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19) 베트남 독립운동의 선봉, 5합의 까오다이교
2020-08-18 15:04
베트남에서 자생한 세계 유일의 종교가 있다. 남부 베트남의 캄보디아 접경지역의 떠이닌성에 본당을 둔 까오다이교다. “까오다이”라는 말은 노자의 도덕경에 “상도고대(上禱高台)” 즉, 까오다이에 기도한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신도는 현재 4-6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신도 수로 보면 베트남에서 3대 종교에 속한다. 까오다이교의 교리는 옛 부터 동양에서 행해진 종교의 가르침을 택한 것으로, 기존 종교의 가르침 중에서 진리로 인정되는 근본 가르침을 추출하여 통합한 것이다. “까오다이” 본질의 첫째는, 대도삼기보도(大道三期普度)이다. 둘째는, 지고지성의 신으로 본존인 까오다이 혹은 옥황상제이다. 셋째는, 지상신의 상징인 천안(天眼)이다. 대도삼기보도는 제3의 중생제도를 의미한다. 까오다이는 인류사회에 대하여 이미 두 번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한다. 첫 번째는 서양에서 모세요, 동양에서는 석가모니였다. 두 번째는 서양에서 그리스도요, 동양에서는 노자의 모습을 빌려 세상에 출현하였다. 이제는 제3의 제도로서 까오다이가 친히 새로운 종교의 창립자로 출현하여, 스스로 까오다이라 이름을 밝히고 새로운 대도를 “까오다이교”라 칭하였다는 것이다.
◼ 까오다이 교단 설립과 성장
까오다이교는 1926년에 프랑스 식민정청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았다. 허가 받기전인 1921년부터 프랑스 식민정청 직원인 응오반찌에우(吳文昭)가 이미 천안(天眼)을 표상으로 삼고 까오다이교를 존숭하고 있었다. 까오다이 교단의 창립 초기의 신자 수는 12명으로, 주로 사이곤의 프랑스인 농장과 프랑스 식민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 직원들이었다. 그러나 교세가 번성해 나가자, 응오반찌에우는 두려움이 앞서 식민정청의 복무규율을 빌미로 교단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에, 인도차이나 연방총독부 평의원이었던 명망가 레반쭝(黎文忠)이 교단 수립의 지도자가 되었다. 교단 설립 후 신도가 나날이 증가하였는데, 특히 서민층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는 세계적인 경제공황과 식민 지배국의 착취로 의지할 곳 없는 서민들의 지친 삶이 정신적인 피난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1926년 10월 7일, 28명이 서명하여 코친차이나(남부베트남) 지역 식민장관 앞으로 신청서를 제출하여 교단설립을 인가받았다. 교단설립 후 2개월 동안에 신도가 2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성공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신봉하고 있는 기존의 종교와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민간신앙을 핵심으로 한 것이 큰 몫을 하였다. 1926년 11월 18-20일의 3일간 떠이닌에 있는 자림사(玆林寺)에서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인도차이나 총독, 코친차이나 식민장관, 기타 프랑스인 및 토착민 고위 관리들이 대거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이후 현재의 본당이 된 떠이닌성, 롱타인에 100헥타르의 토지를 매입하였고, 1927년 3월에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자의 수는 급증하여 1930년에 이미 약 5십만 명에 달하였다.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투시하는 천안(天眼)
약 3백만㎡ 규모의 대지에는 장엄한 탑, 사원과 교단 운영에 필요한 모든 설비를 구비하였다. 경내에 솟은 대사원은 천주교 성당의 양식을 동양화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1939년부터 신자들의 헌금과 노력봉사로 건설에 착수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자재가 부족하였고, 프랑스 당국의 방해로 사원의 절반이 건설되었을 때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사방의 벽면과 천정에는 “까오다이”, 즉 옥황상제의 표상인 “천안(天眼)”이 그려져 있다. “천안”은 구름 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을 형상화한 것이다. “천안”이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내려다보고 있으니 신율을 어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까오다이교 표상인 “천안”이 제단의 정면, 본당 유리창마다 그려져 있다. “천안”은 사람의 깊은 내면을 투시하고, 영혼을 선도한다고 믿는다. 본당의 태극등 앞에는 4층의 단이 있고, 최상단에는 석가(釋迦), 제2단 전면에는 신의 측근자 중의 제1인자로 숭배하는 이태백, 그 우측에는 노자, 그 좌측에는 공자가 모셔져 있다. 제3단의 정면에는 그리스도가, 그 우측에는 관음보살, 좌측에는 중국의 무신(武神)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 있다. 제4단에는 도교의 신 강태공(姜太公)이 서있다.
