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지중해 오디세이]②여인과 밤을 보낸 카잔차키스의 크레타섬

2019-11-26 15:33
② 그대에게 오렌지 꽃물을 드리리

[지중해 속의 크레타.]



[북클럽-지중해 오디세이]
② 그대에게 오렌지 꽃물을 드리리


책을 통해 떠나는 내 지중해 오디세이 첫 번째 기항지는 그리스 남쪽 크레타 섬입니다. 이 섬은 유럽 문명이 시작된 곳입니다. 기원전 2700년, 여기서 시작된 미노아 문명(크레타 문명)이 퍼져 나가 유럽문명을 이뤘으니까요. 볼 것이 많지만 나는 가장 가까운 오렌지 과수원을 먼저 찾아볼 겁니다. 거기서 바람에 실려 오는 오렌지 꽃향기에 온 몸을 맡길 겁니다. 이 섬은 제주도보다 다섯 배 더 넓습니다.
내가 크레타에서 오렌지 꽃향기에 취해보려는 건 크레타에서 태어난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가 크레타를 무대로 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 역, 열린책들)에 오렌지 향기를 너무 풍성하고 아름답게 그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감미롭지만 새콤한 그 향기에는 슬픔도 섞여 있습니다. 나는 그 향기에서 깨어나야만 크노소스 궁전 같은 미노스 문명의 흔적과 카잔차키스의 고향마을, 그의 무덤 같은 곳을 찾아 나서지 싶습니다.
 

[영화 '희랍인 조르바' 포스터.]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 본인이 화자(話者)가 되어 평생 바람 따라 자유롭게 살아온 조르바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형식입니다. 항구의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함께 크레타로 옵니다. 조르바는 크레타에서 ‘두목(카잔차키스)’이 글 쓰는 일을 잠깐 쉬고 새로 시작한 광산 일을 돕게 되지요. 평생 욕망을 속이는 걸 경멸해온 조르바는, 평생 책만 읽고 써오면서 욕망을 억누르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과는 반대의 삶을 살아온 두목에게 마을의 젊은 과수댁과 사귀어 보라고 부추깁니다. 새로운 삶을 경험해 보라고 등을 떠밉니다. 과수댁이 두목을 기다릴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합니다. 카잔차키스는 거부하지요. 사랑 없이 몸을 섞는 건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 부도덕한 욕망이니까.

반전은 부활절(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 보통 4월 중순쯤입니다) 전날 마을 사람들이 과수댁을 린치하려는 걸 카잔차키스가 막으면서 일어납니다. 마을 사람들은 과수댁을 부정한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며칠 전 과수댁을 짝사랑하던 마을총각이 사랑이 이뤄지지 않자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제 목숨을 끊었는데, 총각의 가족과 마을사람들은 ‘탄력 있는 걸음이 흑표범 같은’ 과수댁이 ‘검은 머리칼을 찰랑이며’ 젊은이를 유혹한 후 버렸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마을 아이 미미코가 카잔차키스에게 오렌지 한 바구니를 가져옵니다. 과수댁이 낮에 고마웠다고, 뜰에서 갓 딴 걸 보냈습니다. 바구니를 받아든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렌지 하나를 깠다. 꿀처럼 달콤했다.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밤새도록 오렌지 과수원을 헤맸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귀 뒤에다 향긋한 나륵풀 가지를 꽂고 바람에다 가슴을 씻었다. 나는 20대 젊은 농부가 되어 오렌지 숲을 거닐었다. 휘파람을 불며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렸더라? 모르겠다. 그러나 내 가슴은 기쁨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렌지 나무 저 너머에서 바다가 여자처럼 한숨짓는 소리를 밤새도록 들었다.”
 

[영화 '희랍인 조르바'의 한 장면.]


이 문장을 읽자니 바람에 실려 온 오렌지 향기가 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습니다. 이탈리아 작곡가 마스카니(1863~1945)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처음 들었을 때 기분과 어찌 이리 똑같습니까. 포근한 바람에 실려 오는 풍성하고 감미로운 오렌지 꽃향기. 바람결 따라 가슴속 깊이 들어오기도 하고, 가벼이 코끝을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달콤한 향기. 그러고 보니 치정과 복수, 결투와 살인이 얽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도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 시칠리아(크레타보다 세 배 이상 넓습니다)가 무대이며, 부활절에 클라이맥스가 전개되는군요. 카잔차키스가 1890년에 첫 공연된 이 오페라를 보고 <그리스인 조르바>에 오렌지 꽃향기를 짙게 깔아놓았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과수댁이 보내온 바구니 속 오렌지 하나를 깐 카잔차키스는 밤새 오렌지 과수원을 헤매면서 그 향기에 흠뻑 젖은 채 과수댁으로 발길을 돌려 하룻밤을 같이 보냅니다. ‘나륵풀’은 서양요리에 많이 쓰이는 향신료 ‘바질’이라고 사전에 나옵니다. 달콤한 오렌지 향기에 짙은 녹색의 강렬한 바질 향! 정신이 금세 아득해질 것 같은 조합입니다.

