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갑질의 경계는 을이 정한다
2020-08-14 11:59
"사실이 아닙니다. …(중략)… 저희가 제안요청서에 포함되지도 않은 요구사항을 구현해달라고 해가지고 업체에서 최종계약을 포기했다, 이건 아니거든요. 그렇게 되면 갑질이죠, 갑질. 그런 바 없습니다. 꼭 수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올해부터 순차 추진되는 어떤 공공정보화 사업에 대해 기사화한 뒤 전화로 연락해 온 상대의 맺음말이다. 온라인으로 표출된 기사 본문에 사실과 다른 표현이 들어 있으니 정정해 달라는 사업 담당 공무원의 요청이었다. 그와 장시간 통화 후 나름대로 요청 사항을 검토하고 내부 논의 절차를 거쳐, 기사에 반영했다.
하지만 기사를 수정하면서 왜인지 '찜찜함'이 남았다. 통화 상대가 언급한 '갑질'이란 표현이 귀에 맴돌았다. 사업 담당 공무원은 자신의 어떤 행위가 갑질이고 어떤 행위가 아닌지, 스스로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하지만 기사 속에 '우선협상대상자'로 등장하는 사업 입찰 기업도 동의했을 것 같지 않다.
잠시 문제의 기사 내용을 간단히 되짚어 보자. 공공정보화 사업 입찰계약 과정에서 우선협상대상자인 기업과 실제 수주 계약을 체결한 기업이 달랐다. 조달청 기술평가점수 1등으로 우선협상 자격을 얻었던 A사가 발주처와의 협상 도중 계약을 포기했다. 결국 제안 기회를 넘겨받은 B사가 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업 자체 예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 사업은 내년 이후 진행될 후속 사업을 줄줄이 예고한 정부 시책의 시범사업 성격을 띤다. 시범 사업을 수주한 B사는 내년 이후 후속 사업 입찰시 유리한 수주 경험과 사례를 확보하게 됐고, 향후 관련 성과를 대외 시장 영업에도 활용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우선협상대상자로서 이같은 기회를 차지할 수 있었던 A사는 포기에 따른 아쉬움이 컸을 텐데, 그럼에도 A사가 협상 도중 수주를 포기한 배경이 '제안요청서' 범위를 넘어선 요구사항 때문이었다는 게, 수정 전 기사의 내용이었다. 사업 담당 공무원이 '꼭 수정을 부탁'한 대목이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제안요청서는 발주처가 요구사항을 담아 공개하는 문서다. 협상 과정에서 제안요청서에 없는 내용을 요구했다면 이는 발주처가 사업 기획 단계에서 제안요청서를 잘못 쓴 것으로, 사업이 어그러지면 대부분 발주처의 잘못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사업 담당 공무원에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다.
사업 담당 공무원은 기사의 수정을 요구하며 논의 초점을 제안요청서가 아니라 '제안서'에 맞췄다. 그는 우선협상대상자 기업과의 협상 과정에서 '제안서의 요구사항 수행범위를 놓고 서로 해석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A사가 사업을 포기한 배경이 사업자와 발주처 중 어느 한 쪽 잘못이 아님을 표현할 수 있다.
요청을 검토하면서 A사 제안서 내용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제안서는 비공개 자료라 어려운 일이었다. 대신 수주를 포기한 당사자인 A사에 입장을 문의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뭔가 사정이 있을 것으로 짐작됐지만, A사는 공식적으로 밝힐 입장이 없다고만 답했다.
결국 사업 담당 공무원의 수정 요청을 반영했다. A사와 발주처간의 "제안서 해석 차이로 협상이 결렬"됐다고 표현했다. 제안서 내용에 대한 발주처의 이해가 그걸 설명할 주체인 A사가 전하려는 의미와 서로 맞지 않았고, 협상에서 조율을 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는 주장이다.
문제의 제안서는 A사가 발주처의 제안요청서를 직접 참고해 작성한 문서다. 그런데 그 내용의 해석을 놓고 A사와 발주처간 차이가 있다면, 작성한 A사 쪽 해석이 우선시돼야지 않을까. 과연 이런 사유가 A사와 발주처가 '대등한' 관계로 진행된 협상의 결렬에 타당한 명분이 되는 것일까. 이런 물음이 계속 남아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갑질을 "계약 권리상 쌍방을 뜻하는 갑을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갑'에 특정 행동을 폄하해 일컫는 '~질'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부정적인 어감이 강조된 신조어"라고 설명한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제멋대로 구는 행동을 말한다고 한다.
법률적 갑을관계가 지속되는 기간은 발주처인 '갑'이 수주 계약을 '을' 기업과 체결한 이후부터 사업 종료 시점까지일 것이다. 하지만 정부를 상대로 한 다른 모든 공공사업에서 언제 어떻게 불이익을 받을지 모를 기업들의 '을' 역할 기간은 계약을 체결하기 전부터 시작돼, 사업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된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발주처 담당자가 '나는 이렇게 읽었다'며 자사 제안서의 해석을 달리할 때, 수주를 원하는 기업 입장에서 '제안서 내용 해석상의 차이를 상호 인정'하는 것보다 획기적으로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지 궁금하다. 이런 상황에서 느낀 부담이 갑질이냐 아니냐하는 경계는 온전히 을이 정할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