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1)류영모를 증언한다, 함석헌 가상인터뷰
2020-01-06 11:30
서양식이 아닌 주체적 기독교를 주창한 우치무라 간조의 기억과 오산학교 교장 류영모
오산학교의 류영모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1861~1930)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 메이지시대와 다이쇼시대의 개신교 사상가로, 서구 기독교가 아닌 '일본 기독교'를 주창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인에게 '말씀'을 전하는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주체적 신앙을 역설했다. 그는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라고 보는 '오직성서(Sola Scriptura)'주의자였다. 우치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로 일컬어지면서 일부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불온시된 바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이며, 교회와 일련의 종교적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형식의 일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류영모와 함석헌이 만나게 된 1921년은 60세의 우치무라 간조가 '성서연구'를 간행하며 도쿄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을 감동시켰던 바로 그해였다. 함석헌은 스승 류영모를 통해 우치무라 간조를 알게 된다. 31세의 류영모 오산학교 교장과 20세의 함석헌 학생은 '우치무라 간조'라는 사상가를 통해 신앙의 주체성에 대한 관점을 공유하게 된 것 같다. 젊은 그들이 가슴에 품었던 것은 서구에서 수입한 교회문화의 기독교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하느님을 만나는 '진정한 이 땅의 기독교'였다. 또한 그들은 우치무라 간조의 '일본적 하느님'에 공명한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신앙을 혁신하여 성령과 하느님이 직결(直結)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종교로 이끌고자 했다.
함석헌이 증언하는 류영모와 우치무라 간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방법이 뭘까 고민을 했다. 함석헌 가상 인터뷰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함석헌 어록에 있는 내용들을 그대로 살리면서 인터뷰 형식으로 새롭게 정리했다.
함석헌= "나라가 망하고 일본이 총독정치를 펴고 있을 때 나는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3학년이 막 끝나려는 1919년 3월 1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학생대열의 선두에 서서 참가했지요. 이후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인 용암포로 내려와 울분과 우수의 2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921년 봄 20세가 되던 해에 다시 학업을 계속하려고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습니다. 오산학교는 3·1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이 망해가는 나라를 건지려는 마음으로 1898년에 세운,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본산으로 평판이 높은 학교였습니다."
-3·1운동 때 오산학교가 불탔다고 하던데요.
함석헌= "기미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오산학교에선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체포되고 학교건물은 일본헌병이 불을 놓아 하룻밤 새 잿더미가 됐죠. 이듬해인 1920년 졸업생들과 지방유지들이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면서 일어나 초가지붕으로 된 가설학교를 짓고 다시 학생과 교사들을 모았습니다. 이것을 '부활오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갔던 것은 부활한 지 2년째 되는 해였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한 풍경이었습니다. 아직 손이 가지 않은 꺼칠꺼칠한 나무에 흙을 발랐을 뿐인 벽, 책상도 걸상도 없는 마룻바닥에 뭉개고 앉은 사오백명의 학생들. 여기저기서 모여든 저와 같은 중도 퇴학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류영모 선생님을 거기서 뵈었군요.
함석헌= "예. 부활오산의 유지들이 혼돈 가운데 신생의 길을 열기 위해 가리고 또 가려낸 끝에 새 교장으로 추대한 분이 바로 류영모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초창기 오산학교에도 교사로 와 계셨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땐 20세밖에 되지 않은 때였지요. 당시 나이가 선생님보다 연장자였던 제자가 선생님의 요한복음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깊은 해석에 정말 놀랐다는 말을 털어놓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류영모 선생님은 1913년에 도쿄로 가셔서 물리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생각이 달라져 귀국했던 일이 있습니다. 도쿄에 계실 때 일본의 한국인 YMCA에서 우치무라 선생이 강연을 했는데, 류 선생님은 그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 류영모 선생께서 우치무라 강연을 들으셨군요. 그때 함 선생은 우치무라라는 분을 알게 되었고요.
