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형의 불온한 정치] 오스카 4관왕 봉준호의 '기생충'이 한국 정치에 남긴 것
2020-02-11 15:39
92년 화이트 오스카 뛰어넘은 영화 '기생충'…'비주류·소수자' 한계 단숨에 극복
봉준호 메시지 '상상하라·도전하라·소통하라"…고립된 섬 자처하는 韓정치 상반
靑,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권력집중 여전…與野, 1년 내내 블랙 코미디 연출
영화 '기생충' 반지하, 자본주의 계급모순 찔러…1·21 사태 후 만든 남북분단 민낯
봉준호 메시지 '상상하라·도전하라·소통하라"…고립된 섬 자처하는 韓정치 상반
靑,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권력집중 여전…與野, 1년 내내 블랙 코미디 연출
영화 '기생충' 반지하, 자본주의 계급모순 찔러…1·21 사태 후 만든 남북분단 민낯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봉준호 영화감독)
세계가 깜짝 놀랐다. 자본주의 심장을 찌른 영화 '기생충'이 거대한 문화장벽을 허물었다. 92년간 지속된 백인 중심의 '화이트 오스카'가 산산이 부서졌다. '영화'라는 공통의 언어로 유리천장보다 높았던 '아시아·비주류·소수자'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에서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각본상·국제극영화상(구 외국어영화상) 등 4관왕의 쾌거를 이룬 영화 기생충은 파격 그 자체였다. '아시아인'의 피부색이나 따졌던 화이트 오스카에 대한 진짜 퍼포먼스였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통해 온몸으로 예술 행위를 펼쳤다.
백인이 아니어도, 주류가 아니어도 미국 백인 사회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봉 감독이 한 일은 예술 자체였다. 봉 감독의 오스카 혁명은 그야말로 '발칙한 상상'의 승리였다. 핵심은 '상상하라, 도전하라, 소통하라'다. 오스카를 뒤집은 봉 감독의 정신을 잇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과제다. 특히 유독 '고립된 섬'을 자처하는 한국 정치의 해묵은 숙제다.
◆韓 영화 로컬 극복··· 與野 '블랙코미디' 자처
'변화와 고립', '로컬 탈피와 진영 논리'···. 극과 극이다. 전자는 오스카 혁명의 메시지다. 후자는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사실 그랬다. 변하고 있었다. 우리만 우물 안 개구리로 생각했을 뿐이다. '인종 색에 의한 타율적 기제'만 작동할 것 같았던 오스카조차 시나브로 진화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제 더는 로컬 영화제가 아니다.
한국 정치는 정반대다.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은 여전히 기성의 관념을 추종한다. 타성을 스스로 극복하는 자기제어 시스템은 고장난 지 오래다.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은 '힘에 의한' 타율적 기제다. 다른 하나는 블랙 코미디다. 봉준호 감독이 블랙 코미디 연출을 통해 한국 사회를 고발했다면, 정치권은 블랙 코미디언을 자청해 권력욕을 끊임없이 좇는다.
먼저 청와대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이다. 하지만 2017년 5월 9일 이후 '청와대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통치 방식을 드러내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권력은 청와대에 있다'다. 내각과 정당의 모든 힘은 청와대로 집중된다. 정권 초반 "문 대통령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같은 퇴행적 정치 행태는 진보와 보수 등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 박정희 군부통치의 상징이었던 '청와대 정부'는 87년 체제 이후 출범한 김영삼(YS)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대통령은 만기친람식 리더십에 빠진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검찰을 동원한다. 사실상 '유사 군주정'을 이끄는 수장에 불과한 셈이다. 국무총리는 헌법이 명시한 책임총리제 구현은커녕 '무늬만 총리', '얼굴마담'에 그친다.
여의도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여당은 대통령의 오더만 기다린다. 야당은 '묻지마 식 반대'만 일삼는다. 여·야·정 협치는 없다.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총선)를 앞두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통과되자 위성 정당까지 만드는, 한국 정치 역사상 전무후무한 블랙 코미디까지 연출했다.
