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에 넘어진 광해군, 산비탈에 쓸쓸히 누웠다
2019-10-09 17:46
400년 지나도 그의 '명·청 실리 외교' 복권 안돼
'반정'이 씌운 역사의 굴레, 왜 그리 그에게 가혹한가
'반정'이 씌운 역사의 굴레, 왜 그리 그에게 가혹한가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있는 영락교회 공원묘지 정문으로 들어가 2차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도로변 철제 펜스에 '광해군 묘'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펜스 너머로 가파른 산비탈에 광해군 묘는 옹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광해군 묘로 가는 출입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광해군 묘는 다른 조선왕릉처럼 상시 개방돼 있지 않다. 문화재청 사릉관리사무소에 연락하면 직원이 와 문을 열어준다. 20세기 들어 광해군에 대한 국사학계의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사 개설서나 국사교과서에도 그를 혼군(昏君)으로 매도하는 기술이 없다. 그렇지만 광해군 묘에 와보면 그는 아직도 인조반정(反正) 세력이 들씌운 폐주(廢主)의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반정(쿠데타)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군으로 격하된 왕은 노산군(단종) 연산군 광해군 세명이다. 노산군은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됐다. 패륜의 악덕군주 연산군에 대해서는 현대의 사가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반정 세력의 의도적인 격하가 계속됐지만 그의 외교 정책과 국방대책은 친명(親明)사대주의적 세계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가 되어 분조(分朝)를 이끌고 일본과 전쟁을 치렀다. 친명반청(親明反淸)의 기치를 내걸고 광해군을 내친 인조반정 세력은 얼마 안가 나라를 말아먹었다. 망해가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불러들여 백성들의 시신이 길을 메웠고 수많은 여성들이 능욕을 당하고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아직도 광해군을 펜스 안에 자물쇠로 잠가놓고 있는 우리는 인조반정 세력의 자기합리화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꼴이다.
1623년 인조가 왕이 된 후 광해군 부부는 왕궁에서 쫓겨나 아들(폐세자) 내외와 함께 강화도에서 갇혀 살았다. 폐세자는 땅굴을 파 탈출을 시도했다. 폐세자가 파낸 흙을 폐세자빈이 받아내 밤새도록 옮겼다. 폐세자는 땅굴을 완성하고 밖으로 나왔으나 바로 붙잡혔고 인조의 명으로 자진(自盡)했다. 폐세자빈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이 궁에서 쫓겨나고 아들 내외를 가슴에 묻은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은 이해 10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성군부인이 먼저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묻혔다. 광해군은 19년을 더 살다 1641년(인조 19)에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부인의 오른쪽 묘에 들었다.
쿠데타 세력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친청반명(親淸反明)을 명분으로 삼았다.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궁에 유폐시켰다.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 이정표(李廷彪)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잠재적 왕위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광해군은 중국 대륙의 명청(明淸) 교체기에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균형외교 실리외교를 펼쳤다. 명은 조선에 병력과 함정을 제공하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광해군은 명이 후금의 누루하치에게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명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원병 1만명을 만주로 보냈다. 그러나 조선의 지원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금군 정예병력에 포위됐다. 강홍립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항복했다.
광해군은 내치((內治)에서 과오가 컸다.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의 10배 크기로 경덕궁과 인경궁을 건설하면서 벼슬을 팔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예조판서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金介屎)의 국정 문란을 방치함으로써 민심에서 멀어졌다. 결국 광해군의 몰락은 무리한 궁궐수축에 따른 재정난과 측근 관리의 실패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김개시는 개똥이를 한문으로 음차(音借)한 이름이다. 시(屎)는 똥 시 자다. 김상궁은 광해군일기에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계교가 많았다’고 묘사된 것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간신 이이첨이 김개똥에게 빌붙어 크고 작은 벼슬이 김상궁과의 협의를 거친 뒤에 낙점을 받았다. 이귀와 김자점이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광해군에게 들어갔지만 김 상궁이 두 사람을 비호해 유야무야 되었다. 김자점은 일찍부터 뇌물을 써서 김개시에게 연줄을 댔다. 궁궐의 기둥뿌리가 썩고 있는 것을 임금만 몰랐던 것이다. 영창대군의 모친 인목대비를 무던히도 괴롭혔던 김상궁은 정업원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가 쿠데타 소식을 듣고 민가에 숨었는데 군인들이 찾아내 목을 베었다.
광해군은 어머니의 묘소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죽은 지 2년 후 그의 유해는 제주도에서 진건읍 송릉리로 옮겨졌다. 생모 공빈 김씨의 묘소는 아들의 묘가 마주 보이는 산의 발치에 있다. 광해군이 왕이 되면서 공빈 김씨는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됐다. 1623년 3월 광해군이 폐위되자 빈으로 다시 돌아갔고 왕후의 시호와 능호도 모두 격하됐다. 다만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하였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묘소 앞에는 풍양조씨의 시조인 조맹의 묘가 있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 광해군 형제를 두었다. 임해군은 서(庶)장자로 광해군보다 서열이 앞섰지만 성정이 방탕하고 난폭해 세자가 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명으로 함경도로 떠나 근왕병을 모집하다가 주민이 붙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에 넘겨주었으나 석방협상 끝에 서울로 돌아왔다.
중국이 장자(長子)를 놓아두고 왜 둘째 아들을 왕으로 삼았느냐고 계속 문제 삼는 바람에 임해군의 명을 재촉했다. 명이 광해군 국왕 자격을 심사하겠다며 보낸 사신들에게 조선 조정은 수만냥의 은화를 바쳤다. 이후 명나라 환관들 사이에서는 '조선에 가서 한 밑천 잡자'는 풍조가 생겨나 광해군의 책봉례와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례를 주관하기 위해 왔던 사신들은 6만냥의 은을 긁어갔다. 광해군의 반명(反明)감정이 여기서 싹텄다는 시각도 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임해군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임금의 형은 결국 유배지 강화도 옆 교동도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수장(守將) 이정표가 독을 마시라고 핍박했으나 임해군이 따르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다. 인조반정 후에 임해군 살해는 이이첨의 죄상임이 드러났지만 광해군도 암묵적 동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복 동생 영창대군도 죽이고, 어머니가 같은 임해군도 죽인 것이다. 이들을 죽이는 데 신하들이 더 방방 떴다. 비정한 권력의 세계다.
광해군 묘 인근에 있는 임해군 묘는 봉분의 뗏장이 떨어지고 고사리가 침투했다. 장명등(長明燈)은 무덤 언덕 밑에 쓰러져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임해군 묘는 왕릉이 아니어서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안 한다. 후손이 보수해야 하지만 생활 집으로 바뀐 재실의 마당엔 잡초가 무성했다.
왕이 죽으면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최종 원고가 완성되면 초고들은 물에 빨아서 먹을 없애고 종이를 재활용한다. 그러나 '광해군일기'는 재정난을 이유로 인쇄를 하지않고 정서한 두 벌과 함께 중초본까지 보존해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깎아내린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임진왜란을 통해 병들고 상처입은 백성들을 치유하기 위해 궁중 내의 허준이 저술한 동의보감을 펴낸 것도 광해군의 치적에 속한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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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민족문화대백과사전
3.역사평설 병자호란 1, 2, 한명기, 푸른 역사
4.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역사비평사 간행
5.조선왕릉실록, 이규원, 글로세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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