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권위만 앞세우더니···금융감독원의 뼈아픈 실책
2020-07-03 05:00
키코는 2007년 은행들이 판매한 상품을 일컫는다. 해당 상품은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변동하면 약정한 환율에 외화를 판매할 수 있지만,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벗어나면 큰 손실을 볼 수 있는 구조의 파생상품이었다. 키코는 환위험 헤지를 원하는 수출기업에 다수 판매됐다.
문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환율이 일정 범위를 크게 벗어나면서 불거졌다. 대규모 손실을 본 기업들은 판매처인 은행이 사기 상품을 만들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법정 공방이 오간 끝에 대법원은 2013년 키코가 사기 상품은 아니었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문제는 결과보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윤 원장은 키코 권고안을 발표한 직후 은행들이 금융권의 신뢰 회복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나서달라고 주문했다. 은행들이 최종적으로 권고안을 불수용하기까지 금융감독원의 수장으로서 최대한 호소와 압박을 지속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고 피해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소멸시효가 대부분 지나버린 시점에서 구체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 없었고, 실제 동원하지 못했다.
은행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딜(deal)이라도 했으면' 하는 후문마저 나온다. 은행들에 권고안을 받아들이면 다른 이득을 주겠다고 접근했다면 혹여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시각에서다. 사기업으로서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은행은 윤 원장과 금감원이 내세운 무형의 권위를 경영 판단에서 중요하게 감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금감원이 특혜 대출 등의 의혹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며 제동을 걸었음에도 하나금융지주가 곧바로 현직 회장의 3연임을 결정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한 것이다. 최 전 원장은 기자간담회 직후 대학 동기 아들이 하나은행에 취업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보험업권에서 진행되고 있는 즉시연금 과소지급 문제도 금감원의 권위가 통하지 않은 사례로 꼽힌다. 2018년 하반기 민원인이 제기한 즉시연금 계약을 살펴본 금감원은 보험사에 보험금을 지급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삼성생명 등 대형 보험사는 금감원의 권고를 수용하지 않고 해당 민원인을 상대로 채무부존재 소송을 제기했다. 금감원의 권고를 따를 수 없다며 정면에서 거부한 것이다.
이에 대로한 금감원은 소송지원제도를 가동해 해당 민원인에 금전적 지원뿐 아니라 보험사 검사 결과와 내부 자료까지 제공키로 했다, 그야말로 금감원과 보험사가 법정에서 간접적인 공방을 벌이게 된 셈이다.
지난 2월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에 대해 금융감독원의 중징계 조치를 당한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이 일제히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도 이 같은 사례에 포함된다.
금감원은 '금융회사지배구조법' 등을 제재 근거로 들었는데, 정작 이 법에 금융사고에 대한 경영진 책임과 제재를 규정한 명문 조항은 없다. 때문에 금융권 일각에서는 금감원이 권위에 의지해 제재를 내렸으나 금융사 임원들의 역공을 받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같은 사례가 겹친 끝에 최근에는 금감원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후문이 들린다. 해당 사안에서 금감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기에 권위가 손상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금융·즉시연금 사례에서는 금감원의 권고가 일견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법규에 근거한 규제·징계를 내리기보다는 권위에 의존해 근거가 애매한 권고를 남발해온 금감원의 방식도 문제의 소지가 없지 않다.
금융당국에는 반드시 권위가 필요하지만, 모든 일을 권위로만 해결할 수 없다. 전문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적절한 제재 조치를 내리기보다 모든 문제에서 권위를 앞세워 마음대로 해결하려 한다면 권위를 잃을 수밖에 없다. 과거 금융검찰로 추상같은 위엄을 자랑했던 금감원이 다시 이전 같은 권위를 회복하려 한다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