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4)오산학교에 신앙을 심었지만 나는 부끄럽다

2020-01-15 10:55
이승훈평전을 쓴 류영모…"그는 '톨스토이'급 성자였다"

[이승훈]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

오산학교의 풍경 하나가 잊히지 않는다.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이 주로 한 일은 학생들과 함께 화장실 청소하기였다. 그는 고아로 자라났고, 어린 시절 기식(寄食)하던 유기공장 사장집에서 방청소, 요강 비우기와 같은 궂은 일을 밥먹듯이 했다. 정식으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장사꾼 출신이었다. 나라가 기울어져 가던 1907년 나이 45세에 29세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는 영혼에 벼락이 친 듯 충격을 받았다. "지금 깨달아 힘쓰지 않으면 망국을 대체 누가 막겠는가?" 나지막한 이 소리는 이승훈을 사로잡았다.

강연이 끝나자 바로 안창호에게 뛰어가 "나는 이제부터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외쳤다. 이튿날 안창호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이승훈은 오산에 학교를 세울 것을 약속했다. 이에 안창호도 평양에 학교를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학교를 세운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깨달아 힘쓰는 것'이며, 망국을 막아내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반평생을 어린 날의 설움을 만회하는 데에 썼던 이승훈은 문득 자신이 해야 할 필생의 과업을 깨달았다.

학교를 세우는 일은 자신의 위신을 세우고 권력을 키우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안창호가 말한 것, '지금 깨달아 힘쓰게 하는 일'로 망국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어린 시절 서당을 잠깐 다닌 것 외에 제대로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지만, 그가 세운 학교에서 나라의 희망이 자라나도록 하고 싶었다.

교장을 맡지도 않았고, 설립자라는 타이틀도 가지지 않았다. 그냥 학교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돕는 사람이었다. 화장실을 청소하는 이승훈은 남에게 보여주려 궂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자신이 잘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었다. 안창호가 말한 바로 그 일을 있는 힘을 다해 하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 소설의 '섬기는 리더'

헤르만 헤세의 '동방여행'이란 소설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순례자들이 긴 대열을 이뤄 동방국가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갑자기 대혼란이 일어났다. 음식은 상하고 보급은 끊겼고 사람들은 싸우고 줄을 이탈했으며 취침 중에 도난과 방화가 발생했고 심지어 말과 낙타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까지 한다.

지금껏 오는 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는가. 지도자들이 뭐가 달라졌는지 알아보니 유난히 말이 없던 '노예' 하나가 빠진 것밖에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노예야말로 말없이 일해온 그 행렬의 숨은 리더였음을 알게 된다. 가만히 궂은 일을 하면서 집단의 모든 것이 돌아갈 수 있도록 애를 써온 것이다.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었고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길잡이였다. '공기'와도 같이 보이지 않던 그가 사라지자 여행은 엉망이 됐고 순례자들은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 노예는 누구인가. 레오라는 이름의 이 노예는 '예수'를 연상시킨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위해 애쓰고 헌신하는 존재. 오산학교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이승훈은 바로 저 놀라운 레오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류영모를 찾아내 스카우트를 한 것도 이승훈이 아니었던가. 안창호를 만나서 할 일을 논의할 때, 이승훈은 신민회 평안북도 책임자인 총감을 맡기로 했다. 여준, 신채호, 윤기섭과 같은 뛰어난 사람들이 오산학교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다.

오산학교를 세울 무렵만 해도, 이승훈은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류영모 선생이 온 뒤 이승훈은 이상한 장면을 발견했다. 교사 류영모는 부임한 첫날,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학생들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하고는 다 같이 기도하자고 말했다. 학생들은 뜻밖의 요청에 어리둥절했다. 멀뚱멀뚱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다가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류영모는 혼자서 기도를 했다.

이렇게 한 지 일주일 만에 학생들은 선생의 말에 따라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게 된다. 수업시간에 보여준 학문의 깊이에 감복한 학생들이 선생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를 함께 하면서 학생들의 태도가 달라져갔다. 이것을 지켜본 이승훈은 몹시 놀랐다. 학문과 신앙을 함께 가르치는 것의 힘을 보았다.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기독교 성경연구회가 있었다는 걸, 이승훈은 문득 기억해낸다. 아, 이것이었구나.  류영모의 기도는 그에게 신앙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다. 


