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유령이 홍콩을 흔들고 있다
2019-11-21 17:03
'시한부 자본주의' 청년들이 지금 미래를 묻는다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통치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은 거란이었다. 거란을 지금 중국사람들은 한자로 ‘치단(Qidan·契丹)’이라고 표기한다. 그 한자의 우리말 발음은 ‘글단’이다. 중국 북동부에 살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 유목민족이었던 거란족들은 자신들을 ‘키탄(Khitan)’이라고 불렀다. 거란족들은 당말송초(唐末宋初)의 혼란기인 서기 907년 야울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영웅이 나타나 요(遼)나라를 세우고, 태조(太祖)라는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중국을 요나라를 세운 종족인 거란족을 뜻하는 ‘카타이(Cathay)’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러시아 사람들은 지금도 중국을 ‘키타이(Kitay)’라고 부른다. 서비스가 깔끔하기로 이름난 홍콩의 항공사 ‘캐세이 퍼시픽’은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93년에는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으나 패퇴했다. 요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중앙아시아로 이동했다가 지배계층인 거란족들이 한족(漢族)과 몽골족들로 흡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 역사 공식 기록에 907년부터 1125년까지 218년간 지속된 요나라를, 한족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소수민족 거란족들이 통치하던 체제가 바로 ‘한인치한(漢人治漢)’, 한족들에 의한 중국 통치, 바로 ‘일국양제’였다. 거란족들은 다수인 한족들이 사회와 경제, 문화 시스템을 관리하도록 허용하면서도 통치권만은 거란족이 장악하는 시스템으로 요나라 218년을 유지했던 것이다. 요나라의 ‘한인치한’의 일국양제 통치 시스템 아이디어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몽골족의 원(元)나라와 만주족의 청(淸)나라에도 노하우가 전수됐다.
1982년 9월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당시 최고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과 마주 앉은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영국이 1840년 아편전쟁의 승리로 청조(淸朝)로부터 1847년부터 150년간 조차한 홍콩을 계속해서 관리해 주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때 덩샤오핑이 “홍콩의 안정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대처에게 던졌다. 덩샤오핑은 “홍콩의 안정은 홍콩과 중국의 경계선 안쪽에서 영국군복을 입고 방어하고 있는 구르카족 병사들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뒤 “홍콩의 안정은 홍콩 바깥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인민해방군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몇 백만의 사람들이 홍콩으로 유입되면 홍콩의 안정이 유지되겠느냐”고 경고했다. 회담을 마치고 인민대회당 밖으로 나온 대처 총리가 인민대회당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던 이야기는 사진과 기록으로 남아 있다.
홍콩의 주권을 1997년 6월 30일 중국에 반환하기로 약속한 대처에게 덩샤오핑이 제시한 홍콩의 통치 시스템이 ‘항인치항(港人治港)’, 곧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였으며, 50년간 중국은 홍콩의 국방과 외교권만 장악하고, 홍콩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정치·사회 체제는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일국양제’였다.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통치 시스템이 공존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 덩샤오핑의 뜻이었고, 그런 덩샤오핑의 약속은 1997년 7월 1일부터 홍콩에서 발효된 ‘홍콩 기본법(Basic Law)’ 제5조에 “홍콩특별행정구는 사회주의 제도와 정책을 실행하지 않고, 원래의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이는 50년간 불변이다(香港特别行政区不实行社会主义制度和政策,保持原有的资本主义制度和生活方式,五十年不变)라는 조항으로 남았다. 거란족들이 한족들의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 ‘한인치한(漢人治漢)’을 제시하면서 한족들의 사회·경제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켜주면서 통치권만 장악하고 요나라 218년을 유지했듯이,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를 인정하는 ‘항인치항(港人治港)’을 유지하면서 홍콩의 국방과 외교권만 장악한 채 홍콩의 기존 자본주의 체제는 50년간 지속할 수 있도록 한 ‘일국양제’가 적용됐다.
2019년 올해는 그때로부터 22년이 흐른 때이다. 앞으로 28년이 더 흐른 2047년이 되면 홍콩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2015년 12월 홍콩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에서 개봉된 독립영화 ‘10년(Ten Years)’을 보면 왜 홍콩 시위에 20, 30대 젊은이들이 주로 가담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독립영화 ‘10년’은 영화 제작 당시로부터 10년 후인 2025년의 홍콩을 그리고 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영화를 옴니버스로 묶는 형식으로 제작됐는데, 각각의 제목은 ‘엑스트라’ ‘겨울 매미’ ‘방언(Dialect)’ ‘분신자살자’ ‘현지 계란’ 등이다.
