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쿠스코에는 '마추픽추'(해발 2437m)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잉카 제국의 도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페루로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로 23시간 25분이 소요된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마추픽추' 여행 후기에 언제나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있다. 바로 안개다. 그만큼 마추픽추를 이야기할 때 안개를 빼놓을 수 없다. 100일 중 95일은 맑고 5일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다. 

덕분에 실체를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어떤 이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한다. "마추픽추를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을 보면 신이 장난치듯 조금씩 보여주다가 안개 커튼을 확 닫는다. 또 다른 이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날씨는 신이 점지해주는 거다. 우리가 본 부분들을 퍼즐 맞추듯 맞추면 다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행복하다"고 말이다. 

지난주 제주에 위치한 엘리시안 제주 컨트리클럽(파72·6336야드)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2020시즌 다섯 번째 대회 제14회 S-OIL 챔피언십(총상금 7억원·우승상금 1억2600만원)은 안개와 낙뢰를 동반한 폭우로 1라운드에서 종료됐다.

자욱한 안개는 8시간 동안 대회장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 대회 종료로 이어졌다. 최진하 KLPGA 경기 위원장의 종료 발표 이후 대회장은 화창한 날씨로 바뀌었다. 주관 방송사인 SBS골프 해설진은 생중계 말미에 "어떻게 이렇게 화창해질 수 있을까요. 다시 경기를 치렀으면 좋겠네요"라며 황당해했다. 

당시 기자는 안갯속을 거닐었다. 코스로 나가는 길은 마치 마추픽추처럼 무척 신비로웠다.

미디어센터 앞을 거닐다가 김효주(25·롯데)를 만났다. 처음엔 마추픽추에 사는 알파카인 줄 알았다. 사회적 거리를 심하게 두고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로 짤막하게 담소를 나눴다. 그는 "8시간 대기는 처음이에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라며 웃어보였다.

이 대회 둘째 날이 치러지던 날, 기상 악화로 출발이 5시간 지체됐고 일몰로 순연됐다. 오전 조는 끝났지만 오후 조는 평균 7~8홀이 남았다. 셋째 날 잔여 라운드를 소화하지 못하고 대회 종료가 발표됐다. 결국 리더보드에서 둘째 날은 사라졌지만 참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김지영2(24·SK네트웍스)는 둘째 날 12언더파 선두였다. 그는 대회 종료 직후 인터뷰에서 "어쩔 수 없다. 다음 대회를 열심히 준비하겠다"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김민선5(25·한국토지신탁)는 짧은 퍼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고, 윤서현(21·대방건설)은 첫 홀 티박스에서 원구와 잠정구를 포함해 4번이나 티샷을 날렸다.

9홀을 남긴 최혜진(20·롯데)은 생애 첫 타이틀 방어가 무산됐다. 두 타만 더 줄이면 우승이었다. 그는 "아쉽다. 오래 기다리다 보니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승자는 가리지 못했지만, 이 대회는 모든 이들의 추억 속에 남았다. S-OIL 챔피언십은 스포츠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성화 봉송을 하고, 금·은·동메달을 포디엄(podium)에서 수여한다. 지난해에는 36홀로, 올해엔 18홀로 각각 마쳤다. 그래도 성화는 활활 타올랐다.

골프는 야외 스포츠다. 날씨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골퍼들에게 적응을 요하고 새로운 변수로 관전 포인트를 제공한다. 어쩌면 S-OIL 챔피언십은 우리에게 '마추픽추'와 같은 유산일지 모른다. '쉽게 우승을 내주지 않겠다'는 신의 장난과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우승하겠다'는 골퍼들의 싸움처럼 말이다.

입담이 좋은 골퍼 리 트레비노(미국)는 말로써 신의 장난과 맞섰다. "골프를 치다가 폭풍우를 만났을 때 낙뢰가 두렵다면 1번 아이언을 들어라. 신조차도 1번 아이언은 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유해란(19·SK네트웍스)은 지난해 태풍(레끼마)이 내려앉은 제주에서 생애 첫 승을 거뒀다.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 때였다. 물론 말이 많았다. 36홀 우승으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번 시즌 E1 채리티 오픈에서 만난 그는 이에 대해 "36홀 우승이라는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우승은 우승이다. 신이 점지해 주는 것이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 시즌 S-OIL 챔피언십은 신의 장난에 맞서 어떤 골퍼가 우승할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게 바로 스포츠 정신이고 도전이지 않을까. 안개라는 변수에도 23시간 25분 비행기를 타고 2437m를 올라 '마추픽추'를 보러 가는 이들이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