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13세에 맹자 읽고 하느님을 발견하다
2019-12-16 17:30
혼란과 탐욕의 시대에 삶의 가치와 본질을 찾아나선 13세 소년
국망의 시절에, 일본인 소학교를 그만 두다
다석 류영모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13살에 배운 맹자’를 지나칠 수 없다. 경전(經典)으로는 처음 만난 책이었다.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소년 류영모는 일본이 만든 학교에 다니는 일을 마음속에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1903년 수하동소학교를 그만둔 그는 눈앞에 닥쳐오는 국가의 치욕을 지켜보며 소년으로서의 ‘결단’을 내렸다기보다는 좀더 본질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인간들이 벌이는 탐욕과 폭력과 억압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본능은 무엇이며,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13세에서 15세 사이, 놀라운 기적을 만나다
그중에서도 ‘맹자’는 당시 소년의 갈증과 의문을 풀어주는 놀라운 ‘말씀’을 그에게 던졌다. 스스로 맹자를 몹시 좋아했으며 좋아한 만큼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의 정신은 모세와 예수, 그리고 공자와 맹자로 영향된 것입니다”라고 <다석일지>에 기록해 놓을 정도다.
맹자의 무엇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것일까. YMCA 강의 시절 류영모는 ‘맹자’에서 발췌한 ‘맹자초(孟子抄)’를 가르쳤다. 힘 주어 강의를 한 대목은 ‘맹자 진심 하편 제24장’의 이 대목이었다. 그는 고전 중에서도 명구(名句)로 꼽히는 구절을 특유의 우리말 해석으로 가르쳤다. 쉽지 않은 문장이지만 류영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다석에게, '하느님'에 눈뜨게 한 건 맹자였다
입은 맛을 향하고 눈은 빛깔을 향하고 귀는 소리를 향하고 팔다리는 편안한 것을 향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본질’[性]이지만 ‘삶의 에너지’[命]다. 군자는 삶의 에너지를 사람의 본질이라 하지는 않는다.
어진 것은 아버지와 자식을 향하고 의로운 것은 임금과 신하를 향하고 예의바른 것은 손님과 주인을 향하고 지혜로움은 현자를 향하고 성인은 하늘의 도를 향하는데 이것은 ‘삶의 에너지’[命]이지만 ‘사람의 본질’[性]이다. 군자는 사람의 본질을 삶의 에너지라 하지 않는다.
(다석 류영모가 이 구절을 우리말로 풀이한 내용은 이렇다. “언(仁) 져 아바 아들 옳게 하라. 섬기(臣)오. 차리어(禮) 손(賓)맞이요. 슬기에 닦아난(賢)이요, 씻어 나기는(聖) 하늘 길이란, 시킨지라 바탈로 있겠거늘, 그이(君子)는 시킴(令)이라 이르지 아니한다”)
口之於味也,目之於色也,耳之於聲也,鼻之於臭也,四肢之於安佚也,性也,有命焉,君子不謂性也。仁之於父子也,義之於君臣也,禮之於賓主也,智之於賢者也,聖人之於天道也,命也,有性焉,君子不謂命也。
仁之於父子也, 義之於君臣也, 禮之於賓主也, 智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謂命也 <맹자 진심 하편 제24장>
어려운 말들처럼 보이지만 성(性)과 명(命)이라는 두 글자의 차이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성(性)은 선천적인 마음이다. 즉, 사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변의 본질을 말한다. 명(命)은 사람이 살기 위한 바탕이 되는 에너지이며 생명활동의 뿌리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성’은 류영모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이다.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태어나서도 있었고 죽어서도 있을 바로 그것이다. ‘명’은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생명을 영위하게 하는 힘의 뿌리다.
입과 눈과 귀와 팔다리는 맛과 빛깔과 소리와 편안함을 추구한다. 이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느님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생겨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하느님이라 하지는 않는다. 그런 반면 어질고 의롭고 예의바르고 지혜롭고 성스러운 것은 우리가 생명이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걸 ‘목숨의 문제’라고만 보지는 않는다. 이 얘기다. 소년 류영모에게 이 구절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까닭은, 우리 목숨에 붙은 것과 우리 목숨을 초월한 영원한 것이 우리에게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내 안에 ‘목숨’보다 크고 깊고 길고 먼 무엇이 있구나. 이것을 류영모는 맹자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하늘의 명령을 아는 자는 쓰러지는 담장에 서 있지 않는다
맹자는 류영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자는 자기의 성(性)을 알 것이니, 자기의 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자기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르는 일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도리다. 일찍 죽거나 오래 사는 일에 개의치 않으면서 몸을 닦으며 기다리는 일은 하늘의 명령을 보존하여 세우는 방법이다.”
