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지금·여기·당신] 8·15와 표준시…'경도'에도 주권
2020-08-14 17:08
15일 전남 순천에서 경도 주권 조형물 제막
대한민국 경도 기준을 도쿄에서 순천으로 바꾸자는 움직임
대한민국 경도 기준을 도쿄에서 순천으로 바꾸자는 움직임
어릴 때 지리 과목에서 배운 위도(緯度), 경도(經度)를 기억하는지. 지구를 가로로 나누는 위도, 세로로 나누는 경도가 헷갈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한반도 남북을 가르는 38선이 위도 38도를 따라 그은 선이라는 걸 떠올린다.
위도의 0도는 적도, 경도의 0도는 본초자오선으로 불린다. 태양 궤도(적도)를 따라 어렵지 않게 계산돼 나오는 위도에 비해, 경도는 지구 자전과 세계 표준시간 설정 등 국제정치적 문제로 정확한 측정과 기준을 잡기가 어려웠고 오래 걸렸다.
16~17세기 해양시대를 거쳐 1800년대까지 유럽 열강 간 다툼으로 세계의 ‘세로 기준선’이자 국제시간 측정 기준선은 정해지지 못했다. 각종 국제회의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런던과 파리를 내세우며 끝까지 경합했다. 1884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자오선회의에서 경도 0은 런던 그리니치천문대를 지나는 선으로 정해졌다. 그리니치 동쪽은 동경, 서쪽은 서경이다. 이 후 100년 만인 1984년 국제지구 자전회전관리국(IERS)이 그리니치 천문대 터 동쪽으로 102.5m 지점으로 다시 재설정했다.
경도는 둥근 공처럼 지구를 한 바퀴 다 돌면 360도다. 국제시간, 해외시차를 계산할 때 15도가 1시간이다. 15 X 4=360. 1도는 4분이다. 영국 기준시에 9시간을 더하면 한국 시간이다. 즉 런던이 밤 12시 자정이면 경도 135도 기준 한국은 오전 9시다(여름에는 런던 등 유럽 대도시는 서머타임 적용, 1시간 빠른 8시간). 경도가 중요한 이유는 정해질 때와 마찬가지로 시차 문제도 있지만 나라가 세로로 길 경우 인접국 간 알력, 국제정치 이슈가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영토인 한반도과 그 부속 섬을 놓고 동서 양끝을 보면 경도의 중간, 표준시 기준선이 나온다. 가장 서쪽 최서단은 평안남도 신도군이 동경 124.16도, 최동단인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의 독도가 동경 131.87도다. 그래서 한반도 전체의 동서 양끝 경도 차이는 131.87-124.16=7.71도다. 1도가 4분이니까 30.84분의 시차다. 이 수치로 볼 때 우리 경도 기준은 동경 127.5다. 하지만 국제시간 기준선으로 보면 135도, 일본 도쿄를 기준으로 하는 됴쿄시(時)다.
전남 순천에는 지난해 ‘경도 주권 찾기 시민운동본부’가 만들어졌다. 도쿄 135도가 아닌 경도 127.5도 선에 위치한 순천만 국가정원을 기준으로, 우리 표준시를 ‘순천시(時)’로 바꾸자는 거다.
이 단체가 이런 주장을 하는 데는 역사적 맥락과 명분이 있다. 조선 말 우리의 경도 표준선은 청나라 수도인 베이징을 기준으로 한 동경 120도였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국가 결정이 아니었다.
일제 강제 합병 전인 대한제국 시절, 1908년 4월 1일 고종은 영국 런던 시간에 8시간 30분을 더하는(UTC+ 08:30) 127.5도를 기준 표준시로 정한다고 만방에 공포했다. 우리 역사 상 처음으로 국제 표준시를 사용하기 시작한 거다. 그러나 일제 강제 합병 후 1912년 1월 1일 조선총독부는 일방적으로 표준시를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하는 일본 표준시(UTC+ 09:00)로 바꿔 버렸다.
굴곡 많았던 대한민국 표준시 변경사(史)의 시작인 셈이다.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승만 정부는 국가적 자존심 차원에서 표준시를 다시 원상회복했다. 1954년 3월 21일 한국 전쟁 정전 후 첫 춘분을 맞아 표준시를 다시 UTC+ 08:30으로 재변경한 것. 대한민국 국제시간 기준 경도가 일본과 같은 수 없다며 '경도 주권'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불과 3개월 후 8월 10일 국가재건회의 결정을 통해 표준시를 도쿄시로 재재변경했다.
이후 지금까지 계속 도쿄시를 기준으로 해온 남한과 달리 북한은 다소 달랐다.
북한은 한국 전쟁 이후에도 변함없이 계속 도쿄시를 사용해오다 2015년 8월 1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격적으로 UTC+ 08:30으로 표준시를 변경했다. "간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범죄로 빼앗은 표준시를 되찾아 평양시로 명한다"라며.
그러다가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평양 표준시’를 ‘서울 표준시’에 맞추겠다고 했고, 곧바로 5월 5일부터 다시 도쿄시로 바꿨다.
앞서 2000년대 들어 우리 국회도 생체리듬과 경도 주권 등을 내세우며 표준시 변경을 시도했다. 2000년 8월, 2008년 7월, 2013년 11월 21일 세 차례 한국 표준시를 127.5도로 변경하는 내용의 ‘표준시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다 유야무야됐다.
이 조형물이 '경도 주권'을 다시 논의하는 공론의 장을 펼치고, 실제로 대한민국 표준시를 바꾸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75회 광복절, '경도 주권'이란 말을 다시 불러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