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나이 듦의 본질과 의미

2020-01-27 13:29
박상철의 100투더퓨처 (19)

[박상철 교수]



<100 to the future> 필자 박상철 교수 =이제 120세 시대로 나아가는 지금. 노화(老化) 연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박상철 교수의 ‘100 to the future(백, 투더퓨처)’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박 교수는 서울대 의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30년간 서울대 의대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전남대 연구석좌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노화 분야 국제학술지 ‘노화의 원리’에서 동양인 최초 편집인을 지냈고 국제 백세인연구단 의장, 국제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노화 연구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노화이론을 세운 그의 논문은 과학저널 ‘네이처’지에 소개됐습니다.

<100 to the future>는 100세까지 보편적으로 사는 미래에 대비하자는 의미로, 영화 '백투더퓨처'의 미래 귀환 뉘앙스를 차용한 시리즈 제목입니다. 이제 우리는 100세 시대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앞당겨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그 길어진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건강하고 풍요로운 내일에 대해 실감나게 짚어나갈 계획입니다.<편집자주>



백세시대 나이 듦의 본질과 의미


다사다난했던 지난해를 뒤로하고 새해 경자년(庚子年)을 맞이했다.  항상 되풀이되는 일상의 일이지만 해가 넘어가는 고비에 서면 우리는 지난날을 되새겨 보며 다가올 날을 기대해 본다. 이러한 해넘이가 거듭되면 결국 사람은 오래 살게 되고 언젠가 100세 장수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항간에 이런 말이 돈다. “장수를 하려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불로초나 단약을 상상하기도 하고 특정한 곳에서 자란 특별한 식품을 지목하기도 하지만 정작 질문을 던진 사람이 의도한 정답은 '나이'이다. 한 살 더, 한 살 더, 그래서 끝없이 나이를 먹으면 장수하게 된다는 유머이지만 매우 실감나는 표현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는 것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사랑하는 인간인 티토노스를 제우스에게 부탁하여 불멸의 존재인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이도 죽지 않도록 부탁하여 뜻을 이루었지만 결국 티토노스는 늙어버려 그를 버리고 떠났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는 늙음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죽지 않고 장수하면 결국 늙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영어 ‘aging’을 번역할 때 보통 늙음 또는 노화로 번역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나이 듦’이다. 나이 듦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람’과 ‘늙음’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좋아지고 더 커지고 더 많아져 가면 자란다고 하며, 반면 나이가 들수록 더 나빠지고 더 작아지고 더 줄어들면 늙는다고 한다. 그래서 10대 20대에는 한 살 더 먹으면 자랐다고 하고, 70대 80대에는 한 살 더 먹으면 늙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몇 살까지는 자람이고, 몇 살부터는 늙음이 되는가? 그 구분을 짓는 특정한 나이가 있는가?

사무엘 울만의 유명한 '청춘'이라는 시의 귀절들을 읽으며 질문에 대한 단서를 찾아본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그대와 나의 가슴속에는 이심전심의 안테나가 있어/ 사람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바로 그것이다. 자람과 늙음을 결정짓는 것이 숫자적 변화의 나이가 아니다. 외모에 비치는 형태적 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에 깃든 마음의 상태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표현이다. 끊임없는 꿈을 가지고 새로움을 찾아 도전한다면 자람은 지속된다. 팔십이 넘어도 구십이 넘어도 백 살이 되어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배우려는 분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람이 연속되는 젊음을 칭송하게 된다.

122세라는 세계 최장수인기록을 가진 장 칼망은 여든살이 되었을 때 펜싱을 시작하고 백살에도 자전거를 타서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한 기록을 세웠다. 생물학적 나이가 무의미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생애를 살펴보면 자람의 시기에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노력을 열심히 기울여 왔지만, 늙음의 시기에는 자신의 선택을 포기하고 피동적으로 밀려나 버렸다고 본다. 따라서 자람과 늙음의 본질적 차이는 선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선택은 삶의 갈림길에서 과감하게 자신이 가진 꿈과 이성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열정을 통해 구현된다. 선택은 도전이며 젊음과 자람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의학계의 거목인 권이혁 교수님이 지난해 어느 심포지엄에서 당신이 국가사회에 다양하게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고 반성하면서 청중들에게 호소하였다. “내 나이 이제 95살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여 새롭게 기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새롭게 시작합시다”라고 갈파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백세 가까이 되었어도 새로운 출발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대가의 모습은 영원한 청춘을 보여주었다. 눈앞에 닥쳐진 엄정한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한 선택을 통하여 대응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당당하게 지겠다는 자세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자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늙는 것이 아니라 자라고 있게 된다.

실제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좋아지고 훌륭해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기에,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면 노련하다고 하였고, 멋진 리더십을 발현하면 노숙하다고 칭송하였다. 그래서 노형, 장로, 노대가 등은 존칭의 대표였다. 그런데 어느덧 청춘 문화가 범람하고 기계 문명에 의한 이기가 등장하면서 나이가 들면 노둔(老鈍)이 되고, 노쇠, 노약이 되어버렸다. 왜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렀을까 반성해볼 때가 되었다. 혹시 나이 들었다고 스스로 제풀에 기가 죽어 기피하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백세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에게 나이 듦이 끝없는 자람으로 이어지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우리에게 부여된 삶이 거룩한 만큼 우리가 스스로 나이 듦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지켜 가야 한다. 성경에도 “백발은 영화로운 면류관이니, 의로운 길을 걸어야 그것을 얻는다”(잠언 16: 31)라고 하였다. 올바른 삶으로 얻어진 늙음은 영예로운 왕관임을 지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이든 사람들이 스스로 당당하게 나이 탓하지 말고, 남의 탓하지 말고, ‘하자’ ‘주자’ ‘배우자’의 의지로 자신을 책임지는 노인 독립 운동을 추구하여야겠다.

고령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해 가는 시점에 이르러 이제는 노인의 위상과 사회적 책임을 재검토하고 새롭게 조명하여야 할 때이다. 더 이상 단순 수명 연장의 시대가 아니고, 진정한 ‘기능적 장수(Functional Longevity)’를 추구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기능적 장수와 노인 독립 운동은 바로 동전의 앞뒤와 같다. 백세시대의 나이 듦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새겨보면서, 한 해가 지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며 한살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보다 더 멋지고 보다 더 뜻깊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