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말아먹는 기득권 클럽 대한민국 '정치계급'의 초상
2019-12-11 05:00
영국의 정치연구협회(PSA) 회원이면서 스코틀랜드 스털링 대학의 교수인 폴 케어니(정치학)는 “영국에서 정치계급의 실패를 개탄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권자를 대표하지 않는다. 국민으로부터 불신 받고, 현실세계와 갈수록 유리된 정치계급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영국에서 정치계급이 갖는 문제점을 △해당 정치인들의 인격적 결함 △지역구에 대한 옅은 뿌리의식 △출마하기 전에 적절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어서 현실세계(real world)에 대한 경험 부족 △유권자들에 대한 대표성의 결여 등 4가지로 꼽았다(Political Studies Association, http://www. psa.ac.UK, 2019년 11월 5일).
영국의 저널리스트 레오 매킨스트리는 “많은 의원들이 당선되기 전에는 주로 정치권, 이익단체, 싱크탱크, 지역정부 등에서 일하던 야심 덩어리 출세지상주의자들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에선 1990년대 정치계급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출마 횟수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법원은 위헌이라며 기각했다. ‘비밀의 제국들(Secret Empires) : 미국의 정치계급은 어떻게 부패를 감추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부자로 만드는 가’(2018)의 저자 피터 슈바이처는 “미국에서 유력 정치인의 자녀들이 사업에 성공하는 건 그들이 사업에 정통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영향력이 있는 그들의 부모에게 잘 보이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어떤가. 정치계급이 존재하는가. 아직은 이에 관한 확립된 설명(이론)은 없다. ‘정치계급’이란 말도 일반화되지 않았다. 정치학개론 수준에서 정치가(statesman)와 정치꾼(정상배·politician)을 구분해온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지금 ‘정치계급’인가. 쉽게 ‘정치 마피아’라고 해도 될 걸 굳이 ‘계급’을 붙이는 이유는 뭔가. 한국정치의 총체적 비효율과 후진성을 담아낼 그릇으로서 ‘계급’만큼 적절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자본가'들을 ‘자본가계급’으로 적시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본가들이 자본가계급이 되면 그들의 이기심에 관한 많은 문제점들이 더 구조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난다. 노동자의 입장에선 투쟁의 대상이 보다 선명해지는 셈이다. 나는 ‘정치계급’이란 말에서도 그와 유사한 효과를 기대한다. 정치 소비자로서 우리는 이제 ‘정치계급’을 특정하고 그들과 더 치열하게 마주해야 한다.
한국판 정치계급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영·미(英·美)의 사례에다 한국적 특성을 합치면 윤곽이 잡힌다. 한마디로 ‘비효율과 부조리에 빠져 살면서도 기득권 유지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정치인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우리 정치의 모습을 보자. 정치가 국민을 위해 한 게 뭐가 있나. 국회는 물론 대통령제 아래서 정치 리더십의 원천인 청와대까지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그 비효율과 무능이 선거제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안을 둘러싼 패스트트랙 대치로 정점을 찍고 있다. 정치가 국민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게 일상이 돼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진영 간 싸움을 말리고 타협을 끌어내야 할 정치가 오히려 대결을 격화시키고 있다.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지역감정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더 교묘한 형태로 심화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특정지역을 인질 삼아 거기에 기대는 것도 여전하고.
난무하는 막말과 비례(非禮), 쌈질은 아이들이 보고 배울까 걱정이다. 그 폐해를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선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그 주인공들은 국민이 이미 신물 나게 ‘경험한’ 사람들이다. 정권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불출마 수건돌리기’라도 하듯 서로 눈치만 본다. 공천에 필요하다면 친박(親朴), 친황(親黃), 어떤 라벨이 붙어도 개의치 않을 태세다. 정치공동체가 아닌 이익공동체를 위해 살고, 일신(一身)의 안락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 이들이 곧 정치계급이다.
이 정권 들어 한국사회가 이토록 팍팍하고 힘든 것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국내적으론 진영 우선주의(my camp first), 국제적으론 자국 우선주의(my country first)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트럼프의 방위비 증액 요구와 중국의 사드(THAAD) 시비로 상징되는 자국 우선주의에 맞서려면 진영 우선주의로는 불가능하다. 진영을 넘어 합리적 국가 우선주의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도 자국 우선주의의 기치 아래 조화롭게 하나가 돼야 한다. 그것이 약소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치계급으로 그 일이 가능하겠는가. 무능하고, 파당적이며, 도덕적이지도 못한 한국 정치계급의 각성과 해체가 긴요한 이유다.
물론 모든 정치인들을 ‘정치계급’으로 싸잡아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꿈같은 얘기겠지만 제정구 전 의원(1944∽1999) 같은 정치인이 지금도 활동한다면 누가 감히 ‘정치계급’ 운운할까. 평생을 빈민(貧民) 운동에 헌신한 그가 만약 자유한국당에 버티고 있다면 아마 한국당을 향해 수구 꼴통 보수정당이라고 비난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그런 점에서 황교안 대표는 생각이 짧았다. 중요한 건 물갈이 비율(%)이 아니다. 누구를 영입하느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6년 진보 운동권의 핵심이었던 이재오와 김문수를 당시 보수 여당인 신한국당으로 데려왔듯이 최소한 그런 시도라도 해야 한다. 당의 체질은 그렇게 바꾸는 것이다).
나는 한국정치의 문제점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정치계급’이란 개념을 동원했다. 세습과 특권을 암시하는 부정적 용어 탓에 억울해하는 정치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스카의 정치계급론을 소환한 것은 우리 정치인들도 원래의 유능하고 도덕적인 정치 엘리트로서 거듭났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어떻게 해야 정치계급의 타성과 안주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요구한 정치인의 자질,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을 다 갖추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건 너무 과도한 욕심 같다).
공정과 정의, 평등이 시대정신이 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정치엘리트에게 요구되는 쉽고도 명쾌한 덕목은 딱 하나, 희생과 봉사다. 희생과 봉사만이 정치계급이란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낼 수 있다. 디지털 혁명 속에서 정치인이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을까. 별로 없다. 전문성? 경륜? 글쎄다. 인류는 벌써 호모사피엔스 시대를 지나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시대로 옮겨갔다고들 한다. 5000만 국민이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걸 다 해내는 세상이다. 인공지능(AI)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런 세상에서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거의 유일한 덕목은 희생과 봉사뿐이다.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오직 입이 아닌 몸으로 희생하고 봉사할 일이다. 양복을 벗어던지고 동네 이웃집의 이삿짐 나르는 일부터 돕겠다는 정신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진보, 보수를 떠나 한국 정당정치의 앞날이 여기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