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가
2019-12-11 10:18
수학공부와 친구를 사랑했던, 소학교 소년
공부를 하고싶었던 소년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공부가 그리 쉬운 건 아니다. 무엇인가를 인간의 생각이나 기억 속에 추가하는 일은 내부의 맹렬한 저항을 견디는 수고가 필요하다. 공부하는 일이란 대개 귀찮고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이다. 마음은 긴장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늘 힘겹다.
그런데 아는 것이 즐거움이 되고 그 즐거움의 길을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 그 줄을 찾아야 한다. 그 줄을 타는 일이 공부의 즐거움이 되어야 지식이 내부에 제대로 쌓인다. 이런 문제들을 옛사람들도 이미 간파하고 있다. 전통적인 아동 교과서인 '소학(小學)'에는 공부하는 태도를 온공자허 소수시극(溫恭自虛 所受是極)이라 말한다. 새로운 것을 알려면 온순하고 공손한 마음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마음을 비워놓아야 그 안에 지식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얻은 지식을 관리하는가. 그 받은 바를 극대화하라. 어떤 가르침을 받았느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어떻게 인식되고 활용되느냐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가르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더 생생한 건 이거다. 조익모습 소심익익(朝益暮習 小心翼翼). 아침에는 새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공부한 것을 세심하게 복습하라. 이른 시각에는 마음도 새롭고 열의가 생겨나 있으니 새 지식을 습득하는 데 유리하고, 늦은 시각에는 몸과 마음이 좀 피곤하긴 하나 하루의 활동으로 머리가 유연해져 있는 만큼 복습이 효율적이다. 한꺼번에 왕창 이룰 수 있는 건 없다는 게 공부의 비밀이다.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또 작은 것에 치밀하고 세심하게 물고 늘어지는 게 좋다. 그러면 어린 새들이 날개돋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날 수 있게 되리라. 화담 서경덕이 어린 시절 통찰한 조삭비(鳥數飛;새가 거듭 날 듯이 훈련하다)의 교훈은 바로 소학에 나오는 대목의 변형이었다.
1895년 학부관제에 관한 법령 46호에 의거하여 서울에 처음으로 4개의 소학교(小學校)가 생겼다. 일본인들이 세운 학교였기에 많은 조선사람들은 자녀를 소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당에도 다니지 못해 배움에 굶주렸던 가난한 집 아이들은 거기라도 가고 싶어했다. 소년 류영모는 서당을 나온 뒤 ‘통감’을 공부하던 생각이 자꾸 났다. 회초리를 맞는 것이 그땐 싫었는데, 지금은 공부를 몹시 하고 싶었다. 아버지도 그 마음을 이해한 듯 그를 소학교에 보냈다.
인생도처유시험, 삶의 가는 곳마다 시험이구나
류영모는 1900년 10살 때 수하동(水下洞)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미 소학교가 세워진 지 5년이 지나 서울에만도 9개 학교로 늘어났다. 수하동소학교, 장동소학교, 재동소학교, 정동소학교, 양사동소학교, 양현동소학교, 주동소학교, 인동소학교, 교동소학교이다. 9개 학교에 교장은 두 명뿐이었다. 학년말 시험은 9개 학교 학생 500여명이 모두 교동소학교에 모여서 한꺼번에 치렀다. 류영모는 1학년 때 1등을 했고 2학년 때 5등을 했다고 한다.
류영모는 팔순이 지난 뒤 그때를 회상하면서, 꿈을 꾼 일을 말했다. "성적을 발표하는 전날 밤이었죠. 교실 외벽에 성적순으로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내 이름이 5번째였어요. 그런데 실제로 이튿날 학교에 가서 보니 5등이 되어 있더군요.“ 이 신기한 일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던 까닭은, 당시 우등생이 되려는 마음이 몹시 컸기 때문일 것이다. 류영모는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꿈을 꿀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에게 교육이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이뤄내려는 첫 마음을 그 과정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시험’이라는 제도가 몹시 흥미로웠다. 시험문제가 아리송할 때, 타들어가던 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학년말 시험 때 ‘試驗’이란 한자에 토를 달라는 문제가 나왔다. 그런데 문득 당연히 ‘시험’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시엄’이 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이 끼어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이 생각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온 것일까. 다른 문제를 다 풀어놓고, 이 문제를 다시 보는데 도대체 시험인지 시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에 답을 표시하는 순간, 그간의 고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둘 중에 하나의 문항이 답이라고 말한 사람이 되는구나.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처음에 생각했던 ‘시험’을 찍었다. 류영모는 이 일을 언급하면서 ”인생이란 280번을 시험을 본다고 하였는데, 정말 인생도처유시험(人生到處有試驗, 인생의 길목길목마다 모두 시험)입니다“라며 껄껄 웃었다. ”‘중용’에 보면, 사람의 마음은 오로지 변덕이 심하고 진리의 마음은 오로지 아리송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고 했는데, 이게 딱 시험 치는 그 마음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그는 즉흥한시를 읊는다.
시험중지시험중(試驗中之試驗中)
삼중구중참여중(三重九重參與中)
시험 가운데 또 시험 중이네
삼중으로 구중으로 시험보는 중이네
다석은 하루에 일생을 살자는 일일일생주의자다. 오늘 하루를 살고 죽는다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 동안의 삶을 시험받고 심판받는 정신으로 살자는 뜻을 시에 담았다. 순간순간을 깨어서 삼중 구중으로 깨어서 시험과도 같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자는 의미다.
