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리 길 님 여읜 피눈물 정순왕후

2019-09-25 17:49
16세 남편 잃고 81세까지 살다간 비운의 여인

<4>단종비 정순왕후의 사릉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 집필


사릉은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왕릉이다. 쭉쭉 뻗은 금강송은 없고 가늘고 굽은 소나무들이 정순왕후의 능을 에워싸고 있어 애잔한 느낌을 준다. 
왕릉의 경역 안에는 다른 무덤이 있어선 안 되지만 사릉(思陵)은 해주 정씨의 묘역 안에 있다. 정순왕후는 81세까지 살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친정 식구들은 역적으로 몰려 모두 죽었고, 가산이 적몰돼 묫자리 한평 없었다. 다행히 문종의 외손자인 정미수의 배려로 해주 정씨 선산 한 귀퉁이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정미수는 비운의 여인 정순왕후의 시양자(侍養子)가 되기를 자청해 윤허를 받았다. 성씨도 다르고 살벌한 역모죄에 연좌된 여인을 감싸준 남양주 사람들과 해주 정씨들의 따뜻한 배려심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권력에 남편도 친정식구도 잃어

정미수의 어머니는 단종의 친누나인 경혜공주로 정순왕후가 외숙모가 된다. 죽은 지 177년 만인 숙종 때 남편이 단종으로 복위되자 정순왕후의 무덤도 능으로 승격되면서 능의 경역 안에 있는 해주정씨의 묘소들을 이장시켜야 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사릉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쭉쭉 뻗은 금강송은 없고 가늘고 굽은 소나무들이 능을 에워싸고 있다.  [김세구 전문위원]

봉릉도제조(封陵都提調) 최석정(崔錫鼎)이 숙종에게 아뢰기를 "사릉(思陵) 안에 정씨 집안의 여러 무덤이 이미 수백 년이 지난 것이 있으나, 정릉(貞陵)의 예(例)에 따라 그대로 두더라도 괜찮을 듯합니다"라고 건의해 숙종의 허락을 받아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태종이 즉위한 후 세자 책봉과 관련한 사감(私憾)에서 계모의 무덤인 정릉을 푸대접하면서 민가들이 능역 가까이 들어와 있었다. 현종 때 주인 없는 무덤에 가까웠던 정릉을 다시 왕후릉으로 격을 갖춰주었으나 이미 능역 안에 들어온 민간의 시설물은 그냥 인정을 해주었다. 단종비가 묻힐 곳이 없을 때 선산의 묫자리를 내주었는데 왕비릉으로 승격한다고 해서 해주 정씨 묘소들을 모두 이장하라고 하면 배은망덕하는 꼴이 될 것이니 정릉의 예를 끌어댄 것이다.

숙종은 죽어서도 단종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정순왕후의 무덤에 사릉이라는 능호를 내려주었다. 사릉 주변에 있는 소나무들이 영월이 있는 동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관찰해보면 후세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설화임을 알 수 있다. 사릉의 소나무들도 어느 쪽에 있건 광합성 작용을 하기 위해 다른 잡목이 없어 햇볕이 잘 드는 능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오후 4:19평생 외숙모 정순왕후 돌본 정미수

단종비릉의 오른쪽 편에는 정순왕후를 돌보다 먼저 죽은 해평부원군 정미수의 묘소가 있다. 왕비릉으로 추존된 정순왕후의 능은 규모가 작고 무인석과 병풍석도 없고 검소한 편이다. 이에 비해 정미수의 묘소에는 병풍석을 두르고 문무인석이 배열돼 있다. 정미수의 아버지 정종은 처남인 단종 편을 들며 세조에 거역하다가 처형됐다. 역신의 가족들에겐 연좌제가 적용됐으나 세조의 특명으로 어린 정미수는 살아남았다. 성종 때는 수렴청정을 하던 세조비 정희왕후가 뒤를 봐줘 충청도 관찰사, 한성 판윤 같은 벼슬을 지냈다. 정미수의 후손들은 사릉이 능으로 승격될 때까지 후손이 없는 묘소를 보살피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사릉에서 보아 왼쪽에는 정순왕후를 평생 돌보고 묫자리를 마련해준 정미수의 묘소가 있다. [김세구 전문위원]

정미수 묘소에서 바라본 사릉의 모습.[김세구 전문위원]

정순왕후는 단종보다 한 살 위였다. 14살 때인 1454년 2월 19일 혼례를 치르고 왕비로 책봉됐으나 단종과 함께 산 것은 3년뿐이다. 당시 문종의 상중이었고 단종도 혼례를 원치 않았지만 수양대군은 단종의 처지가 외로워 모든 사람이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원한다는 논리로 혼례를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들였다. 그래놓고 송현수를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과 관련해 처형했으니 왕의 장인을 만들어놓고 죽인 셈이다.

