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동방의 베네치아' 쑤저우의 변신

2019-11-07 08:45
'古都' 이미지 벗고 첨단산업 육성 박차
제조·서비스·관광 황금 비율 도시 도약

베이위밍이 생전 마지막으로 설계했던 쑤저우 박물관 전경. [그래픽=이재호 기자]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

장쑤성 쑤저우와 저장성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과 풍요로운 생활 환경에 대한 비유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특히 쑤저우는 도시 곳곳에 하천이 흐르고 호수가 많아 '동방의 베네치아'로 불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쑤저우가 관광·여행 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중국 주요 도시 중 국내총생산(GDP) 순위 7위를 기록할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발달한 곳이다.

석유화학·제련 등 전통 제조업으로 시작해 전자·정보기술(IT) 등 첨단 제조업으로 영역을 확대해 왔다.

최근에는 2차산업(제조업)과 3차산업(서비스업)이 결합된 새로운 발전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쑤저우의 풍부한 역사·문화 콘텐츠가 적극 활용되는 추세다.

쑤저우의 실험이 성공을 거둔다면 우리는 제조업과 서비스업, 관광업이 황금 비율을 이룬 이상적인 경제 구조의 미래형 중국 도시를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성공단 벤치마킹 대상 '쑤저우 모델'

'고소성 밖 한산사,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배에 들려오네(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라는 구절로 유명한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시 '풍교야박(楓橋夜泊)'에 등장하는 한산사를 비롯해 쑤저우에는 유명한 문화 유적이 많다.

중국 4대 정원으로 꼽히는 졸정원(拙政園)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수상 도시답게 시내 곳곳을 흐르는 하천 주변으로 다양한 유적이 산재해 있다.

고도(古都) 이미지가 강한 쑤저우가 중국을 대표하는 공업 도시라고 하면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

지난해 쑤저우의 GDP 규모는 1조8597억 위안으로 중국 도시 가운데 상하이·베이징·선전·광저우·충칭·톈진에 이어 7위에 올랐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도 7위를 기록했다.

성급 지방정부 중 경제 규모가 광둥성에 이어 2위인 장쑤성 내에서 쑤저우가 차지하는 비중은 독보적이다.

지난해 쑤저우의 수출액은 2068억 달러로 장쑤성 전체 수출액의 절반에 달했다. 수입액은 1473억 달러로 전체의 57% 수준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뒤 방직업과 플라스틱 생산 등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온 쑤저우는 1990년대 들어 대규모 외자 유치에 성공하며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리콴유(李光耀) 총리 당시인 1994년 싱가포르와 합작으로 쑤저우공업원구(工業園區)를 탄생시켰다.

싱가포르의 화교 자본을 받아들인 데 이어 추가 외자 유치를 위해 공업원구의 인프라·물류·사회보험·채용 시스템도 싱가포르 식을 도입했다.

경기도보다 조금 작은 288㎢ 면적의 쑤저우공업원구에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이곳에 입주한 외자 기업은 5000개 이상이다.

2013년 남북이 개성공단 정상화에 합의하면서 쑤저우공업원구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언급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자본주의 국가(싱가포르·한국)와 사회주의 국가(중국·북한) 간의 합작 모델이라는 유사점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자국 기업과 외자 기업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쑤저우공업원구와 달리 개성공단은 단 한 곳의 북한 기업도 입주하지 않은 반쪽 공단인 탓에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쑤저우에 본사를 둔 AI 전문기업 고와일드 사옥 전경(위)과 AI 스피커 제품(아래). [사진=이재호 기자 ]


◆AI 등 첨단 분야로 체질 개선 중

쑤저우 구쑤(姑蘇)구에 본사를 둔 인공지능(AI) 전문기업 고와일드(Gowild)가 개발한 AI 스피커 후포(琥珀)는 중국 젊은 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음악 선곡과 날씨 등 간단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용자와 대화가 가능한 정도의 기존 AI 스피커와 달리 고와일드의 제품은 '후포'라는 여성 AI 캐릭터와 다양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안면·음성 인식으로 사용자 인증이 완료되면 스피커에 탑재된 3D 입체 모니터에 후포가 등장한다. 사용자가 원하면 아이돌 가수의 춤을 따라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본사에서 만난 고와일드 관계자는 "후포 캐릭터를 좋아하는 팬들이 자발적으로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며 "후포 코스프레를 하고 행사에 참가하는 사용자도 있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이 업체는 높아진 인지도를 바탕으로 사물인터넷(IoT) 시장에도 진출했다. 가정과 사무실 내 대부분의 가전 및 IT 기기를 AI 기술로 제어할 수 있는 솔루션을 출시했다.

