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가 없어요"…말라가는 여성영화, 하반기는 변할까?

2020-08-27 00:00
하반기, 여성 주연 영화들 줄지어 개봉
한국영화계 문제점으로 지적 받던 '여성 캐릭터' 가뭄, 조금씩 변화 중

(왼쪽부터) 하반기 만나게 될 배우 나문희, 신민아, 김태리[사진=영화 '오! 문희' '디바' '승리호' 스틸컷]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많지 않아요. 시나리오도 잘 들어오지 않고요."

배우 엄정화가 영화 '오케이 마담'(감독 이철하) 인터뷰 도중 털어놓은 이야기다. 연기력, 경력 등 무엇 빠지는 게 없는 베테랑 배우지만 마땅한 시나리오가 없어 5년이나 강제로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정이었다.

이는 꾸준히 지적받던 한국영화계 문제점이다. 남성들이 떼로 등장하는 범죄 영화나 스릴러 무비가 인기를 끌며 여성 캐릭터는 분량이 줄고 평면화되며 남성의 각성을 위해 희생되는 등 기능적인 역할로만 활용됐다.

최근 '젠더 이슈'가 수면 위에 오르며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간 만나온 여성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 문제점을 인지하고 영화계도 바뀌기 시작했다. 영화 '마녀' '악녀' 등 여성 주연 액션영화나 '82년생 김지영' '야구소녀' 등 여성이 처한 상황, 그의 내면 등을 면밀히 그린 작품이 등장했고 여성 감독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감독조합은 한국영화계 문제점을 인지하고 양성평등 주간을 맞아 '벡델2020' 등 행사를 개최하며 적극적으로 영화계 변화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올 하반기에는 다양한 장르, 연령대, 캐릭터를 가진 여성 주연 영화들이 라인업에 올랐다.

9월 개봉을 앞둔 영화 '오! 문희'(감독 정세교)는 뺑소니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인 어머니(나문희 분)와 보험 회사 에이스인 아들 두원(이희준 분)이 범인을 잡기 위해 수사극이다.

장년 여성을 범죄 수사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배우 나문희가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액션 연기를 선보인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달리기부터 나무 오르기, 트랙터 운전까지 직접 해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영화 '디바'(감독 조슬예)도 9월 개봉을 기다린다. 다이빙계의 퀸 이영(신민아 분)이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잠재되었던 욕망과 광기가 깨어나는 모습을 담았다. 이영이 사고를 당한 뒤 그의 애틋한 동료였던 수진(이유영 분)이 실종되고 이후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며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욕망과 광기에 휩싸이는 모습을 섬세하고 집요하게 포착한다.

국내 최초로 다이빙을 소재로 했으며 스릴러와 접목해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지난 2011년 개봉한 영화 '블랙스완'과 비견되는 촘촘하고 섬세한 인물의 내면 묘사가 기대되는 부분. 더 높은 곳에서 추락할수록 최고에 도달하는 다이빙이라는 스포츠의 아이러니함을 1등의 자리에서 추락하는 이영을 통해 보여준다고. 특히 6년 만에 스크린 복귀하는 신민아에 대한 궁금증도 커진다.

국내 최초 우주 SF 영화 '승리호'(감독 조성희)는 앞선 영화들과 달리 남성 배우 비율이 더 높지만 배우 김태리의 낯선 비주얼과 캐릭터가 기대를 높이는 작품이다.

김태리는 영화 '승리호'에서 팀을 이끌어가는 브레인이자 전략가 장 선장을 연기한다. 스타일리쉬하게 넘긴 포마드 헤어, 선글라스, 레이저 건을 겨누는 모습은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레퍼런스를 제시한다.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만 따듯한 속내를 가진 성격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성 캐릭터와 접목했을 땐 신선한 재미를 준다.

이러한 신선함이 있었기에 김태리도 '승리호' 출연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그는 "장 선장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 여성 최초로 선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한국 최초 우주 영화의 일부로서 맡아보고 싶은 캐릭터"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올해 극장서 만난 배우 이주영, 엄정화, 이정현, 예수정[사진=영화 '야구소녀' '오케이 마담' '반도' '69세' 스틸컷]


코로나19로 극장가가 침체했다. 올해 여름 성수기 중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건 영화 '오케이 마담'이 전부였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발전이 있었다. 6월 개봉한 영화 '야구소녀' 이주영은 편견을 깨나가는 여성 캐릭터를 보여줬고, '반도' 이정현은 극 중 인물 중 가장 강인한 캐릭터로 격렬한 액션을 소화했다. '오케이 마담' 엄정화는 극을 이끄는 중심 캐릭터를, '69세' 예수정은 그간 한국영화에서 다루지 않은 장년 여성의 서사와 그가 맞닥뜨리는 편견과 부당함을 몸소 표현했다.

물론 남성 주연 영화, 그들이 떼로 등장하는 장르물에 비하면 초라한 숫자다. 그러나 꾸준히 다양한 여성 서사가 등장하고, 캐릭터들도 변화하고 있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예정대로 하반기 영화 '오! 문희' '디바' '승리호'가 개봉해 코로나19 위기를 이겨낼 수 있기를. 또 여성 영화가 더 활력을 찾을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