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혁명가들] 아픔과 성장의 철도史…근현대사 발자취 고스란히

2020-05-29 08:03


"차마다 바퀴가 달려 앞차의 화륜(火輪)이 한번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 구른다. 화륜차는 천둥번개처럼 달리고, 비바람처럼 날뛰어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리는데도 차체는 요동하지 않는다."

김기수 선생은 1876년 '일동기유(日東記遊)'를 통해 일본에서 처음 열차를 본 생생한 경험을 풀어쓰며 철도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의 철도사는 그가 일본 수신사로 건너가 철도를 처음 접한 것으로 시작됐다.

우리나라 철도사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맥을 함께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탈을 위한 군사적 병참 수단으로 이용됐던 철도는 서울과 지방 주요 항구도시를 연결하는 종관철도 형태로 건설됐다.

한국 철도의 태동기에는 열강의 철도 이권 다툼 속에서 결국 일본의 독점적 운영으로 이어진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경제성장기 속에서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2004년 이후 10여년간 진행된 경부고속철도, 호남고속철도, 수서고속철도의 개통은 시·공간의 혁명을 일으키며 국토의 균형발전과 대한민국의 교통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우리기술로 만든 최고 시속 430㎞의 초고속열차 상용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120여년 만에 철도 고속화와 현대화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선 것이다.
 

1900년대 경인철도 초창기 인천역[사진=코레일 제공]


◆육상교통의 새 시대··· 이면엔 제국주의의 아픔

1899년 9월 18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경인선 인천(제물포)~서울(노량진) 구간에 기관차가 도입됐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철도가 개통(1825년)된 지 74년 만이었다.

경인선이 처음 운행했을 때 한강교량이 완공되지 않아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7개역의 단선을 부분 개통해 가영업했다. 교량 완공 시까지 한강은 나룻배로 건너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특히 개통 당시 인천~노량진 간 열차 운행시간은 1시간40분으로, 표정속도는 20㎞/h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보편적이었던 교통수단인 도보로 12시간, 수로로 8시간 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획기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1905년 1월에는 경부선(영등포~초량)이 개통됐다. 급행 여객열차를 타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11시간이 걸렸다. 대부분 도보로 수십일 걸려 여행했던 당시의 교통사정을 고려하면, 육상교통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철도 개통의 이면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세계 열강의 각축 속에 일본의 침탈로 우리 철도는 타율적으로 개통·운행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식민지 경영정책과 군사적 목적을 위해 서울을 중심으로 철도를 건설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1906년 경의선이 운행을 시작하면서 한반도의 남북관통선이 완성됐다. 경원선(용산~원산), 호남선(대전~목포), 장항선(천안~장항), 중앙선(청량리~경주), 동해남부선(부전~울산) 등도 순차적으로 개통됐다.
 

1974년 개통된 수도권전철[사진=코레일 제공]


◆국가재건 위해 달리는 철길··· 고도 경제성장의 견인차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에 철도의 역할은 컸다. 정부 수립 후 전란 수습은 물론 경제개발을 위해 철도 건설을 통한 산업기반을 조성했고, 이렇게 마련된 철도는 국가경제발전의 발판이 됐다.

한국에서 처음 실시된 종합 경제개발계획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진행되면서 철도는 필요 불가결한 인프라로 자리잡았다. 산업 철도의 건설 등 수송력의 증강과 수송 수요의 원활한 대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 같은 의지는 열차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부는 1962년 경부선 특급 중 제1열차인 무궁화호를 재건호로 개칭했다. '국가 재건'을 내세웠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최고 특급인 경부선의 관광호는 새마을호로 개칭됐다. 당시 정부의 최고 관심사였던 새마을운동에서 따온 이름이다.

철도 개설과 함께 도시철도의 필요성도 대두됐다. 수도권 교통난 해소를 위해 1974년 서울에서 종로선(현재 1호선)이 개통됐고 1983년 2호선, 1985년 3·4호선이 잇따라 운행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서울 상주인구 증가와 교통인구 증가는 서울 행정구역의 평면적 확장을 불러일으켰다.

서울의 교통수요 증가와 서울 주변 지역의 개발로 전기철도가 서울 도심권에 출입하는 교통을 도맡게 됐다. 개통한 지 4년 만인 1978년에는 서울의 지하철과 수도권 전철이 하루 61만여명을 수송하는 핵심 대중교통수단으로 자리잡게 됐다.
 

해무 시험운행[사진=코레일 제공]


◆대한민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고속철도의 시대

우리나라는 물동량에 비해 교통 시설이 크게 부족해 물류비가 1984년 이후 매년 15%씩 증가했다. 인구와 국민 총생산의 3분의2가 서울~부산에 집중돼 있어 경부축의 교통·물류난을 해소하지 못할 경우 국가경쟁력 강화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의 추가 확장에도 근본적인 교통정체가 해결되지 않자 고속철도의 중요성이 떠올랐다. 고속철도는 열차가 대부분 구간을 시속 200㎞ 이상으로 주행할 수 있는 철도를 의미한다.

정부가 전국을 반나절권화할 수 있는 새로운 교통시스템인 고속철도를 도입하자, 철도수송능력은 배가됐다.

2003년 기준 경부·호남 축 장거리열차 운행횟수는 128회에서 2004년 고속철도 개통 후 171회로 134% 늘어났다. 공급좌석 수는 4만7296석에서 10만7830석으로 2.3배 증가했다. 철도 경쟁력과 수송능력이 획기적으로 제고되면서 국가적으로는 교통 혼잡과 물류비 감소, 환경 개선 등 대규모 편익이 발생했다.

2010년 3월엔 KTX의 후속 모델인 KTX-산천의 상업운행이 개시됐다. KTX-산천은 국가 R&D 사업으로 연구·개발한 HSR-350X를 기본모델로 현대로템에서 설계·제작한 한국형 고속열차다.

현재는 최고 시속 430㎞의 초고속열차 해무(HEMU-430X)를 여객운송에 투입하기 위한 인프라 조성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해무가 상용화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로 2시간 30분이 걸리던 것이 1시간 30분으로 줄어든다.

지난 3월 증속시험에서는 최고속도 시속 421.4㎞를 기록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프랑스, 일본,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넷째로 빠른 고속철도 기록을 가진 나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