다시 맹자는 목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목숨은 하늘의 명령이다. 모든 것이 하늘의 명령이 아닌 것이 없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바른 목숨을 순리대로 받아야 한다. 하늘의 명령을 아는 자는 쓰러지는 담장 아래 서 있지 않는다. 자기의 도를 다하고 죽는 자는 바른 목숨이며, 형벌을 받아 죽는 자는 바른 목숨이 아니다.”(‘맹자’의 진심장구 상편 제46장)
나라가 무너지는 시절, 모든 삶이 허물어지는 듯한 시대에 소년 류영모는 이 같은 맹자의 강렬한 명령과 가르침 속에 파묻혀 3년을 살았다. 이것은 그가 기독교를 만나게 되면서 정신의 천지개벽을 느끼게 될 때, 그 ‘폭발’을 이루는 긴요한 질료가 되었다. 그는 ‘맹자’를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자(莊子)·맹자도 다 성령(聖靈)을 통했다고 생각해요.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그렇게 바탈(性)을 알 수가 없어요. 맹자와 장자는 성령을 통한 사람인지라 꿰뚫어 본 것입니다. 볼 걸 다 본 사람들입니다. 어느날 ‘맹자’를 펼치니 이런 말들이 다 나오지 않겠습니까? 쭉 읽어보고는 섬뜩해졌습니다. ‘이렇게도 맹자가 깊고 깊은 사람이었나’ 하고 말입니다."
류영모는 맹자의 대장부(大丈夫)를 좋아하였다. "맹자의 사나이(大丈夫)라는 소리는 참으로 시원한 말씀이에요. '사나이 살기는 누리 넓은 데, 서기는 바른 자리에, 가기는 환히 넓은 길로, 뜻대로 되면 씨알(民)과 함께 가고, 뜻대로 안 되면 나 혼자서 가련다(居天下之廣居 天下之正位 行天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此之 謂大丈夫-‘맹자’ 등문공 하편)'. 맹자의 이 말씀은 훌륭한 바이블입니다. 성경말씀 안 될 게 없습니다."
석파정 부근, 교육자 이세정과의 우정
삼계동서당에서도 평생의 벗을 얻었으니 일해(一海) 이세정이 바로 그 사람이다. 류영모의 아버지와 이세정의 아버지는 삼계동에서 같이 자랐다. 그러니 류영모와 이세정은 세교(世交)를 물려받은 것이다. 류영모는 석파정(石坡亭) 가까이에 사는 이세정의 집으로 자주 놀러 갔다. 이세정은 류영모보다 5살 아래로 뒤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자가 되었다. 진명(進明)여학교 교장으로 30년 동안 근속하였다. 이세정의 헌신적인 교육은 서울 시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류영모는 딸을 진명여학교에 보낸 인연도 있다.
1972년 77살의 나이로 이세정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교육자로서는 드물게 사회장(社會葬)으로 안장되었다. 류영모도 장의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으나 그때 건강이 나빠져 장례의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류영모와 이세정은 서로가 그리울 때 종종 만났다. 언젠가는 이세정이 류영모의 YMCA 모임에 나와서 얘기를 한 일도 있었다. 1955년 5월에 이세정의 회갑잔치가 있었다. 이세정의 아들 이태섭(일명 其雨)이 류영모의 집으로 찾아와 참석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류영모 자신은 회갑잔치고 생일잔치고 하지 않았지만 옛 벗의 회갑잔치에는 참석하였다. '채근담'에도 이르기를 "옛 벗을 만나 사귐에는 정의를 더욱 새롭게 하여야 한다"(遇 故舊之交 意氣要愈新-채근담 165)고 하였다.
류영모는 벗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우(友)는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그림의 글자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친구인양 악수를 함부로 하고 있어요. 벗은 하느님의 뜻을 가진 사람을 말해요. 하느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나의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모두가 예수가 되지 않고는 벗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수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였어요. 원수를 사랑할 줄 알면 벗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기난득(知己難得)이고 득우극난(得友極難)입니다."
* 다석어록 = 시작해서 끝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상대를 끝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나서 죽는 것이 몸나이다. 몸나가 죽어서 사는 것이 얼나이다. 얼나는 제나(자아)가 죽고서 사는 삶이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의 생명으로 죽고 형이상(形而上)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몸나로 죽을 때 얼나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몸나의 인생을 단단히 결산을 하고 다시 얼나의 새 삶을 시작한다. 몸삶을 끝내고 얼삶을 시작한 그 삶에는 끝이 없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1956).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