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20년 철권통치 코로나에 휘청... '현대판 차르' 푸틴의 생존 전략은?
2020-05-18 10:15
'푸틴이 없는 러시아' 멀지 않았다?
러시아, 코로나19 확진자 28만명 돌파 ..미국에 이어 2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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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언론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21세기 차르(러시아 황제)'로 일컫는다. 2000년에 집권한 뒤 헌법까지 고쳐가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 정보기관 KGB 출신인 푸틴이 1999년 8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될 당시만 해도 그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옐친은 두번째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6개월 전인 그해 12월 31일 오전 푸틴과 단독 면담을 가진다. 그리고 그날 정오에 돌연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푸틴은 47세의 나이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된다. 당시 푸틴은 총리 임명 후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벌어진 체첸 반군의 인질극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무기력하고 엉성한 이미지의 옐친과 달리 단호하고 결단성 있는 인물로 평가되며 인기가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푸틴은 3개월 후 치러진 대선에서 공산당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승리를 거둔 이후 20년 넘게 러시아를 철권 통치하고 있다.
옐친(당시 68세)의 사임 이유는 표면상으론 건강문제와 후진양성이 이유였다. 하지만 정치 분석가들은 러시아 루블화 폭락에 따른 국채 모라토리엄 선언(1998년) 등 경제위기와 각종 부정부패 의혹으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던 그가 퇴임 후 후임자로부터 면책이나 사면을 보장받기 위한 조기 퇴진으로 평가했다. 그는 TV 특별 연설에서 러시아가 "어둡고 가난한 전체주의 과거에서 밝고 부유하고, 또 문명화된 미래로 발돋움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사죄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다음 밀레니엄(새천년)을 새로운 정치인과 새로운 인물, 그리고 스마트하고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과 함께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며 사퇴 결심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날 자정 푸틴은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으로 TV를 통해 대국민 신년 메시지를 보낸다. 요지는 "러시아에 한순간도 권력 공백이 없을 것"이며 "법률과 러시아 헌법의 한계를 넘으려 하는 시도는 단호히 분쇄될 것" 그리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유재산권 등 문명사회의 기본권은 국가가 철저히 보호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옐친은 러시아 민주주의의 영웅이라는 찬사와 함께 대통령직을 화려하게 시작했다. 이후 그가 소련을 성공적으로 개혁할 것이라는 기대가 러시아 내부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확산됐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러시아에 시장 자본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에서 경제기 깊은 수렁에 빠지면서 그는 형편없이 무능한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특히 자본주의로의 전환에 필요한 제도 및 법령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올리가크(Oligarches)로 불리는 신흥재벌들이 탄생해 정부의 각종 특혜로 부를 쌓았다. 또 서방기업들은 러시아 경제의 핵심인 석유·가스 에너지 부문에 경쟁적으로 진출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면서 경제적 위기를 부채질했다. 가족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까지 터지며 퇴임 후를 불안해 하던 옐친은 알코올 중독과 무기력증에 빠진 병든 북극 곰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궁지에 몰리던 그는 자신과 대조적으로 젊고 흔들림없이 강한 기질의 푸틴이 러시아 유권자들이 선호하는 새로운 지도자감으로 보고 그를 후계자로 낙점했다. 그리고 푸틴의 인기가 절정일 때 자신이 조기 퇴진해 2000년 3월에 대선을 치르는 것이 선거 전략상 여당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의 조기 퇴진은 6월 대선을 준비하던 야당에게 기습 펀치를 날린 것이기도 하다. 푸틴은 3월 26일 치러진 1차 대선 투표에서 절반을 넘긴 53% 득표로 대통령에 선출된다.
푸틴은 대권을 거머쥐자마자 서방 기업의 탐욕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또 소득세를 내리고 경제 특권층에 제재를 가하는 등 개혁에 나섰다. 부패와 범죄, 혼란에 익숙한 러시아 국민은 푸틴의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에 환호했다. 러시아 경제도 2000년대 초반 국제유가 상승과 글로벌 상품시장 붐에 힘입어 푸틴이 임기 4년의 대통령직을 연임한 8년 동안 72%나 성장했다. 헌법의 3연임 금지 조항에 따라 2008~2012년엔 그의 심복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이 되었고 푸틴은 대신 총리를 맡아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다. 2012년 헌법개정으로 임기 6년의 대통령직에 63.6%의 득표율로 복귀했다. 또 2018년엔 76.7%의 지지를 받아 재선되면서 2024년까지 권좌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푸틴의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에 개입하여 크림반도를 자국 영토에 병합시키면서 서방과의 힘겨루기를 본격화 한다. 이듬해엔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하여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중동에 '친러벨트'를 구축하는가하면 미국이 제거하려는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을 후원하는 등 미국 주도의 국제안보 패권에 맞서면서 러시아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구(舊)소련 국가들을 유럽과 구분되는 유라시아권이라는 정체성으로 결집시킨 '유라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집권 이후 지구촌 곳곳에서 외교력을 과시해온 푸틴은 사실상 종신집권의 야심까지 본격 드러내고 있다. 그는 대통령 연임 제한을 수정하는 개헌안에 대해 지난 4월 22일 국민 동의를 받을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연기됐다. 이번 개헌안에는 2024년 4번째 임기를 마치는 푸틴 대통령이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도록 그의 기존 임기를 백지화하는 조항이 담겼다. 개헌안이 통과된다면 푸틴 대통령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대통령직을 더 수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새 투표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러시아에서 맹렬하게 확산하면서 푸틴 대통령이 추진하는 '강한 러시아' 부활과 그의 정치적 야심이 차질을 빚고 있다. 또 크림반도 합병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제재로 가뜩이나 위축된 러시아 경제는 글로벌 경기침체로 인한 유가하락까지 겹쳐 더욱 움츠러들고 있다. 집권 20주년인 올해 세계 주요국 정상들을 초청해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펼쳐 러시아 힘을 과시하고 국민들의 애국심 고양을 노렸던 제2차 세계대전 전승 75주년 기념행사(5월 9일)는 러시아 국민의 이동금지령속에 조용히 치러지며, 푸틴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푸틴이 시진핑 중국 주석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초청해 좌우에 앉혀 놓고 위상을 뽐낼 예정이었지만 물거품이 됐다"고 보도했다.
국제 저유가와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경제난은 푸틴의 국정 지지도를 집권 이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현지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첸트르가 현지시간 6일 발표한 지난달 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집권 후 최저수준인 59%로 하락했다. 2개월 사이에 국정 지지도가 10% 포인트나 하락한 것으로 푸틴에게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올해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6%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코로나 확진자수도 5월 들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지난 17일(현지시간) 28만명을 넘어섰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 규모이다.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정치적 이미지로 러시아에 '확실성'(certainty)을 제공하며 승승장구 했던 푸틴이 코로나19가 러시아에 던져준 '불확실성'(uncertainty)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지난 10일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념이 무엇이냐고 묻자 "애국심"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그의 흔들리는 정치적 위상을 러시아 국민의 애국심으로 극복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애국심이 1인 권력독점 체제인 러시아의 '비민주성'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푸틴이 없는 러시아가 이젠 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