◼ 하루 4번 제식(祭式) : 우측은 남성, 좌측은 여성의 자리
제식을 올릴 때는 공물로 꽃, 술, 차를 바치고, 5개의 선향(線香)을 피운다. 이것은 신자가 입문할 때 밟을 단계인 오향(五鄕)을 의미하는데, 오향이란 첫째, 순결을 의미하는 계향(戒 鄕), 둘째, 심사성찰(深思省察)을 이르는 정향(定鄕), 셋째, 예지(叡智)를 지시하는 혜향(慧 鄕), 넷째, 영감을 지시하는 지견향(智見鄕), 다섯째, 오(悟)의 뜻인 해탈향(解脫鄕)을 의미한 다. 제단은 성당 또는 신자의 자택에 설치하고, 일 년 내내 아침 6시, 정오, 저녁 6시, 한 밤중을 정해 하루에 4번을 제단에 향을 피우고 나서 이마를 대고 독경을 한다. 본당에서는 제단을 향하여 우측의 관성제군(關聖帝君) 정면으로 남성이 꿇어앉으며, 좌측의 관음보살의 앞에는 여성이 앉는다. 여성은 모두 가톨릭 신자처럼 머리에 백포를 쓰고 제식을 올린다.
◼ 삼강오륜과 악습타파의 계율(戒律)
까오다이교는 “오계금(五戒禁)”, “오상(五常)”, “사대조규(四大調規)” 및 “삼강(三綱)”을 계율로 삼고 있다. 여성 교도들은 그 위에 “삼종(三從)”의 도를 지켜야 한다. “삼강”은 군신・부자・부부에 대한 규율이다. 유교의 근본 도리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오상(五常) 또한 인륜의 상도로, 부자의 친(親), 군신의 의(義), 부부의 별(別), 장유의 서(序), 붕우의 신(信)의 도를 가르치고 있다. 삼종은 부녀가 갖추어야 할 도리이다. 즉, 가정에서는 아버지에 순종하고, 출가해서는 지아비에 순종하고, 지아비가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를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오계금(五戒禁)은 불교의 오계에 해당한다. ①살생을 계하는 것으로 모든 생물은 살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생성력을 저지하는 것은 신의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②투도계(偸盜戒)는 강탈, 약취, 기망, 반환의 의지가 없이 빚을 얻는 것, 장물의 고의적인 매매, 유실물의 은닉, 타인의 착오를 이용하여 재물을 취득하는 것, 도박에 열중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인간의 비극은 이러한 행위로부터 시작되어 가정을 어렵게 하고,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니 경계하라는 것이다. ③사음계(邪婬戒)는 타인의 처나 미모의 부녀에 혹하여 음란패설하고 음행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④음식계(飮食戒)는 음식의 호사를 경계하고, 음주는 개인의 이성뿐 아니라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과도함을 금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음주계와 동일하며, 회교 또는 기독교에서와 같이 술을 금하는 것과는 다르다. 다만 어지럽게까지 마시는 것은 피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⑤망어계(妄語戒)는 기망(欺妄), 위만(僞瞞), 과부(誇負), 중상(中傷) 등을 경계하는 것이다. 사대조규(四大調規)는 4개의 도덕률로 덕을 쌓고 행하는 것으로써, 유순(柔順), 굉량(宏量), 예절, 청렴, 멸사(滅私) 등의 사회도덕의 규준을 강조하고 있다. 이외에 신자의 혼인에 관한 규정, 세례(洗禮), 취학의 의무, 상부상조와 공동묘지의 설치, 장송에 관한 규율, 공물의 선정, 복장규정, 교구민 중에 이재민이 발생한 경우의 부조에 대한 규준, 신앙 및 신율에 배반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것과 반종교적인 인쇄물의 출판 금지, 비단 옷 착용을 자제할 것, 교단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자는 연성평의회의 결의에 의해 파문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특히, 상호부조를 강조하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박애, 평등의 정신을 실천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장례복장, 묘지 등의 규정에는 베트남 고유의 습관을 존중하면서도 형식적인 폐단을 없애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묘를 쓰는 번거로움을 타파하고 있다.
