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0)]금성을 맨눈으로 세번이나 본 사람

2020-06-08 15:00
윤동주의 '서시'와 류영모의 '첨성유감', 깨달음이 반짝인 밤

[다석 류영모]


음력 정월 첫날 하늘과 통한 시

1943년 2월 15일은 계미년 음력 설날이었다. 53세의 류영모는 새벽에 일식(日蝕)을 보기 위해 서울 북악(北岳)에 올랐다. 산은 희끗희끗 잔설(殘雪)이 덮여 있었다. 그 전해 57일간 감방에 있었고, 제자인 김교신과 함석헌, 송두용은 아직 풀려나지 않았던 때였다.

뒤숭숭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는 날, 그는 두해 전의 파사일진(破私一進)의 기세를 가다듬고 싶었다. 북악마루에서 동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울 상공에는 안개바다가 펼쳐졌고 무평선(霧平線, 안개의 수평선)이 남쪽 관악까지 걸쳐 있었다. 마침내 해가 떠올랐다. 햇살이 돋아오르는 광경은 호연지기를 돋운다. 심호흡을 하며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온몸으로 들이마셨고 단전 깊은 속까지 들이킨 숨을 광대한 허공으로 돌려보냈다. 문득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申身瞻徹 極乾元氣(신신첨철 극건원기)
몸을 펴고 하늘끝까지 꿰뚫어 태초의 기운을 보나니


'우주체조'를 하는 한 동작과도 같이 느껴진다. 몸을 쭉 펴고 광대무변한 하늘을 끝까지 바라보며 먼 곳에서 느껴지는 으뜸 기운을 접하는 동작이다. 류영모의 사유와 인식의 스케일을 느낄 수 있는 장쾌한 구절이다. 하늘을 바라보면 사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런데 류영모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을 자꾸 쳐다보고 그 다음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위까지 쳐다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보고 또 보면서 하늘의 기운을 찾아내는 첨철극(瞻徹極, 끝까지 바라보기)이다.

沈心潛透 止坤軸力(침심잠투 지곤축력)
맘을 내려 땅끝까지 잠기게 해 지축의 중력 원점까지 내려가나니


몸을 펴서는 우주의 기운까지 닿았으니, 이젠 몸을 굽혀 심장을 내려꽂아 땅 속의 중력 원천까지 간다는 말이다. 신(身)은 끝없이 솟아올랐고 심(心)은 한없이 땅끝으로 내려갔다. 이 굴신(屈伸)의 단순동작이야말로, 한없이 넓은 우주를 호흡하고 아스라한 신을 경배하며 한없이 낮은 원천의 태도를 회복하는 호연지기 체조의 진면목이 아닌가. 류영모는 이 8언 2행의 제목을 '첨철천잠투지(瞻徹天 潛透地 하늘을 뚫고 올려보고 땅을 뚫고 내려가다)'라고 붙였다.

망원경을 직접 만든 류영모와 류자상

류영모는 말했다. "종교나 형이상학은 이 세상을 초월하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으니 이를 생각으로라도 좀 초월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피어 한없이 넓어지면 빔(空)에 다다를 것입니다. 공은 맨처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의 뿌리입니다. 곧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자기 맘속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서 자기의 속알(덕)이 밝아지고 자기의 정신이 깨면 아무리 캄캄한 밤중 같은 세상을 걸어갈지라도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류영모는 우주를 사랑했고 하늘을 사랑했고 어둠을 사랑했고 별을 사랑했다. 그는 천문학에 관심이 깊었다. 당시 일본 다우에(田上)천문대에 있던 천문학자 야마모토(山本一淸)가 간행한 월간잡지 '천계(天界)'의 애독자였다. 이 잡지에 망원경의 반사경을 유리를 갈아서 만드는 방법이 실렸다.

대략 이런 방법이었다. "두꺼운 유리를 포개어 놓고 유리 사이에 금강사(金剛砂)를 넣어 갈아낸 다음 주사(朱砂)를 넣어서 간다." 금강사는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인 연마제이며, 주사는 황화수은을 주성분으로 하는 광물이다. 부전자전인가. 류영모의 둘째 아들 류자상은 그 글을 읽고 금강사와 주사를 구해 실제로 망원경 반사경을 만들어냈다.

류영모와 류자상은 직접 만든 반사경으로 망원경을 만든다. 접안렌즈는 구입했고, 망원경 몸통은 나무로 만들었다. 별자리 그림이 그려진 받침 삼각대를 만들어 하늘의 별과 성좌그림을 일치시켜 별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고안했다. 부자는 달에 있는 분화구, 토성의 고리, 목성의 유성그림자를 그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이 자작 망원경은 1950년 6·25 때 집을 비운 동안 사라지고 말았다.