뤼디(綠地) 등 대형 부동산 개발 업체가 건설하는 아파트나 사무용 빌딩에 납품하고 있다. IT 허브인 선전에 제조 기지, 우수 인재가 모이는 상하이에 연구개발(R&D) 기지를 추가 설립할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르다.

고와일드의 사례를 통해 첨단산업 중심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하려는 쑤저우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개혁·개방 이후 방직·야금 산업에 주력하던 쑤저우는 공업원구 설립 후 가전·PC·액정표시장치(LCD) 등으로 주력 산업 전환을 꾀했다. 삼성전자는 쑤저우에서 가전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 공장을 운영 중이다.

최근에는 친환경 고부가가치 분야를 육성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쑤저우 인민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신재생에너지 차량 생산량은 전년보다 83% 증가했다. 3D 프린터와 공업용 로봇 생산량은 각각 51.4%와 32.2%의 증가율을 보였다.

쑤저우는 내년 3월 처음으로 국제 공업 자동화 및 로봇 박람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쑤저우 정부는 경공업과 석유화학, 건자재, 철강을 점진적으로 퇴출시켜야 할 업종으로 분류했다. 제철·제강·합금주철·압연가공 등에 대한 투자 유치는 아예 금지했다.

쑤저우 구쑤구 인민정부 청사에서 만난 주젠춘(朱建春) 선전부장은 "쑤저우의 당면 과제는 여전히 '발전'이지만 더 이상 전통 제조업에 의존하지 않는다"며 "경제 구조 업그레이드를 위해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옛 공장 및 창고를 개조해 영상·문화·패션 단지로 탈바꿈한 블루파크(위)와 블루파크 내에 입주한 유명 커피숍(아래). [사진=이재호 기자 ]


◆콘텐츠·디자인 결합 문화산업 중흥

쑤저우 구시가지에 해당하는 구쑤구 중심부에 1970년대부터 공장과 창고 등으로 사용된 2만6000㎡ 면적의 부지가 있다.

이곳을 사용하던 기업들이 공업원구로 이전하면서 흉물스럽게 방치돼 온 오래된 건물들이 최근 영화·드라마 세트와 영상 스튜디오, 커피숍 등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문을 연 블루파크(藍園)에 대한 얘기다. 부동산 임대업체인 우중(吳中)그룹은 부지와 건물을 사들여 개조한 뒤 영상·문화·패션 등 분야의 기업에 임대하고 있다.

블루파크의 콘셉트는 과거 공단 부지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작은 갤러리들을 열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명소가 된 베이징 798예술구와 닮았다.

블루파크에 입주한 영화 제작사 정제(正杰)영화문화미디어의 딩정제(丁正杰) 대표는 "촬영 세트와 스튜디오, 카메라 등을 대여하는 업체 등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 보니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기업 광고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쑤잉탕(蘇影堂)의 판잉치(潘鶯琦) 홍보 책임자는 "쑤저우는 아름다운 풍광과 문화 유적이 많아 그 자체로 거대한 촬영 세트와 같다"며 "콘텐츠 사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제조업에 강점을 지닌 쑤저우는 스스로의 강점을 활용해 문화·콘텐츠·디자인이 결합된 서비스 산업을 키우는 데 힘을 쏟는 중이다.

지난해 고정자산투자 4556억 위안 중 서비스업 비중이 75%에 달할 정도로 활발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베이위밍(貝聿銘·이오밍페이)을 앞세운 도시 마케팅 전략도 눈길을 끈다. 문화 산업 부흥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와 미국 존 F 케네디 도서관, 홍콩 중국은행 타워 등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베이위밍은 '최후의 모더니즘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모더니즘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쑤저우 박물관은 지난 5월 타계한 베이위밍이 마지막으로 설계한 작품이다.

쑤저우에는 베이위밍의 조부가 거주했던 고택(古宅)이 있다. 현재는 '여우슝(有熊)'이라는 호텔 겸 갤러리로 개조됐다. 베이위밍의 흔적을 찾으려는 투숙객 혹은 관람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주젠춘 선전부장은 "쑤저우는 각 산업 간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한다"며 "수많은 역사·문화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 게 우리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2500년이 넘는 역사의) 쑤저우를 '동방의 베네치아'로 부를 게 아니라 베네치아를 '유럽의 쑤저우'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