함석헌= "그랬습니다. 1921년 9월에 류 선생님이 교장으로 부임한 뒤 수신(修身) 시간에 어윈 정신박약아 양호원의 대니 이야기를 해주셨을 때가 우치무라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때였습니다. 그 시절이 생생합니다. 류 선생님은 '애음(愛吟, 즐겨 읊는 시)'이라는 작은 책을 가져오셔서 칼라일의 '오늘'이란 시를 읽어주시기도 했지요."
자, 오늘도 또 한번 푸른 날이 밝았다
생각하라 어찌 이 날을 쓸데없이 보내랴
이날은 영원에서 탄생되어
밤이면 영원으로 돌아가리라
이날은 일각이라도 미리 본 눈이 없으나
어느 틈에 모든 눈에서 사라지리라
자, 오늘도 또 한번 푸른 날이 밝았다
생각하라 어찌 이 날을 쓸데없이 보내랴
So here hath been dawning / Another blue Day:
Think wilt thou let it / Slip useless away.
Out of Eternity / This new Day is born; Into Eternity,
At night, will return.
Behold it aforetime / No eye ever did:
So soon it forever / From all eyes is hid.
Here hath been dawning / Another blue Day:
Think wilt thou let it / Slip useless away.
-함선생께서도 우치무라를 찾으러 가셨다면서요.
함석헌= "그때 류 선생님이 우치무라 선생님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어요. 하지만 그때 해주신 대니의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가시와기(柏木義円, 일본의 목사) 집회에 나갔을 때 우치무라 선생에게 직접 그 얘기를 들었지요. 1962년 내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퀘이커 펜들힐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땐 가보지 못했습니다. 1979년에 다시 미국에 갔을 때에는 친절한 안내인이 있어서 자세히 설명을 해줬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큰 기관이 되어버려서 우치무라 선생이 비질 청소와 마룻바닥 광내기를 하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지만, 그 큰 건물의 구석구석에서 "그는 위대한 분!"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류영모 교장이 함석헌 학생에게 해준 대니의 이야기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우치무라는 미국 유학 중 학비를 벌기 위해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의 정신박약아 학교에서 교사 일을 했다. 이 학교에는 두개의 반이 있었는데, 중증 학생들은 링컨반, 경증 학생들은 워싱턴반이었다. 우치무라는 워싱턴반 교사였다. 말썽꾸러기 학생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대니였다. 어느날 대니가 큰 말썽을 피웠을 때 우치무라는 화가 나서 "넌 오늘 저녁을 못 먹는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저녁을 못 먹게 하는 처벌을 가장 두려워했기에 선생으로서 가장 큰 벌을 준 것이었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자기의 저녁을 대니에게 몰래 주고 자신이 굶었다. 이걸 알게 된 학생들이 우치무라의 방으로 몰려와 이제 모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며, 선생님이 식사를 하기를 간청했다. 그때 우치무라는 말한다.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누군가는 처벌을 받아야 한단다." 이튿날 워싱턴반 아이들은 모두 모여, 대니 때문에 선생님이 식사를 굶었으니 대니도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결국 대니는 링컨반으로 가게 됐다. 그후 우치무라가 유학에서 돌아온 뒤의 일이다. 어느 일본인이 미국 레딩의 정신박약아 학교에 갔다가 대니를 만났다. 대니는 일본인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우치무라 선생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잘 안다고 대답했더니 엄지를 치켜세우며, "He is a great man!(그는 위대한 분!)"이라고 소리쳤다. 함석헌은 1979년 그 학교에 가서 대니와 우치무라의 자취를 찾아본 것이다.)
-우치무라 선생을 직접 만난 일은.