‘엑스트라’는 홍콩 정청이 2020년 보안법 제정을 추진하는 과정을 상정하고 있다. 보안법 제정 추진에 유리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조폭을 고용해 친중파 정치인들에 대한 암살 기도를 하는 사건을 조작하는 이야기이다. 이 단편은 50만 달러라는 거금을 받기로 하고 조폭으로 고용된 홍콩의 힘 없는 서민 두 사람이 암살 기도 현장에서 경찰에 사살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또 다른 단편 ‘방언’은 중화인민공화국 표준어인 ‘만다린(Mandarin)’을 구사하지 못하고 영어로 ‘캔터니즈(Cantonese)’라고 부르는 광둥어밖에 못하는 한 택시운전사의 불만을 그린 영화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영어를 잘 못해 택시운전사가 되는 데 애를 먹었던 이 운전사는 2025년 홍콩 정청이 “표준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택시운전사는 공항이나 관광지 등 중요 장소에서 영업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을 발표하자 먹고살기가 어렵게 돼 절망감에 빠진다.
‘분신자살자’는 홍콩이 사회주의 지역으로 변해가는 것에 항의하려면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하는데 홍콩 주재 영국 총영사관 앞에서 분신하는 사람들이 없자 한 80대 할머니가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현지 계란’은 중국어로 ‘본지단(本地蛋·홍콩 현지에서 생산된 계란)’이라고 써붙인 계란 가게에 2025년 빨간 완장을 차고 초록 군복을 입은 초등학생 홍위병들이 나타나 “왜 불순하게 본지단이라는 글자를 붙였느냐”라고 따지는 장면을 그렸다. ‘본지단’이란 말에는 중국 대륙 식품을 믿지 못하는 홍콩 사람들의 부정적인 관념이 담겨 있어 금지어로 올랐다는 의미이다.
한 마디로, 지난 6월부터 5개월 넘게 계속돼온 홍콩의 폭력적 가두시위에 홍콩의 20, 30대 젊은이들이 주로 가담하는 이유는, 홍콩의 주권 반환 50년이 흐른 2047년이 불과 28년 뒤, 이들 젊은이들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면 다가올 홍콩의 사회주의 세상에 대한 불안감을 의식의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주택가격은 홍콩의 평범한 직장인들이 30년간 저축을 해도 사기 어려운 지경인데 이미 2047년이 28년 뒤의 일로 다가왔으니, 홍콩 젊은이들에게는 홍콩에서 집을 장만하고 살아갈 미래 비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홍콩에서 전 세계 화교들을 독자층으로 해서 발간되는 아주주간(亞洲週刊)의 칼럼니스트 린페이리(林沛理)는 최신호에 실린 '이것은 한 바탕의 홍콩 혁명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폭도와 항쟁자들이 말하는 ‘시대 혁명’이 실제로 혁명인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혁명이라는 것이 권력과 사회 구조를 단시간 내에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라면 현재 홍콩인들이 목격하고 있는 것은 혁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른바 폭도들은 정부를 전복할 수 있는 무장역량을 갖추지도 못했고, 경찰과의 충돌에서 이길 승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진단했다. 시위에 가담해서 폭력을 행사한 홍콩 젊은이들이 구사하는 전략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시작한 자신들의 폭력행사로 경찰의 폭력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이폭양폭(以暴養暴)”일 뿐이라는 것이다.
홍콩의 주권을 영국으로부터 반환받은 2년 뒤인 1999년 9월 당시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출범 5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면서 “홍콩과 대만에 대해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보장해주는 일국양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홍콩과 대만의 자본주의가 대륙의 사회주의를 위험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하며 ‘정수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 즉 우물물이 강물의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홍콩의 기성세대들은 장쩌민의 이 경고의 말을 깊이 기억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19일자에서 “홍콩의 급진적 폭력행위에 대해 일부 외부세력들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미화하면서 반정부 급진주의 세력들을 옹호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 대학교수들은 “홍콩 사람들이 주권이 반환되기 전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영국 진압 경찰의 폭력이 두려워 시위 한 번 하지 않더니···”라며 불만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홍콩 젊은이들의 폭력시위는 무엇보다도 덩샤오핑이 설계한 일국양제의 기반을 흔들어 놓고 있으며, 2047년 이후 자본주의 홍콩이 사회주의 홍콩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에서 출발한 불안감이 홍콩 젊은이들의 폭력시위를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시진핑(習近平)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2047년 이후 홍콩의 미래에 대한 그림을 새로 그려주지 않는 한 이번의 시위가 진압되더라도 앞으로 또 다른 시위가 발생할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중국 대학가의 지식인들은 “만약 덩샤오핑이 살아있었다면 2047년 이후의 홍콩 미래에 비전을 그려주는 언급을 어떤 형태로든 했을텐데···”라며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앞으로도 일국양제를 적용해야 할 대만과의 통일 전망도 어두운 색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