금성을 세 번이나 맨눈으로 본 사람

"별을 관찰하기엔 달 없는 그믐밤이 최고이고, 하늘이 맑은 겨울밤이 좋습니다. 사람은 하늘을 쳐다봐야 합니다. 별자리 정도는 알 수 있을 만큼 하늘을 쳐다봐야 사람입니다. 밤에 별자리를 보면 낮보다 더 한층 우주를 느낍니다. 새로운 별이 나타날 때는 무슨 새로운 영원한 소식이 오는 것 같이 놀랍습니다."

류영모는 일생 동안 세 차례 금성을 맨눈으로 봤다. 천문잡지나 신문에 낮에 뜨는 별을 예보하는 뉴스를 보면 반드시 보았다고 한다. 낮에 보이는 금성을 태백성이라고 부른다.

'첨성유감(瞻星有感, 별을 보며 느낌이 있어 쓰다)'이라는 류영모의 시가 남아 있다.

太陽口號晤日辰(태양구호오일진)
穹窿宣布億兆文(궁륭선포억조문)
諒闇宿命晦除夕(양암숙명회제석)
虛靈危微恐化石(허령위미공화석)

태양은 하루의 길흉을 밝힌다고 말하지만
우주의 허공은 억조창생의 비밀을 선포하네
어렴풋이 숙명을 헤아리니 섣달 그믐밤이요
빛나는 듯 빛나지 않는 별빛이 화석처럼 사라질까 두렵네

앞의 두 구절은 류영모의 '어둠'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 태양의 밝음은 오히려 짧고 좁지만 우주의 어둠은 모든 것들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캄캄한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돋우고 있는 셈이다. 태양은 하루를 밝히지만 허공은 우주의 역사 전체를 기록하고 있다.

그 밤하늘을 쳐다보며 류영모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근원을 헤아린다. 마침 섣달 그믐밤으로 어둠이 가득하니 어렴풋이 그것이 보일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행은 깊이 음미할 만하다. 허령위미(虛靈危微)는 허령불매(虛靈不昧)와 위미(危微)를 합친 말이다. 허령불매는 하늘에서 받는 밝은 기운(明德)으로 별빛을 의미한다. 

위미(危微)는, 공자가 말한 '인심유위 도심유미(人心惟危 道心惟微)'에서 나왔다. 논어나 서경(書經)에 언급된 말로, 사람의 마음은 변덕이 있어 깜박깜박하고 진리의 핵심은 너무도 어렴풋하여 확실히 잡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사람 마음같이 깜박깜박하고 진리의 핵심같이 너무도 어렴풋한 것이 대체 뭘까. 바로 별들 아닌가.

별들을 보면서 허령불매를 떠올렸고, 또한 인간마음과 도(道)의 핵심을 떠올렸다는 점이 류영모의 참신하고 빼어난 시상이다. 별은 스스로는 환하지만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환하지 않아 허령위미다. 빛이긴 하지만 깜박거리며 위태롭고 희미하다. 그러니, 마치 세상이 만들어지던 오랜 시간 저편의 화석을 대하는 것처럼 곧 사라질 것 같은 조바심이 생긴다. 억조창생의 비밀을 담고 있는 저 별빛이 혹시 영원히 유실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어떤 사람의 마음, 지극한 경외(敬畏)의 마음. 그것이 별들을 가만히 우러르는 류영모의 눈길이다.
 

[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서시'와 류영모의 첨성유감

류영모의 '첨성유감'을 읽으면, 같은 시대를 살아간 윤동주(1917~1945)의 '서시'가 오버랩된다.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조부의 영향을 받았다. 1935년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이곳에서 같은 반 친구로 김형석(연세대 명예교수, 1920~ )을 만나기도 했다.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쇄하는 바람에 다시 용정으로 가서 중학교를 졸업한다. 그 뒤에 서울로 와서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것이 1941년이다. 평양과 서울에서 그는 성서조선을 접할 수 있었을까. 신앙인이었던 그는 27년 위였던 다석의 이름을 들었을까. 엄혹한 식민지 시대 바라본 밤하늘과 밤공기를 담은 '서시'를 류영모의 시선으로 한번 살펴보는 건 어떨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신)을 우러르는 삶은 류영모가 견지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평생 하늘을 우러르며 살았다. '한 점 부끄럼'은 바로, 육신의 원죄인 탐진치(貪瞋癡, 욕망과 분노와 성욕)에 빠지는 일이었고 '없기를'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치열함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하느님을 향한 오롯한 실천을 흔드는 몸나와 제나의 지엽(枝葉)적인 방해이며 '괴로워함'은 그것을 떨치는 평생의 염결(廉潔)이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바로 저 '첨성유감'에 들어있는 경건함이다. 우주를 응시하며 우주의 주재자와 하늘의 절대자를 노래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것'은 바로 생명이 있는 육신이며 육신을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삶이다. '죽어가는 것'은 나의 몸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기에,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몸나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세상의 모든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류영모 기독사상의 근본 이상이 아닌가. 류영모의 기독사상은 바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그 구경각(究竟覺, 자아로 인한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면서 생겨나는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나한테 주어진 길'은 하늘의 명(天命)이며 바로 파사일진(破私一進)의 깨달음이며 성령과 합일하는 길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마지막 말은, "밝은 것이 어렴풋이 깜박이니 원시의 화석을 만난듯 겁이 나는(虛靈危微恐化石)" 그 비장하고 삼엄한 마음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해낸 것이 아니던가.
 