함석헌= "류영모 선생님에게서 처음으로 대니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우치무라 선생이 생존해 계신지 몰랐습니다. 1923년 3월 도쿄에 갔을 때도 시험준비에 쫓기고 있었는지라 우치무라 선생에 대해 수소문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1925년 가을, 도쿄 고등사범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김교신이 우치무라 선생의 모임에 나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그분이 아직 살아계신다고?' 내가 묻자 친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김교신을 찾아갔고 이후 가시와기 모임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전에 류영모 선생님에게서 교회와 관련한 여러 말씀을 듣긴 했지만, '무교회'라는 명사는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이 모임은 성경이란 대상에 '연구'라는 말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성경 연구라니?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일 게 아니라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는 성경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우치무라 때문에, 당시 공산주의 갈등도 벗었다면서요.
함석헌= "나는 오산학교에 있을 무렵부터 사물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류영모 선생님의 영향입니다. 선생님은 깊이 사색하는 분이죠. 선생님이 가장 강조하는 말씀은 '진실'입니다. '생명'이란 말도 자주 하셨지요. 류 선생님 때문에 나도 늦게나마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는 마침 3·1운동이 일어나던 때라,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도 커지고 있었지요. 총독부가 문화정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표면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고 있었는지라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시점이었어요. 이런 틈을 타서 한국에 공산주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와 한국인 학살사건이 일어났고 경제 불황을 타고 공산주의가 맹렬하게 일어납니다. 재일 한국인 학생들도 상당수가 공산주의자가 됩니다. 기독교도들은 따돌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나는 번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라를 건질 것인가, 그리스도로 나라를 건질 것인가. 그런데 우치무라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신앙'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함 선생의 신앙은 스스로 우치무라보다 류영모에 가깝다고 하셨다던데···.
함석헌= "나는 의지가 약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입니다. 매우 존경하는 류영모 선생님에게조차 질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오산으로 오셨을 때 뭔가 류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싶은 심정이 들어 선생님 방 앞에까지 가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 그대로 돌아오고 만 일도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기 직전에 우치무라 선생이 집회에서 '세례는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다, 받아서 신앙이 강해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세례를 줄 테니까 오시오'라고 하셔서 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혹자는 내가 '십자가 신앙'을 떠났다고도 하지만, 그 말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십자가 없이 어떤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해석을 나에게 맞도록 다르게 했을 뿐입니다. 나는 우러르는 십자가보다는 져보자는 십자가 쪽에 섭니다. 그 점에서 나는 류영모 선생과 간디에 더 가깝습니다." <1983년 10월 29일>
이 글은 1983년 12월에 발행한 '우치무라 전집' 월보 제39호와 씨알마당 1995년 10월호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조형균 선생이 번역한 것을, 류영모 선생 관련 발언 중심으로 일부 편집하여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 함석헌 선생(1901~1989)은 누구인가= 함석헌은 일제와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씨알'이라는 신학사상을 정립한 신학자 지식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개인의 영적 수행과 사회적인 투쟁을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했으며, 기독교의 형식주의와 교리주의에 반대했다. 특히 숙성되지 않은 채 받아들인 수입신학의 무생명성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평북 용천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1921년 오산학교에 진학한 뒤 '영적인 개안'을 한다. 남강 이승훈의 민족주의와 다석 류영모의 신앙과 사상을 전수받는다. 특히 '씨알'사상은 류영모가 창시한 독창적 사유체계로, 기독교 사상과 노장과 맹자, 불교사상의 정수의 보편성을 찾아낸 '신학의 창조적 광맥'이었다. 함석헌은 씨알사상을 폭넓게 발전시킨 공로가 있다. 또 일본 유학 중에 '무교회 운동'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 모임에 참여해 그의 신앙적 지평을 새롭게 했다. 그의 사상은 안병무(민중신학자), 김용준(고려대 명예교수), 김동길(전 연세대교수)의 사유체계에 영향을 주고 그 기반이 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주체적 해석의 토양을 마련했다. 그는 하느님이 허공에 있지 않고 땅 위에 임하여 있으며, 노동 속에서 체험되고 잘못을 용서하는 삶 속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