◼유, 불, 선, 그리스도교, 민간정령의 5합(五合) 종교
까오다이교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에는 석가, 그리스도, 공자 등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인류를 구하였으나, 지금은 동서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시대의 대도인 5분파를 창립하였다고 한다. 첫째 인도(仁道) 즉, 유교이다. 둘째, 신도(神道) 즉, 강태공의 가르침으로 정령 신앙이다. 셋째, 성도(聖道) 즉, 그리스도교이다. 넷째, 선도(仙道) 즉, 도교이다. 다섯째, 불교이다. 까오다이교는 5종류의 신앙을 통합해 인류 전체의 조화와 공존을 실현하고자 한다. 모든 종교의 존재 그 자체가 인류를 분열시켰고, 종교를 널리 펴는 역할을 맡은 자들이 타락하여 세인의 눈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까오다이가 친히 나타나 대도를 지도할 결의를 공고히 하였다는 것이다. 까오다이교는 베트남인의 민간신앙에 뿌리를 가지고 성장하여, 식민지 주민의 암울함을 걷어내고 삶에 희망을 주고자하였다. 베트남인 삶에는 정령 숭배가 널리 퍼져 있고, 유, 불, 선의 3교가 그 위에 가지를 뻗고 있다. 그리고 식민 지배 세력인 프랑스 사람들이 신봉하는 천주교의 교리와 의식을 적당히 혼합하여 새로운 교리를 구성한 것이 까오다이교이다. 이는 민중에 침투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지배세력에 대한 방어막을 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 까오다이교의 독립운동
정치적인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유지해온 까오다이교에 대하여, 프랑스 식민당국은 1940년 8월 23일 각지의 포교소를 일제히 수색하고 모든 인쇄물을 압수하였다. 이는 태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인 캄보디아에서 국경분쟁이 발발하고, 세계 제2차 대전으로 프랑스의 위치가 흔들리자 독립단체들이 반 프랑스 운동을 일으켰고, 그 중심에 까오다이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압수수색을 당하고 박해를 받자, 1940년 11월 22일 밤부터 사이곤에 있는 신도들이 총검으로 무장하고 프랑스 경비병 주둔지를 습격하였다. 소요사태는 점차 사이곤 인근지방으로 확산되어, 프랑스 사람, 식민정청 관리, 경찰들을 납치하고, 명망가 저택과 공공건물에 방화를 하였다. 남부 베트남에서의 반 프랑스 폭동은 떠이닌성에 있는 까오다이교도 약 40만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이었다. 프랑스 식민정청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간주하고, 보도를 통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12월 27일, 28일까지 이어진 진압작전으로 폭동의 중심지구인 떠이닌성과 사이곤, 미토, 껀터 인근의 촌락들이 프랑스 군의 폭격으로 소실되었고, 기관총을 발사하여 남녀노소 약 6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까오다이교는 민족주의 색채가 깊은 교단이었기에 타 민족의 압제에 침묵할 수 없었고, 압제에 항거하였기에 박해를 면할 수 없었다.
까오다이교 교리에는 민간정령 신앙도 포함되어 주술적인 것도 있으나, 유, 불, 선의 3교와 함께 그리스도교와 민간정령 신앙을 받드는 오합(五合)의 종교로써 가장 베트남적인 종교이며, 베트남에서만 확장 가능성이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떠나 일치단결하여 외세를 배격하는 정신이 바로 베트남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