단종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부인과 딸들은 종이 되어 공신 집에 분배됐다. 그중에서도 미모를 갖춘 처자는 서로 가지려고 공신들이 다투었으니 불난 집에서 튀밥 주워먹는 형국이다. 세조실록 1456년 9월 7일 노산군 복위운동에 관련된 난신(亂臣)의 부녀자들을 공신들에게 노비로 나눠주는 대목이 나온다. 영천 부원군 윤사로가 도승지에게 "모름지기 건의가 받아들여진다면 송현수의 딸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정순왕후는 미모가 빼어났지만 송현수의 다른 딸도 미인이었던 모양이다. 한때 왕의 장인이었던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윤사로가 그 집안의 딸을 첩(노비)으로 챙기려고 욕심을 내니 왕조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이 못마땅했던지 인물평을 가혹하게 해놓았다.

‘윤사로가 정현 옹주에게 장가들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성격이 못돼먹었고 이재에 밝아 외방의 농장(農莊)이 있는 곳에 여러 만석(萬石)을 쌓아 놓고, 서울 제택(第宅)의 창고도 굉장하여, 몇 리 밖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무릇 주구(誅求)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사릉의 소나무 한 그루, 영월 장릉으로

정순왕후는 일생 동안 하얀 소복을 입고 채소반찬만 먹고 살았다고 한다. 아직도 낙산 끝자락에는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왕후가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영조가 200여년이 지난 뒤 정미수의 후손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직접 쓰고 바위에 새기게 했다(영조실록).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곳이 채석장이 되면서 영조의 글씨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정조 연간에 나온 한성부의 부지 '한경지략'에 따르면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이 있었다. 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계속해서 왕후에게 채소를 전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궁에서 나간 정순왕후에게 동대문 밖 연미정동(燕尾汀洞)에 집을 주었지만 받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왕의 사후에 후궁들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살아가는 정업원(淨業院)에 들어갔다. 정순왕후는 “내가 정업원 주지”라는 말을 할 정도로 정업원에 마음을 붙였다.
 

조선왕조의 후궁들이 왕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살던 정업원 자리에 청룡사가 들어섰다. 이 절 안에는 영조의 친필 '淨業院舊基'(정업원구기) 비석이 서있다. 궁에서 나와 정업원에서 평생을 보낸 정순왕후는 주변 사람들에게 스스로 "정업원 주지"라고 말했다. [불교신문 제공]

정순왕후는 노산군이 군사 50명에 호송돼 영월로 유배될 때 따라가다가 청계천 영도교에서 이별했다. 그러나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이 터지면서 결국 단종은 죽음의 길로 치달았다. 세조의 신하들은 잇따르는 역모의 근본 원인이 단종의 존재라고 봤다. 세조 3년 10월 21일 세조실록은 금성대군의 죽음에 관해 듣고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고 한 문장으로 적고 있다. 이 문장 앞에는 양녕대군과 정인지 등이 금성대군과 단종의 장인 송현수 등을 죽이라고 상소해 세조가 이를 받아들여 금성대군은 사사 (賜死)하고 송현수는 교형 (絞刑)에 처한 내용이 나온다. 대군들 중에는 세조 편에 가담해 권세를 누린 사람들도 있었으나, 금성대군은 맏형인 문종과 형제의 의(義)를 지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단종에 관한 죽음에 관한 사실이 처음으로 나온 것은 숙종 25년 1월 2일이다. 숙종은 하직하는 수령을 접견하고 격려하면서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간에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단종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영월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뜰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단종 대왕이 관복(冠服)을 갖추고 마루로 나와 찾아온 이유를 물었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늘 모시던 공생(貢生)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

숙종은 이같이 말하면서 "천도(天道)를 논해야겠으니 그 공생의 이름을 알수 있는 단서가 있으면 찾아내서 아뢰라"고 했지만 최석정(崔錫鼎)은 공생의 일을 덮어두어야 한다고 임금에게 간했다. "장릉(莊陵)의 위호(位號)를 이미 회복시켰고, 사육신(死六臣)을 포증(褒贈)하는 일까지 있었으니, 이는 성대한 덕이요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이 전에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尊諱)'는 의견을 대략 아뢰었습니다만, 이와 같은 일들은 마땅히 덮어두어야 합니다."

끝까지 형제의 의 지킨 금성대군 

세조 이후 조선의 왕들은 모두 세조의 핏줄이다. 노산군의 무덤을 장릉으로 추존하고 사육신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더 이상 진실을 캐는 것은 선대에 누가 된다는 최석정의 견해를 숙종은 존중했다.

공생은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이다. 공생이 활시위로 뒤에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노산군을 죽인 공생이 아홉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는 말은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 등에 기록돼 있지만 권선징악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것이다.
 

단종이 마지막 생을 마감한 영월부 관아. [문화재청 제공]

영조대에 편찬된 청구영언에는 왕방연의 애틋한 시조가 전하지만 실제 그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을 잃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을 가는구나>

사약을 들고 영월에 내려간 금부도사가 아니라 남편과 헤어진 뒤 64년을 홀로 살다 사릉에 묻힌 정순왕후가 지은 시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남양주문화원은 1999년 사릉의 소나무 한 그루를 영월의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권력투쟁의 잔혹한 승자보다는 패자의 눈물 젖은 스토리에 더 쏠리는 것 같다. 이광수가 1928~29년 장편소설 '단종애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후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야기는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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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 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단종애사, 이광수, 새움츨판사
4.조선왕조실록 3 세종 문종 단종, 이덕일,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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