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간 결제도 가상토큰으로…블록체인과 손잡은 은행

2019-11-27 18:13
대중교통 승차권 방식과 동일…기업은 토큰 지급받아 은행서 교환
신분증 없이 본인 인증 가능한 DID 구축으로 정보 관리 비용 절감


변화보다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던 은행업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이상 미래를 보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은행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인프라이자 플랫폼인 블록체인 기술과 '필연적'으로 손을 잡아야만 했다.

은행과 블록체인 업계가 합종연횡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블록체인이 '정답'은 아니지만, 미래 금융 서비스를 위한 필수 요소라고 판단한 것이다. 블록체인 업계와 손잡고 미래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도도 있다.

새로운 시장인 만큼 은행의 블록체인 활용법은 아직 기초단계에 불과하다.

고객이 거래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신원확인 과정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는 식이다. 기업들이 블록체인 플랫폼을 이용해 자금을 정산할 수 있도록 시스템 구축에 나선 곳도 있다. 글로벌 은행들은 국가 간 송금 시 비용 절감을 위해 블록체인 기반의 무역금융을 선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은행과 블록체인이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산업 핵심인 고객의 거래 장부 기록 방식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완전히 달라 융합이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은행은 집중형 중앙 서버에 거래기록을 보관하는 반면 블록체인은 공공 거래장부를 활용한다. 블록체인 기술이 발달하면, 먼 미래에는 은행은 물론 중앙은행조차 블록체인에게 잠식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적지 않다.

은행이 그리는 미래 금융 시장은 어떤 모습일까. 은행과 블록체인은 양립할 수 있을까.

◆ 은행들, DID에 집중하는 까닭

은행이 블록체인을 활용하는 첫 단계는 디지털 ID(DID) 구축이다. DID란 신분증 없이도 본인 인증이 가능한 개인용 전자인증서다.

현재는 신원 확인을 하려면 외부 기관에서 신분증 등의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외부 기관의 도움 없이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셈이다. 하지만 DID는 '본인 인증을 위한 모든 자료가 개인에게 있다'는 패러다임으로, DID를 보유하면 어떠한 외부 기관도 찾지 않아도 된다.

은행이 DID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간단하다. 금융 거래 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본인 인증은 금융거래를 위한 첫 단추인 셈이다.

예금 및 대출은 물론, 송금 업무 등 모든 금융거래 시엔 신원 확인이 필수적이다. 은행은 공인인증서를 발급해 고객의 신원정보를 보관하는데, DID를 활용하면 정보 관리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외부 해킹 가능성에 대한 리스크도 해소된다.

DID는 내년 초 본격적으로 상용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신한은행과 우리은행, KEB하나은행이 SK텔레콤이 주도하는 '모바일 전자증명 공동 사업' 컨소시엄인 '이니셜'에 참여한 상태다. 이니셜은 본인 전자증명이 가능한 모바일 플랫폼이다.

활용도는 높다. 우리은행은 이 플랫폼을 활용해 대출에 필요한 재직증명서 등의 각종 서류를 제출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위변조가 불가능한 VIP 고객의 증명서를 발행해 제휴처에 모바일로 제출할 수 있는 서비스도 선보인다.

신한은행은 아이콘루프가 주도하는 '마이 ID' 사업에도 참여했다. 금융사로부터 본인인증 과정을 한번 거치면, 이후 별도의 실명확인 없이 비대면 계좌개설 등 금융거래가 가능하도록 하는 프로젝트다. 이 사업은 금융위원회의 혁신금융서비스에 지정됐다.

◆ 대중교통 토큰이 기업 결제자금으로

은행이 블록체인을 활용하는 또 다른 분야는 자금 정산 부문이다. 특히 기업 간 결제자금 시 일종의 가상자산을 이용하고, 이를 은행에서 돈으로 바꾸는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다.

작동 원리는 과거 시내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토큰 방식의 승차권을 구입하는 것과 동일하다. 버스 회사는 동전을 일일이 수거할 필요 없이 이용자들이 사용한 토큰만 모으면 됐다.

마찬가지로 기업 간 자금을 정산할 때도 가상자산 형식의 토큰을 이용하는 것이다. 토큰을 지급받은 기업은 은행에서 돈으로 바꿀 수 있다.