◆봉준호가 고발한 계급사회··· 이면엔 남북분단
정치 기능의 상실은 사회 전체로 보면 악의 축이다. 영화 '기생충'이 고발한 한국의 '계급사회'가 까발려지기만 한 채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화 '기생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 의식주 중 하나인 '집'이라는 공간을 반지하에 투영, 자본주의 모순을 꼬집었다.
특히 반지하는 자본주의 계급뿐 아니라 '남북 갈등의 얼굴'이다. 분기점은 1968년에 발발한 '1·21사태'였다. 북한은 그해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벌였다. 이에 맞서 중앙정보부가 창설한 것이 '실미도 부대'다. 강우석 감독은 2003년 영화 '실미도'를 통해 남북 분단의 특수성을 고발했다.
1·21사태 후 남북 긴장이 고조되자, 정부는 1970년 건축법을 개정해 모든 신축 저층 아파트에 지하실을 만들었다. 국가 비상사태 때 벙커로 사용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이 벙커에 거주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1980년대 주택 위기 국면에서 이를 합법화했다. 지하 벙커를 '집값 잡기용'으로 쓴 셈이다. 1990년대 들어 한국 사회를 작동한 큰 기제 중 하나는 '강남 불패 신화'였다. 현 정부 출범 이후에는 이 불패 신화가 서울 전역과 수도권 신도시 등으로 확산했다.
이는 옆집 얘기가 아니다. 나의 모습이자,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다. 내 친구의 모습이기도 하고 내 자식의 미래이기도 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우리네 '과거·현재·미래'가 절묘하게 투영됐다. 끊임없이 새로운 신분질서를 만드는 인간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들쑤셨다. 이 갭을 좁힐 의무가 있는 정치권은 지금 어디에 있나. 무엇을 하고 있나.
이 이상의 블랙 코미디는 없다. 청와대에, 여의도에 블랙 코미디 연기를 직업으로 삼는 정치인들이 널려 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아티스트다. 계급사회와 남북 분단의 슬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먹거리 찾기'에 여념이 없는, 한 편의 쇼를 하는 진짜 배우다. 영화 제목은 '더 악한 기생충'. 일년 365일·하루 24시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블랙 코미디를 연출하는 이들도 오스카 혁명을 일으킬지 두고 볼 일이다.
세계가 깜짝 놀랐다. 자본주의 심장을 찌른 영화 '기생충'이 거대한 문화장벽을 허물었다. 92년간 지속된 백인 중심의 '화이트 오스카'가 산산이 부서졌다. '영화'라는 공통의 언어로 유리천장보다 높았던 '아시아·비주류·소수자'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에서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각본상·국제극영화상(구 외국어영화상) 등 4관왕의 쾌거를 이룬 영화 기생충은 파격 그 자체였다. '아시아인'의 피부색이나 따졌던 화이트 오스카에 대한 진짜 퍼포먼스였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통해 온몸으로 예술 행위를 펼쳤다.
백인이 아니어도, 주류가 아니어도 미국 백인 사회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봉 감독이 한 일은 예술 자체였다. 봉 감독의 오스카 혁명은 그야말로 '발칙한 상상'의 승리였다. 핵심은 '상상하라, 도전하라, 소통하라'다. 오스카를 뒤집은 봉 감독의 정신을 잇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과제다. 특히 유독 '고립된 섬'을 자처하는 한국 정치의 해묵은 숙제다.
◆韓 영화 로컬 극복··· 與野 '블랙코미디' 자처
'변화와 고립', '로컬 탈피와 진영 논리'···. 극과 극이다. 전자는 오스카 혁명의 메시지다. 후자는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사실 그랬다. 변하고 있었다. 우리만 우물 안 개구리로 생각했을 뿐이다. '인종 색에 의한 타율적 기제'만 작동할 것 같았던 오스카조차 시나브로 진화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제 더는 로컬 영화제가 아니다.
