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하이브리드角] 아이유, 문익환, 플로이드…이름에게

2020-06-12 14:18
김춘수 '꽃', 아이유 '이름에게'가 부른 이름
고 문익환 목사의 "이한열 열사여", 문재인 대통령에 영향
플로이드, 미국 인종차별에 숨진 수많은 이름을 소환



#. 김춘수, 꽃이 되는 이름
‘봄 물가’, 이름이 시(詩)인 시인 김춘수(金春洙·1922~2004)는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읊조린다.

#. 아이유가 일깨운 이름에게
가수 아이유는 2017년 멜론뮤직어워드 무대에 그가 만든 곡 ‘이름에게’를 올렸다. 아이유가 1절을 부르고 2절부터 ‘이름들’이 등장했다. 데뷔 1주일차 신인가수 손효규, 유명가수 코러스 이유미, 길거리 버스킹 가수 차광민이 노래를 이어 불렀다. 뒤이어 노래 사이 “제 이름은 양승호입니다.”, “제 이름은 김가희입니다.”, “제 이름은 신문철입니다.(수어와 함께)”, “제 이름은 엄태우입니다.”…이후 무대에는 수십 명 출연자들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과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 이름들은 대형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렇게 아이유는 열심히 사는, 평범한 우리 이웃 한 명 한 명을 모두 아름다운 꽃으로 만들었다. (맨 아래 유튜브 영상)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6·10, 5·18, 8·15, 대통령이 부른 이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많은 이름을 언급했다.

전태일 열사를 가슴에 담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평생을 다하신 고 이소선 여사님,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고 박형규 목사님, 인권변호사의 상징이었던 고 조영래 변호사님, 시대의 양심 고 지학순 주교님, 5·18민주화운동의 산증인 고 조비오(철현) 신부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신 고 박정기 박종철 열사의 아버님, 언론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고 성유보 기자님, 시대와 함께 고뇌한 지식인 고 김진균 교수님, 유신독재에 항거한 고 김찬국 상지대 총장님, 농민의 친구 고 권종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님, 민주·인권 변호의 태동을 알린 고 황인철 변호사님, 그리고 아직도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님과 해외에서 우리를 지원해주신 고 제임스 시노트 신부님, 조지 오글 목사님…실로 이름 그 자체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이며, 엄혹했던 독재시대 국민의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분들입니다.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사 중)

문 대통령이 부른 이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꽃이 됐다. 정부는 그 이름들에 훈장과 포장을 줬다. 1974년 ‘인혁당 사건’ 관련해 강제 추방됐던 조지 오글(91) 목사와 고 진필세 야고보(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국민포장을, 나머지 열두 분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 등 민주화운동 열사 4명의 이름을 불렀다. 문 대통령은 또 같은 해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5명의 독립운동가 '선생', 이태준, 장덕준, 남자현, 김용관, 나운규를 불렀다.
 


#. 33년 전 문익환, 목 놓아 외친 이름들
이렇게 문 대통령이 이름을 부른 건 고 문익환 목사에 대한 오마주(어떤 인물에 대한 존경, 경의를 표하는 것)다. 이날 6·10 기념식에서 나왔던 고 문 목사 영상을 보면 이해된다. 1987년 7월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문 목사는 26명의 이름을 부르며 “000 열사여” 절규했다. 아래 그 이름들. 전태일, 김상진, 장준하, 김태훈, 황정하, 김의기, 김세진, 이재호, 이동수, 김경숙, 진성일, 강성철, 송광영, 박영진, 광주 2천여 영령, 박영두, 김종태, 박혜정, 표정두, 황보영국, 박종만, 홍기일, 박종철, 우종원, 김용권, 이한열. (일부 추후 수정)
 

[미국 작명 사이트 첫 화면에 인종차별로 살해된 흑인들의 이름이 게재됐다. 사진=홈페이지 캡처]


#. 조지 플로이드가 소환한 이름
백인 경찰관이 무릎으로 8분 46초 목을 눌러 숨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미국에서는 20일 넘게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최근 시위에는 잊힌 이름들이 소환되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에 앞서 공권력, 백인들에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흑인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17세 소년 트레이본 마틴, 플로이드처럼 목이 눌려 숨진 에릭 가너 등. 신생아 작명 사이트인 BabyNames.com은 홈페이지 첫 화면에 이렇게 목숨을 잃은 흑인 150여명의 이름을 올려 놓았다. “이 이름의 사람 하나하나는 누군가의 아기였다.”라며.
 

[사진=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캡처]


#. 정부…코로나19 영웅들의 이름 기록해야
코로나19와 길고 힘든 싸움을 벌이는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꼭 남겨야 한다. 방역 당국, 의료진처럼 불특정한 명칭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말이다. 코로나19 현장에서 사투를 벌인 모든 정부, 지자체 직원, 병원 관계자, 방역 담당자들은 물론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 코로나 성금·물품 기부자들의 이름도 새겨 놔야 한다. 정부가 코로나19 이후 발간할 보고서에 그 모든 이름을 빼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기록은 미래를 보는 지혜의 창”이라고 한다. 국가기록은 미래 전해줄 유산(遺産)일 뿐 아니라 국민과 활발히 소통해야할 소중한 지혜, 그 자체다. 기록은 소통이 돼야 그 의미를 찾을 터, 정부가 미래 세대를 위해 길이길이 ‘보전’할 이름을 꼼꼼히 적어 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