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칼럼] 평화를 위한 전쟁기억의 딜레마
2020-06-28 15:12
1994년 10월 26일, 북한에서 탈출한 조창호 포병 소위는 자신의 군번 212966을 밝히면서 국방장관에게 복귀신고를 했다. 그리고 한달 뒤에 그는 국립묘지를 찾아 전사자로 처리돼 17년 동안 영현 봉안실 대리석에 새겨져 있던 자신의 위패를 손수 지웠다. 이로부터 다시 26년이 지난 올해,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국군 유해 봉안식에서 한 노병의 복귀신고가 있었다. “이등중사 류영봉 외 147명은 2020년 6월 25일을 기하여 조국으로 복귀 명을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유해 복귀신고라는 형식이 좀 어색하지만,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이들 대부분 1950년 12월, 장진호에서 미군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들로, 이들을 대신하여 복귀신고를 한 류영봉 이등중사는 미7사단 17연대 소속의 전우였다고 한다. 70년 전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매서운 눈보라와 칼바람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듯이 흩날리는 부슬비로 변해 있었다.
‘영웅에게’
전쟁기억을 평화를 위한 디딤돌로 삼는다는 것은 말이 쉽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나라마다 전쟁경험이 다를 뿐 아니라 우리나라처럼 전쟁 기억이 북한의 본격적인 남침 개시일 중심으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 전쟁 기억은 안보 경각심과 전쟁 책임을 상기하도록 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북한이나 중국은 6·25가 아닌 7·27을 기념하는데, 여기에 승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전쟁 기억은 평화와 거리가 더 멀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 감수성 증진을 위해 전쟁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전쟁이 남겨 놓은 유산 중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에 속한다.
이와 함께 6·25전쟁 70주년 행사가 국군유해 봉환과 미군 유해 송환의 의례로 채워졌다. 조국으로 귀환한 이들에게 ‘영웅’이라는 이름이 헌정되었다. 전쟁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이들의 유해를 잘 모시는 것은 전쟁을 평화로 돌리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항목이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전쟁의 상처를 상징하며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상기하는 자극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쟁 희생자들이 병사들에게 국한되지 않는 데서 온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남북체제 경쟁은 오래전에 종식되었지만, 우리의 체제를 북한에 강요할 생각이 없고, 당분간 평화가 통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에 북한도 담대하게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옳은 방향이지만, 체제 경쟁의 종식보다는 체제 경쟁이라는 틀 자체가 무의미해졌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튿날 ‘참전유공자와 함께하는 음악회’에서 가수 인순이가 “절실하게 그리워하는 한 사람 때문에 6월이 오면 마음이 흔들린다”고 고백하면서, ‘아버지’라는 노래를 불렀다. 인순이는 1950년대 중반에 한국에 근무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10년 전 미국 카네기홀에서 열린 한국전쟁 참전용사 초청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사실, 한국전쟁과 이후의 냉전은 ‘아버지가 그리운 사람들’을 무척 많이 만들어냈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었고, 또 누군가의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며, 또는 누군가의 소중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실종된 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순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전쟁 기억을 평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삼으려면, 생명의 소중함이 국경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목숨이 소중하기는 전투원이나 비전투원, 그리고 우리 병사뿐 아니라 적으로 싸웠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유럽에서 발전시킨 공동 추모의 문화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과도한 감성의 정치를 자제할 수 있다면, 화살머리고지에서 시작된 공동 유해발굴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