다만 대중교통의 토큰 결제 방식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순히 토큰을 이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기업은 상호 간 체결한 계약대로 업무를 원활히 수행해야 토큰을 지급받을 수 있다. 업무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토큰을 받을 수 없다. 또 역할 수행을 끝냈다면 토큰은 무조건 지급된다.

이러한 정산 시스템은 원청과 하청 간 관계에서 빛을 발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은 원청에서 1차 협력회사, 2차 및 3·4차 협력사로 자금을 보낼 때 어음 등을 활용하지만, 하청일수록 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반의 정산 시스템을 활용하면 이러한 문제를 예방해 기업 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이 같은 시스템은 이르면 내년에 구축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은행은 '기업 간 결제자금 전용 토큰 서비스'에 대한 사업모델 평가를 마쳤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6개월이면 시스템 구축을 완료할 수 있다"며 "이 서비스를 장기적으로 활용할 업체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이와 비슷한 방식의 '중소기업 사업 지원을 위한 바우처 토큰 서비스'도 개발 중이다.

신한은행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소진공)이 공급하는 대출상품을 대상으로 한 블록체인 플랫폼을 구축할 계획이다.

현재 소상공인이 해당 대출을 받으려면 22일이 소요된다. 또 소진공과 신용보증재단, 은행 등 기관에 총 6번 방문해야 한다. 하지만 플랫폼이 구축되면 최대 2번만 방문하면 되고, 대출 실행에 소요되는 기간도 짧아진다. 신한은행은 내년까지 이 플랫폼을 만들어 소상공인 지원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글로벌 은행, 블록체인 어떻게 활용하나

해외 주요 금융기관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플랫폼 생태계를 구축하고 서비스 표준화를 선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R3CEV'는 2015년 9월 결성된 세계 최대의 글로벌 블록체인 컨소시엄으로, 비트코인 작동의 중심이 되는 핀테크 기술의 표준화를 위해 구성됐다. 골드만삭스, 바클레이즈, JP모건, UBS 등 전세계 50여개 금융기관이 참여 중이다.

R3CEV는 금융산업 내 블록체인 기술에 관한 표준화와 프로토콜에 관한 기본 틀을 마련 중이다. 블록체인을 금융서비스에 접목시키기 위한 플랫폼도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 컨소시엄에 참여한 금융기관들은 블록체인을 지급, 결제뿐 아니라 주식, 채권, 부동산 거래 등까지 폭넓게 적용한다는 계획이다.

블록체인 기반의 무역금융도 활용도는 높다.

글로벌 블록체인 기반 무역금융 플랫폼인 '볼트론'은 HSBC, ING, 스탠다드차타드, 방콕은행, BNP파리바 등 12개 은행이 참여한 네트워크다. 신용장 개설부터 선적서류 처리, 판매대금 결제 등 무역금융 전반의 프로세스를 디지털화하는 블록체인 기반의 플랫폼이다.

기존 서류 기반의 거래는 5~10일이 소요되는 반면, 단일 플랫폼을 통해 진행된 해당 무역거래는 24시간 내로 완료된다.

모든 무역금융 과정을 '블록'으로 문서화하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서류가 오고가지 않아도 각 과정에서의 세부 정보도 실시간으로 은행들에게 공유된다. 거래 단계마다 새로운 블록이 생기기 때문에 위조나 분실 위험이 없고 대금 미납 등의 리스크도 줄일 수 있다.

UBS, 크레디트 스위스, 산탄데르, 도이치방크 등 13개 글로벌 대형 은행들은 결제 업무의 경제성 및 안정성 제고를 목적으로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청산결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일부 은행에서는 블록체인 기반 금융상품 발행이나 스테이블 코인 발행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JP모건체이스는 이더리움 기반 블록체인 플랫폼 쿼럼을 활용한 달러 기반 스테이블 코인을 개발하고 있다. 일본의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도 내년 상반기 스테이블코인 발행 플랫폼 출시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스페인 산탄데르(Santander) 은행은 지난달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화된 채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한국금융연구원 관계자는 "블록체인 도입과 적용으로 기존 금융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기술적으로 동등하거나 우월한 금융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졌다"면서 "블록체인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기존 금융 생태계 상당부분이 본질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