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中증시 '불사조 신화' 끝이 보인다
2020-01-16 02:00
지난해 A주 상장폐지 최대, 올해도 엇비슷
경영난 지속에 당국도 한계기업 퇴출 강화
美등과 격차 지나쳐, 증시 선진화 긍정론도
경영난 지속에 당국도 한계기업 퇴출 강화
美등과 격차 지나쳐, 증시 선진화 긍정론도
지난해 중국 증시에서 역대 최대인 18개 상장사가 퇴출됐다.
연간 상장 폐지되는 곳이 5~6개에 불과하거나, 퇴출 상장사가 전무했던 해도 부지기수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상황이다.
미·중 갈등 심화와 경기 하방 압력 고조로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악화된 게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거론된다.
중국의 경제 상황이 여전히 녹록지 않다는 방증이다. 여기에 증권 당국은 한계 기업 퇴출을 위해 상장 폐지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불사조'로 불렸던 중국 상장사의 퇴출이 일상화되는 시대로 진입했다는 우려와 함께 증시 선진화 과정의 일환이라는 긍정론이 공존한다.
15일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증감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상장 폐지가 된 A주(상하이·선전 증시에 상장된 내국인 전용 주식) 상장사는 총 18개로 집계됐다.
9곳이 강제로 퇴출됐고, 1곳은 스스로 상장 폐지를 신청했다. 나머지 8곳은 인수합병이나 자산 청산 등의 방식으로 증시에서 모습을 감췄다.
실적 악화가 퇴출의 가장 큰 원인이다. 중국 최초의 통신장비 제조업체 중 한 곳인 상하이푸톈(上海普天)이나 금속·화학제품 제조업체인 화쩌구녜(華澤鈷鎳) 등은 지속적인 업황·실적 악화로 상장이 폐지됐다.
시가총액 300억 위안(약 5조원)에 달했던 양돈기업 추잉눙무(雛鷹農牧)는 1년 넘게 중국을 휩쓴 아프리카돼지열병(ASF)으로 직격탄을 맞고 퇴출됐다.
실적과 무관하게 중대한 위법 행위를 저질러 쫓겨난 사례도 있다. 2018년 중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짜 백신' 파동의 주인공 창성바이오(長生生物)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무더기 상장 폐지 조치가 이뤄지면서 투자자들은 긴장하고 있다. 근래 본 적 없는 상황인 탓이다.
2001년부터 2018년까지 퇴출 상장사는 58개에 불과했다. 2009~2012년에는 상장 폐지된 기업이 한 곳도 없었다.
이 기간 누적 상장폐지율은 1.9%, 연 평균 0.12% 수준이었다. 내국인 및 허가를 받은 해외투자자(QFII)만 거래할 수 있는 A주가 '불사조'로 불리게 된 이유다.
우샤오추(吳曉求) 인민대 금융·증권연구소 소장은 "중국의 상장 폐지 제도는 여전히 낙후해 있고 효율성도 낮다"고 평가했다.
2001~2007년은 당국의 시장 감독 강화로 상장 폐지 사례가 증가하다가 2008~2012년 지방정부의 증시 투자가 늘면서 퇴출 규모가 급감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또 2016~2017년에는 투자자 보호 강화가 주요 화두로 떠오르면서 투자자에게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상장 폐지 조치에 소극적이었다는 의견도 내놨다.
◆올해도 녹록지 않다, 줄줄이 대기
올해 중국 경제는 희망을 안고 출발했다.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던 미·중 무역협상이 드디어 1단계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의 대중 관세 일부가 완화·유예되면서 시장 심리가 호전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미국 재무부가 중국에 대한 환율조작국 지정을 해제했다. 중국 경제를 짓눌러 왔던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지난해부터 지속된 기업들의 실적 악화 기조가 단기간 내에 반전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중국의 금융정보 제공업체인 윈드(Wind)가 이미 지난해 실적을 발표한 상장사 629개를 분석한 결과 적자 및 손실을 기록한 곳이 171개로 27.2%에 달했다.
상장사 3분의 1 정도가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벌써 12개 정도의 상장사가 퇴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중국판 유튜브 혹은 넷플릭스로 불렸던 러스왕(樂視網)은 문어발식 확장에 따른 자금난을 겪으며 주식 거래가 잠정 중단된 상태다. 연내 상장 폐지가 유력하다.
퇴출 후보군의 업종을 살펴보면 제조설비·물류·소비재·자동차 부품 등이 대부분이다.
제조업이 쇠퇴하고 내수가 위축되는 추세를 되돌리지 못할 경우 상장 폐지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장창(張强) 후이옌후이위(匯硏匯語)자산운용사 대표는 중국 경제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와 같이 궁지에 몰렸다가 기사회생하는 사례는 갈수록 보기 힘들어질 것"이라며 "강한 자가 이기고 약한 자는 도태하는 흐름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상장폐지율 20배 격차, 당국도 칼 빼들어
중국 A주의 상장 폐지 비율은 다른 국가 증시와 비교할 때 기형적으로 낮다. 허위 공시와 회계 조작, 배임·횡령 등 위법 행위가 드러나도 좀처럼 퇴출되지 않는다.
최근의 통계를 들여다보자. 2010~2018년 상장 폐지된 곳은 연평균 3.9개 수준인 데 반해 연평균 신규 상장사는 211개였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 증시의 경우 매년 퇴출 상장사와 신규 상장사 비중이 거의 같다.
지난해 6월 기준 상장된 A주는 3632개, 상장 폐지된 곳이 18개였으니 연간 상장 폐지율은 0.5% 정도다.
이는 뉴욕증권거래소(6%)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나스닥(12%)과는 24배나 차이가 난다.
중국 증권 당국은 상장도 어렵고 퇴출도 어려워 고인 물이 된 증시 개혁에 나섰다.
우선 증시 진입 장벽을 대폭 낮췄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지난해 말 증권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오는 3월부터 시행키로 했다.
증권 발행 등록제를 도입해 기업공개(IPO) 절차를 간소화한 것이 핵심이다. 기존에는 신주를 발행할 때 증감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지만 앞으로는 일정한 심사만 거치면 등록이 가능해진다.
청허훙(程合紅) 증감회 법률부 주임은 "IPO 등록제에 대해 체계적인 규정을 만든 것이 특징"이라며 "증감회가 직접 심사하지 않고 각 거래소 규정에 따라 심사가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대신 퇴출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후이만(易會滿) 증감회 주석은 지난해 5월 열린 상장사협회 연차 총회 연설에서 "혁신적인 방식을 모색해 다양한 형태의 상장 폐지 채널을 만들겠다"며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퇴출 기준에 근접한 좀비 기업과 껍데기 상장사의 퇴출을 촉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증권법 개정안의 경우도 '거래 정지'라는 표현을 대폭 삭제했다. 퇴출 경고-거래 정지-상장 폐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거래 정지 구간을 축소해 퇴출 절차를 신속히 진행하겠다는 의도다.
천리(陳靂) 촨차이증권 연구소장은 "상장 폐지율은 현저히 빨라지고 있으며 시장 선택권을 두드러지게 할 것"이라며 "관리·감독 체계가 개혁되고 투자자들이 이성을 되찾는다면 중장기적으로 자본시장의 질적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