소년 류영모의 저 '시험 일화'는, 기독교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의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며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시험이라는 말은 영어 원문에서는 유혹(temptation)이라고 되어 있다. 류영모는 '시험'이라는 글자에 관해 시험을 보았는데, 그 문제에서 엉뚱한 것이 정답인 척하며 유혹하는 상황을 만난 셈이다.
류영모는 '시험'을 경험하면서 인생의 모든 것이 시험이기에 매순간 깨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체의 제나가 빠지기 쉬운 함정들을 뚫고 참(진실)을 만나는 것은 성령으로 솟아난 얼나 밖에 없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류영모는 "하느님이 따로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어린아이 같은 내 마음속에 있다. 내 속에 진실로 하나의 점인 '참긋점'이 있으며 그것이 하느님이다. 사람이 초월하여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때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밑둥을 파고 들어간다고 류영모는 말했다.
수학공부가 가장 행복했다
공부는 그에게 신세계였다. 가장 즐거웠던 건 산수를 배우는 것이었다. 서당에서는 못 배우던 가감승제(加減乘除)의 법칙을 배우는데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었다. 독감에 걸려 온몸에 열이 나는데도 산수를 배우고 싶어 학교로 달려갔다.
산수 공부에 유난했던 소년이 종교철학으로 나아간 까닭은 무엇일까. 수학과 과학이 지향하는 진실과 진리의 갈증은, 종교와 철학이 지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인지 모른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자이지만 철학자였다. 피타고라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를 수(數)“라고 말했고, 류영모는 ”수(數)를 바라보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수하동소학교에서 알게된 친구가 있었다. 죽을 때까지 70여 년 동안 우정을 나눈 우경(友鏡) 이윤영(李潤榮)이다. "그를 길에서라도 만나면, 아무리 바빠도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갈 수 없었죠. 서로가 약속한 것은 일생 동안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동갑인데다 학교 성적도 비슷하여 수석(首席)을 주거니받거니 했던 사이이기도 하다. 류영모는 소학교를 2년 다닌 뒤, 다시 서당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이윤영과 함께 공부했던 기간은 2년뿐이었지만 그 뒤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우정을 나눴다.
15살 때 류영모는 기독교에 입문을 한다. 그 무렵 그는 이윤영에게 신약성경을 선물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윤영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윤영은 집에서 가까웠던 궁정동교회에 다녔다. 그는 소학교 3년을 졸업한 뒤 중학교에 갔고 다시 3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했다. 당시로선 '최고 학부'를 졸업한 이윤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맹아학교 교사를 지원한다. 이후 구기동에 청운양로원을 세워 외로운 노인들을 보살폈다. 양로원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평생 이웃을 위한 봉사로 살았다. 이윤영은 1974년 84세로 류영모보다 7년 앞서 세상을 떠난다. 그를 잃었을 때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그이는 나와 동갑이고 내가 일주일 빨리 태어났죠. 얼마전 생일을 한다기에 다녀왔는데, 사흘 뒤에 부고를 받았습니다. 평생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았던 이를 그렇게 보냈지요."
류영모는 74년 우정을 나눈 친구를 기리는 한시를 일기장에 적어놓았다.
참뜻 평생 (誠意平生)
李柳又又友(이유우우우)
舊基明明鏡(구기명명경)
不慍人不知(불온인부지)
君子自誠敬(군자자성경)
이윤영과 류영모는 벗중의 벗이니
옛터골(舊基洞)처럼 옛 기틀 밝힌 밝은 거울
사람들이 몰라줘도 섭섭해 하지 않았으니
군자는 스스로 참뜻과 우러름을 다할 뿐이네
'논어'의 첫장에 나온 '인부지불온(人不知不慍)'을 언급한 까닭은, 친구 이윤영이 공자의 어진 품성과 평생 변하지 않는 겸허한 마음을 지녔음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공자는 제나라 대부였던 안평중(安平仲)의 우정을 칭찬하였는데, 사람을 대할 때 오래도록 변함없이 공경한[久而敬之] 점을 높이 샀다. 이윤영 또한 류영모에게는, 스스로 정성과 우러름을 다한 사람이었다. 이윤영이 류영모를 평생 친구로 여겼던 까닭 또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류영모가 엄격하고 직선적인 면모만 있는 것으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윤영은 그의 깊은 인간애와 넓고 맑은 심성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1889~1964)가 마하트마 간디(1869~1948)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간디를 존경했던 그는, '골치 아픈 늙은이'라고 부른다. 그 곧고 바른 기운을 지닌 정신적 동지(同志)에 대한 익살스런 칭찬이었다.
# [다석어록]
"사람이 상대세계에 빠져버리면 아는 것(知, '알')이 굳어져버리고 만다. 절대세계를 놓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든지 아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완고해지고 교만해지고 자기가 제일이라는 어리석음을 가지게 된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의 향내라 할 수 있는 신비를 느껴야 한다. 신비를 느끼면 자신의 무지와 부지(不知)를 알아야 한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다. 이 하나를 님으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이 아닌가. 하느님이 따로 계시지 않는다. 어린아이 되는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에게로 가는 것이다. 우리 생각의 '긋(끝)'은 참을 찾아간다. 참되신 절대자는 우리 속에 참의 긋점을 주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