류영모에게서 신앙의 힘을 발견하다

이승훈은 평양에서 유명한 산정현교회의 한석진 목사를 찾아갔다. 한 목사는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의 설교를 했다. 설교를 듣고 난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겠다고 말했다. 이승훈은 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라 골고다 언덕을 오르겠다고 다짐했다. 1910년 12월,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온 지 석달째였고 나라가 망한 지 넉달째였다.

산정현교회를 나온 그는 정주의 오산학교에 돌아오자마자 교직원과 학생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저는 기독교를 믿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오산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배움의 지표로 삼겠습니다. " 개교한 지 3년 만이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바꿨다. 교실을 예배장소로 썼다. 정주에는 교회가 없었기에 목사도 없었다. 교사 류영모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했다. 나중에 이광수도 예배와 설교를 이끌었다. 이광수는 톨스토이 통일복음서를 가지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 당시 류영모의 요한복음 강의는 오산학교의 레전드로 전해 내려온다.

이후 이승훈은 학교에 교회를 짓는다. 학생들이 나서서 나무를 베고 날라 두달 만에 완공했다. 그가 이토록 신앙 정립(定立)에 서둘렀던 것은 닥쳐올 시련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기독신자가 된 지 석달 되던 때, 그는 수색역 부근 서울행 기차 안에서 일본 헌병과 경찰의 합동 검문에 체포된다. 이승훈의 수첩에서 안중근의 사촌동생(안명근) 명함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안명근은 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모으다가 1910년 12월에 이미 체포되어 수감 중이었다. 안명근 체포 이후 김구, 김홍양, 이승길, 김용재, 최명식, 도인권과 함께 이승훈도 구속된 것이다. 이때 2년간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다.

감옥에서 더 싱싱하고 당당해지는 사람

제주도 유배형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다.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 죄목이었다. 이것은 아카시 경무총감이 날조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훈은 10년형을 언도받았다. 1915년 2월 가출옥할 때까지 5년간 옥살이를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년 뒤인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4년간 다시 감옥생활을 한다. 그가 나온 것은 1922년 7월이었고, 33인 중에서도 맨 마지막 출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감옥이란, 옥중에서도 지옥이었다.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감옥에서 여러 질병을 앓으며 죽어갔다. 그런데 이승훈은 희한했다. 옥고를 치를수록 더 싱싱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천부의 체력이 있었고, 인고의 생애가 있었고, 뜨거운 애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이토록 강고(強固)하게 만든 것은 불굴의 신앙이었다. 꺾으면 꺾을수록 새롭게 솟아오르는 정신의 탄력 같은 것이었다.

이승훈은 감방에서도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하고 날이 밝으면 성경을 읽었다. 간수들이 시키는 노끈꼬기와 봉투붙이기도 열심이었다. 감방청소도 스스로 도맡았다. 어렸을 때 사장네 방청소를 하는 것만큼 정성들여 닦고 또 닦았다. 게다가 늘 옥살이 하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때, 감옥에서 나는 오히려 깊은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지요. 여섯 사람이 있었는데, 기독교에 입문한 시기가 가장 늦었던 게 나였지요. 그런데도 성경에 나만큼 위로받은 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감옥이 괴롭다는 생각이 사라졌어요. 젊은이들도 싫어하는 감방의 똥청소를, 내가 자진해서 했습니다. 손으로 똥을 만지면서 기도를 했지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이 감옥에서 나가는 날 이 땅의 백성을 위해 똥통 청소하기를 잊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렇게 말입니다. 감옥이란 참 이상한 데예요. 강철같이 강해져서 나오는 이도 있고, 겨릅대(껍질을 벗겨낸 삼대)같이 푹 약해져서 나오는 이도 있어요." 이승훈은 감옥에서 구약성경을 20독 했고 신약성경을 100독 하였다고 한다.

