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시샘] 손택수는 왜 '먼 곳이 있는 사람'을 찾았을까
2020-03-18 16:38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어디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손택수의 '먼 곳이 있는 사람' <2020년 출간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창비) 중에서>
"시는 그늘에서 와서 그늘로 가는 장르다. 언어는 명명되는 순간에 사물을 소외시키기 쉽고, 존재는 누구나 이력서나 약력 따위로는 정리될 수 없는 저마다의 비밀들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손택수 시인의 말이다.
멀다'라는 말은 거리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눈과 귀가 느끼는 이곳과 저곳의 격리다. 그 격리는 닿고자 하는 마음을 돋운다. 우리 말 중에 아주 기묘한 표현이 있는데, '눈이 멀다' 혹은 '귀가 멀다'라고 할 때의 '멀다'이다. 눈은 제자리에 있는데, 귀도 제자리에 있는데 왜 '멀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눈이 바라볼 수 있는 저 먼 곳은, 눈이 바라볼 수 없는 '그 뒤'를 숨기고 있다. 귀가 들을 수 있는 저 먼 데의 소리는, 귀가 들을 수 없는 더 먼 '그 뒤'를 숨기고 있다. 눈이 먼 사람은, 눈이 바라볼 수 없는 아득한 곳이 안 보이는 것처럼 눈 앞이 안 보이는 것이다. 귀가 먼 사람은, 귀가 들을 수 없는 아득한 곳에서의 소리가 안 들리는 것처럼 귀 앞이 안 들리는 것이다.
우리는 위치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먼 곳'이란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리일 뿐이다. 그곳에 닿을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면 '먼 곳'은 그 격리의 힘을 잃어버린다. 일일생활권이니 한나절생활권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태양에 10초만에 다다를 수 있는 우주선이 만들어졌다면, 아무도 태양을 먼 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멀다'는 처음부터 우리 감각이 느끼는 마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대, 너무 가까워져 그리워할 겨를이 없어져 버린 시대, 모든 공간들이 딱풀처럼 붙어버렸고, 랜선으로 연결되어져버린 시대. 문득 손택수는 '먼 곳'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눈 멀도록 바라보며 그리워하던 격리의 불가능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먼 곳이 있는 사람이 그립다. 할 수 없는 것, 다다를 수 없는 것, 하나하나 생략하지 않고 걸음으로 닿아야 했던 그 거리의 위대함이 살아있던 시간을 여전히 자기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눈 먼 사람과 귀 먼 사람이 그립다.
그는 '끊는다'고 말했지만, 모든 문명은 함부로 잇는 폭력들이다. 왜 자꾸 이어서 이토록 급하게 어디엔가로 닿도록 만드는가. 격리가 주는 고요함과 불편함과 고독함을 왜 용납하지 않는가. 먼 곳이 있다는 것은 신비가 있는 것이다. 아직 미답의 영역이 있는 것이고, 아직 가볼 만한 꿈이 있는 것이다. 굳이 먼 곳을 정복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먼 곳을 바라보며 현재의 자기를 돌아보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먼 곳을 걸어가다가 지쳐서 어딘가 너럭바위에 앉아서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먼 곳'이 없으면, 그리운 사람도 없다. 다 당겨오고 끌어와 제 곁에 둬버리기 때문이다. 연애의 비밀함도 오해의 달콤함도 없다. 너무 환하다. 어둠을 어둠으로 둘 때 우리는 우주를 온전히 느끼는 게 아닐까.
그래서, 먼 곳은 어디에 있는가. 먼 곳을 착취당한 우리의 허약한 걸음은 그저 제자리를 걷는 러닝머신처럼 먼 곳에 있던 모든 신을 약탈당한 풍경이 아닌가. 그 많던 별들을 누가 지워가고 있는가.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