다음날 과수댁은 미미코를 시켜 카잔차키스에게 오렌지 꽃물을 한 병 보냅니다. “선생님! 선생님께 선물로 드리는 오렌지 꽃물을 한 병 받아 오두막에 갖다 놓았는데요. (중략) 누가 줬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머리에다 바르시라고 그 여자분이 그러셨어요. 냄새가 좋게.” 동네 아이 미미코는 이렇게 말하면서 키득거립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다 알고 있거든요!”라는 이 아이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오렌지 꽃물을 바르는 건 그리스의 풍습인가 봅니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가 크레타에 온 첫날 묵었던 여관 주인 오르탕스 부인은 자기만큼 늙었지만 남자다운 조르바에 빠져 두 사람을 저녁자리에 초대합니다. 카잔차키스가 과수댁이 보내온 오렌지 꽃물을 받아들기 전에 있던 일입니다. 오르탕스 부인은 낡은 옷이지만 있는 한껏 화려하게 차려입고 목에는 노란 리본을 매고 그들을 맞습니다.

“오르탕스 부인은 머리를 말고 소매가 엄청나게 넓고 가장자리 레이스가 닳아 버린, 빛바랜 핑크 가운을 입고 있었다. 주름살이 보이는 목은 손가락 두 개 정도 두께의 노란 리본이 죄고 있었다. 오렌지 꽃물을 아낌없이 뿌리고 나온 게 분명했다. (중략) 정성을 다하여 푸짐하게 차린 상, 따뜻한 화덕, 화장하고 꾸민 몸, 오렌지 꽃물 향기···, 이 모든 인간적인 사소한 육체의 즐거움이 어쩌면 이다지도 빨리, 그리고 간단하게 엄청난 정신적 기쁨으로 변하는지!”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고’라는 노래로 꽤 많은 한국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그리스 오페라 가수 아그네스 발차(1944~ )는 ‘장미향수를 드리리’라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고’ 못지않게 아름답고 감미로운 노래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렌지 꽃향기를 놓고 쓴 카잔차키스의 문장들을 읽으니 장미향수보다 오렌지 꽃물이 더 순수한 것 같습니다. 장미향은 고혹적이고 요염하며 미묘한데, 오렌지 꽃향기는 복잡한 것 하나 없이 그냥 달콤하고, 순진하며, 있는 그대로의 향기라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과수댁은 카잔차키스와 밤을 보낸 다음날 불쌍하고 비참하게 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난 부활절에 일어난 비극입니다. 부활절 예배가 끝나면 교회에 마을 사람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홀로, 몰래 예배하러 나온 과수댁을 마을사람들이 집단 린치하고 날카로운 단도로 목을 그어 버린 겁니다. 마을사람들은 예배를 마친 후 광장에서 벌어진 부활절 축제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몽롱한 듯 땀을 뻘뻘 흘리며 춤추다가 과수댁을 발견하고는 터무니없는 복수극을 벌인 겁니다.

교회에 나올 때 과수댁은 오렌지 꽃다발을 안고 있었습니다. 카잔차키스가 과수댁과 전날 밤을 같이 보낼 때 보았던 꽃다발입니다. 그는 그녀가 부활절 날 성모마리아에게 바치려고 그 오렌지 꽃다발을 만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린치를 당하고 칼로 목이 그어져 쓰러진 과수댁. 그 옆에 나뒹구는 흐트러진 오렌지 꽃다발. 종교적 사랑이든 세속적 사랑이든 사랑에 오렌지 향기를 바치려던 과수댁, 그 향기가 달콤한 만큼 슬픔도 아스라이 솟아납니다.

크레타의 오렌지 꽃이 어떻게 생겼나 보려고 검색을 해봅니다.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인 오렌지 꽃 사진이 수십 장 뜹니다. 빨간 것, 흰 것, 분홍에 꽃잎이 밑으로 말린 것, 위로 펼쳐진 것, 둥그렇게 모인 것, 서너 갈래로 나뉜 것···. 이렇게 많아서야 어느 것을 과수댁이 꽃다발로 만든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어느 것으로 꽃물을 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핏빛 오렌지(Blood Orange)’라는 게 있고, 과육이 피처럼 검붉은 이 품종은 오직 지중해 지역에만 있다는 것은 알아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이 소설에서 오렌지 꽃 말고도 “샐비어, 레몬나무, 아직 꽃이 지지 않은 유도화, 야생 무화과와 거뭇한 캐러브콩나무. 갈대, 현삼, 은빛 올리브, 포도넝쿨, 모과나무, 석류, 고추, 박하, 로즈메리, 세이보리, 라벤더, 바나나, 수선화와 소낙비 내린 뒤의 싱싱한 크레타의 흙냄새, 초록빛 감도는 노란색의 부드러운 차양 같은 달”에 대해서도 써두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조르바는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쩌면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을 안을 수 있을까요?”라고 독백처럼 한탄하고 있는데 나는 그런 장면은 언급할 생각도 못하고 과수댁이 마지막까지 안고 있던 오렌지 꽃다발에만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가장 먼저 크레타로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