1915년 평양신학교에 들어간 이승훈은 세 학기 동안 신학공부를 했다. 그때가 51세였다. 이듬해 장로가 된 이승훈은 교회를 대표해 평안북도 노회에 참석했고 노회의 대표로 평양과 서울의 장로교 총회에도 나갔다. 이런 인연으로 기미년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의 한 사람이 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된 뒤 서명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자기 종교의 대표가 맨 앞에 나와야 한다고 서로 주장했다. 그때 이승훈이 큰소리로 말했다. "순서는 무슨 순서입니까. 그게 죽는 순서인데 아무나 먼저 쓰면 어떻습니까. 손병희를 먼저 써요." 한 칼에 정리가 됐다. 

최남선의 부탁으로 이승훈 평전을 쓴 류영모

1922년 오산학교 교장인 류영모는 서울의 집으로 왔는데 최남선을 만난다. 최남선은 3·1운동으로 4년간 옥살이를 하고 가출옥한 이승훈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 뒤 류영모에게 이승훈에 대한 원고를 청탁한다. 이 글은 1922년 9월 주간지 '동명' 제2호에 실린다. 최남선은 소개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승훈 선생의 인격은 조선의 가장 귀중한 민족적 재산의 하나입니다. 일생을 통해 보여준 조선인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훌륭한 시요, 음악이요, 숭고하고 바른 종합예술입니다··· 하루는 선생이 늘 머물렀던 정주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계신 경외하는 벗(畏友) 류영모 군을 만났는데 자연스럽게 선생(이승훈)의 인격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류군이 오랜 관찰과 진실한 감상을 말하는데, 말씀이 하나하나 핵심인지라 감동하였기에 글을 부탁하여 여기 싣기로 했습니다. 또 류군은 선생의 인격과 행적에 대해 가장 자세한 조사와 엄정한 연구로 나중에 귀중한 문헌을 작성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1922. 9. 2 육당이 씀. 한자어투를 쉬운 말로 바꿈)

류영모가 쓴 평전의 끝부분을 인용한다.

"덕이 높을수록 겸허한 어른을 선생께 보았으며, 괴로움이 많을수록 편안하게 여기는 어른을 선생께 보았나이다. 나는 선생의 성격이 탁월하심을 우러러 접할 때마다, 톨스토이 선생의 이성주의(理性主義), 즉 '철두철미하게 참을 구하는 성격'이 일평생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일관한 것과 같이, 선생의 생애도 시종일관 성자의 성격이 비치어 빛남을 느낍니다."(1922. 8. 28 류영모. 한자어투를 쉬운 말로 바꿈)

류영모는 이승훈을 톨스토이와 비교하고 있다. 그가 현대인으로 가장 존경한 이는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였는데, 그중 한 분인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사람으로 이승훈을 꼽은 것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



오산학교에 기독신앙 전파를 부끄러워한 까닭

류영모는 오산학교에 4년 반을 머물렀다. 20살 때 가서 3년을 있었고 32살 때 가서는 1년 반을 있었다. 그러나 류영모가 없었더라면 오산학교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가 이승훈과 함께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더라면, 3·1운동 민족대표 이승훈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오산학교가 민족정신을 강건하게 키워나갈 수 있었던 신앙의 힘 또한 갖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스무 살의 물리선생이 전파한 기독신앙이 사람을 바꿨고 학교를 바꿨고 세상을 바꿨다. 그러나 류영모 자신은 이런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겸손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부끄러워했다. 스무 살밖에 안 된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다고 감히 전도를 했는지 돌이켜보면 부끄럽다는 말이었다. 듣고 배운 것을 전한 녹음기 노릇이었다고도 말했다.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서 남에게 전도를 한 것에 대해 그는 가급적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비록 미성숙한 상태에서 전도를 했다 해도 거기엔 '성령(얼나)'이 임한 것은 어김없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의 진짜 부끄러움은 당시 '정통 교회신앙'을 섣불리 전도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사람 숭배를 해서는 안 돼요. 그 앞에 절을 할 것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바로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더러 하느님이 되어 달라는 게 사람 숭배하는 이유입니다. 예수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를 떠날 때까지 정통 교회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면서 그 신앙을 벗었다. 오산학교에 교회신앙을 전파했던 류영모는 다른 길로 나아갔다. 그래서 그때의 전도를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된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속알(얼나)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마음속에 계시는데 교회로 찾아다닐 까닭이 있는가. 이것이 류영모의 길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