한국 정치는 정반대다.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은 여전히 기성의 관념을 추종한다. 타성을 스스로 극복하는 자기제어 시스템은 고장난 지 오래다.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은 '힘에 의한' 타율적 기제다. 다른 하나는 블랙 코미디다. 봉준호 감독이 블랙 코미디 연출을 통해 한국 사회를 고발했다면, 정치권은 블랙 코미디언을 자청해 권력욕을 끊임없이 좇는다.
먼저 청와대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이다. 하지만 2017년 5월 9일 이후 '청와대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통치 방식을 드러내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권력은 청와대에 있다'다. 내각과 정당의 모든 힘은 청와대로 집중된다. 정권 초반 "문 대통령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같은 퇴행적 정치 행태는 진보와 보수 등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 박정희 군부통치의 상징이었던 '청와대 정부'는 87년 체제 이후 출범한 김영삼(YS)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대통령은 만기친람식 리더십에 빠진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검찰을 동원한다. 사실상 '유사 군주정'을 이끄는 수장에 불과한 셈이다. 국무총리는 헌법이 명시한 책임총리제 구현은커녕 '무늬만 총리', '얼굴마담'에 그친다.
여의도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여당은 대통령의 오더만 기다린다. 야당은 '묻지마 식 반대'만 일삼는다. 여·야·정 협치는 없다.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총선)를 앞두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통과되자 위성 정당까지 만드는, 한국 정치 역사상 전무후무한 블랙 코미디까지 연출했다.
◆봉준호가 고발한 계급사회··· 이면엔 남북분단
정치 기능의 상실은 사회 전체로 보면 악의 축이다. 영화 '기생충'이 고발한 한국의 '계급사회'가 까발려지기만 한 채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화 '기생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 의식주 중 하나인 '집'이라는 공간을 반지하에 투영, 자본주의 모순을 꼬집었다.
특히 반지하는 자본주의 계급뿐 아니라 '남북 갈등의 얼굴'이다. 분기점은 1968년에 발발한 '1·21사태'였다. 북한은 그해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벌였다. 이에 맞서 중앙정보부가 창설한 것이 '실미도 부대'다. 강우석 감독은 2003년 영화 '실미도'를 통해 남북 분단의 특수성을 고발했다.
1·21사태 후 남북 긴장이 고조되자, 정부는 1970년 건축법을 개정해 모든 신축 저층 아파트에 지하실을 만들었다. 국가 비상사태 때 벙커로 사용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이 벙커에 거주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1980년대 주택 위기 국면에서 이를 합법화했다. 지하 벙커를 '집값 잡기용'으로 쓴 셈이다. 1990년대 들어 한국 사회를 작동한 큰 기제 중 하나는 '강남 불패 신화'였다. 현 정부 출범 이후에는 이 불패 신화가 서울 전역과 수도권 신도시 등으로 확산했다.
이는 옆집 얘기가 아니다. 나의 모습이자,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다. 내 친구의 모습이기도 하고 내 자식의 미래이기도 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우리네 '과거·현재·미래'가 절묘하게 투영됐다. 끊임없이 새로운 신분질서를 만드는 인간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들쑤셨다. 이 갭을 좁힐 의무가 있는 정치권은 지금 어디에 있나. 무엇을 하고 있나.
이 이상의 블랙 코미디는 없다. 청와대에, 여의도에 블랙 코미디 연기를 직업으로 삼는 정치인들이 널려 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아티스트다. 계급사회와 남북 분단의 슬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먹거리 찾기'에 여념이 없는, 한 편의 쇼를 하는 진짜 배우다. 영화 제목은 '더 악한 기생충'. 일년 365일·하루 24시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블랙 코미디를 연출하는 이들도 오스카 혁명을 일으킬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