[파사(破私) (그림 = 전미선)]



꽃송이보다, 꽃 위의 허공이 아름답다

◆ 다석 한시(漢詩) '공색일여(空色一如) - 허공과 꽃은 같다'

物色不得一色物(물색부득일색물)
꽃빛은 그 빛을 영원히 갖지는 못하지
空虛蔑以加虛空(공허멸이가허공)
허공을 비웃다가 스스로도 허공으로 간다네
諛有侮無後天痴(유유모무후천치)
뵈는 것만 좋아하고 안보이는 건 비웃으니 이 세상 천치로다
同空異色本地工(동공이색본지공)
허공에서 나와 꽃빛 각각 나뉜 것이 이 세상의 꾸밈이라
花容虛廓天啓示(화용허곽천계시)
꽃송이 위의 허공 둘레엔 하느님이 있다네
花語虛風人妄動(화어허풍인망동)
꽃을 말하며 헛된 소리만 말하니 사람의 헛짓
服膺體面容納止(복응체면용납지)
가슴과 눈과 얼굴로 본 것으로 말하지 말게
直內方外中空公(직내방외중공공)
안으로 진실하고 바깥으로 반듯한 건 허공 속의 님뿐

(1956.12.27)

이 시는 부처가 말한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묘리를 류영모의 허공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허공을 우습게 여기지만, 그건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에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천치 중에서 후천의 천치 생각이라는 얘기다. '꽃송이와 꽃둘레'라는 개념으로 전체 시를 풀어보았다. 조금 더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物色不得一色物(물색부득일색물) - 사물의 빛은 단 하나의 빛을 지닌 사물도 지니지 못한다네. (예를 들어 단풍잎은 곧 그 단풍빛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바래진다. 아름다운 여인은 곧 늙어가는 여인이 된다. 왜 그럴까. 그 조건을 지킬 수 있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얻을 수 있는 물색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묘미는 '물색(物色)'에 있다. 물색은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물의 빛에서 물색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한 빛깔도 없다. 저승에 가져갈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꼭 같다.) ▶空虛蔑以加虛空(공허멸이가허공) - 지금 사물의 빛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텅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을 경멸하지. (그렇게 경멸함으로써 그 자신이 아무것도 없이 텅빈 곳에 들어간다(한 점 허공을 보탠다). 인간은, 허공엔 아무것도 없다고 경멸한다. 그러나 죽으면 허공 이외에 어디로 가겠는가. 제 자신인 허공을 경멸하는 것이다.) ▶諛有侮無後天痴(유유모무후천치) - 눈에 보이는 건 좋다고 감탄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업신여기지. 세상살이에 눈이 팔리면 허공 따윈 믿지 않지. 허공이 선천(先天)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후천(後天)의 바보들아. ▶ 同空異色本地工(동공이색본지공) - 같은 허공에서 나서 색으로 갈라진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생김새라네  花容虛廓天啓示(화용허곽천계시) - 꽃송이를 보지 말고, 꽃송이를 둘러싼 허공을 보게. 하늘의 뜻은 거기에 있는데 花語虛風人妄動(화어허풍인망동) - 꽃을 말하면서 꽃둘레의 허공은 볼 줄 몰라 헛소리만 하니 사람들의 어리석은 짓이라네. 服膺體面容納止(복응체면용납지) - "꽃향기가 좋다"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복응), "꽃빛이 좋다" 면목으로 실질을 삼는 것(체면), "꽃이 싱싱하다" 얼굴로 받아들이는 것(용납)은 모두 색(色)의 행동이니 그것을 그만두면 直內方外中空公(직내방외중공공) - 꽃의 진정한 상태를 볼 수 있고 꽃의 바깥을 제대로 알 수 있으니 허공 한복판의 신을 볼 수 있으리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