사 세가 제14권 예종 12년 1117년 3월 25일(음)
 

금태조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6.고려의 북쪽 경계는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록에 닿았으며,..."
- <고려사> 1198년(예종2년)1월 18일.

고려의 북쪽 경계 용천(龍泉)은 단 한 군데,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로 지금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宁安)시 보하이(渤海)진 송화강 유역 뿐이다. 두만강 이남 함경도 지역에는 용천이라는 지명은 없다.


 

고려의 북쪽 경계는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고려사> 1198년(예종2년)1월 18일.[자료=강효백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