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원이 이노오옴! ··· 이성계의 분노가 흐른 왕숙천

2019-09-10 17:19

<2>왕숙천과 풍양궁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평양 개성 영흥 경주 함흥 등 전국 곳곳에 있었으나 전쟁과 변란으로 소실돼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게 유일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 눈썹 위의 혹까지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전주 경기전 소장]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태종)은 조선왕조 창업 과정에서 결정적 고비마다 행동대장으로 나서 아버지(태조)를 도운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태조가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태조가 병석에 누워있을 때였다. 그는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형 방과(정종)를 세자로 옹립했다. 방원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태조가 아끼던 신하들도 도살했다. 조선왕조에서 서자(庶子)의 관직 임용을 막은 서얼차별 제도도 태종의 피해의식에서 비롯됐다.
 
태조가 8일 동안 머무른 '팔야리'

 방원의 잔혹성과 무도함에 환멸을 느낀 태조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갔다.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목도하기 위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단 말인가. 두 아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저세상에서 신덕왕후를 만날 것인가. 태종은 태조를 다시 모셔오기 위해 함흥에 차사(差使)를 보냈으나 소식이 끊기고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태조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찾아가자 비로소 서울로 왔다고 한다. 태조가 함흥을 떠나 남양주 왕숙천(王宿川)에 이르러 여덟번째 밤이 돼 “아 여덟 밤이로구나”라고 말했대서 ‘여덟밤이’ ‘여덟배미’ 또는 ‘팔야리(八夜里)’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다.

 태조가 이곳에서 팔일을 머물러 왕숙천과 팔야리가 됐다는 설(說)도 있다. 태조가 강무장(군사훈련장)이 있는 왕숙천 인근에서 여덟밤을 묵으면서 방원을 내치려는 모색을 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태종 연간에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이었던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군사를 동원해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고 태조를 복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태조는 한때 조사의 반란군의 군중(軍中)에 머무르기도 했을 만큼 반란에 관여돼 있었다(숙종실록). 팔야리에 태조의 유적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팔야1리 마을회관'이라고 쓴 큼지막한 간판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이성계가 왕숙천 변에서 여드레를 묵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 마을회관 간판에 남아 있다. [김세구 전문위원]


 왕숙천(王宿川)은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에서 발원해 남양주시를 관통해 흘러가다가 강동대교 부근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앞에서 엄현천 봉선사천 진벌천이 왕숙천에 합류하면서 큰 내가 이루어진다. 1861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여지도에는 왕산천(王山川)이라고 표기돼 있다. 왕산은 왕의 무덤이다. 이 하천 줄기를 타고 9기의 왕릉이 있는 동구릉(東九陵)과 세조의 광릉이 있어 '왕들이 잠든 하천'이라는 의미로 왕숙천이 됐다는 풀이도 있다.

 왕숙천은 전반적으로 강의 경사가 완만해 느리게 흐르는 편이다. 갈수기에는 강바닥이 드러나고 장마철이면 둔치 부근 둑까지 물이 찬다. 백로와 왜가리가 왕숙천의 과거와 현재를 아는듯 모르는듯 한가로이 물고기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왕숙천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백로와 왜가리[김세구 전문위원]

남양주시 한복판을 흐르는 왕숙천에는 모두 13개의 지류가 흘러들어오고 있다. [김세구 전문위원]

구리시는 1986년 남양주군 구리읍에서 시로 승격됐다. 한강 합류지점부터 진접까지는 자전거 도로가 연결돼 강바람을 맞으며 페달을 돌릴 수 있다. 남양주에 조성되는 3기 신도시는 왕숙천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왕이 잠들어 있는 강마을에 GTX가 들어오고 첨단 신도시가 들어서는 천지개벽이 이뤄질 판이다.

 왕숙천이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이르면 조선왕조의 4대 이궁(離宮)인 풍양궁(豐壤宮) 터가 나온다. 궁궐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란을 거치며 불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별궁터임을 알리는 비각만 남아 있다. 비각 안에는 영조와 고종이 세운 비석 두개가 나란히 서 있다. '대소인원 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쓰여진 하마비 (下馬碑)가 태종 때부터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임금이 계신 대궐 앞이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뜻이다.

 비석에는 '태조대왕재상왕시구궐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는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태조가 상왕으로 있을 때 살던 궁궐터라는 뜻이다. 고종황제도 친필로 '태조고황제소어구궐유지(太祖高皇帝所御舊闕遺址)'라고 썼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세운 안내문은 '태종 원년에 설치된 이궁'이라고 다르게 소개한다. 세종실록에는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세종 2년에 풍양궁을 건축했다는 기사가 있다. 세종실록에 부록으로 수록된 세종실록지리지는 풍양궁은 '태종이 거동하여 계시던 곳'이라고 적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자 영조와 고종이 각기 비석을 세웠는데 철저한 고증이 부족해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사냥 애호가였던 태종이 말년 보낸 풍양궁

 풍양궁은 왕이 한양을 떠났을 때 머무르던 별궁이다. 행궁(行宮)이라고도 한다. 풍양현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에 있었던 조선 초기의 행정구역이다. 풍양의 한자를 풀면 ‘큰 고을’ ‘비옥한 고을’을 뜻한다. 이곳은 서울 근교의 퇴계원 북쪽 너른 평야 지역이어서 예로부터 농작물의 생산이 많았던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 왕숙천은 풍요로운 역사의 땅을 적셔주는 젖줄이었다.

 풍양현은 서울 도성에서 40리(16㎞) 떨어진 곳이다. 걸어서 하루에 넉넉히 오갈 수 있는 거리다. 말을 타고 오가면 한나절이면 족하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2년 1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풍양현에서 이궁의 건축공사를 돌아보고 왔다는 기사가 있다. 세종 2년 7월 6일에는 태종이 풍양궁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처를 풍양궁으로 이미 옮겼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1418년 상왕전인 수강궁(壽康宮)을 신축한 뒤 옥새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경복궁을 나와 수강궁에 들었다. 그러다 별궁 풍양궁이 완공되자 별궁에서 주로 거처했다. 태종은 사냥 애호가였다.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다 낙마하자 따르던 신하에게 “사관이 모르게 하라”고 당부한 말이 실록에 적혀 있을 정도다. 산천경개 좋은 곳에서 사냥을 즐기면서 건강을 챙기려는 뜻과 함께 아직도 자신에게 쏠리는 권력의 추를 세종에게 완전히 넘겨줘 후계를 탄탄히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세종은 내시 이촌(李村)을 대신 보내거나 한달에 두어 차례씩 풍양궁으로 직접 문안을 올리러 갔다. 태종은 생의 마지막 2년여를 풍양궁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태종은 세종 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세종은 풍양궁을 찾지 않아 세종 23년에는 풍양궁에 풀이 무성하다는 최만리의 상소가 올라왔다.

 광릉 일대는 초목이 무성하고 산짐승이 많은 사냥터였다. 사냥과 군사훈련을 좋아했던 세조는 풍양궁을 군인 500명을 보내 수리를 시켰다. 세조실록에는 임금이 신하들과 사냥을 하는데 호랑이가 사람 두 명을 물어 다치게 해서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해주고 쌀과 술을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세조께서는 자주 풍양궁에 거동해 밤을 지내며 사냥해 짐승을 많이 잡았다. 광릉의 산에 짐승이 많아서 곡식에 해를 끼친다”며 “이양생이 군인을 거느리고 가 사냥을 하게 하소서”라고 성종에게 아뢰었다. 사관(史官)은 이를 기록하면서 '임금이 사냥에 빠져서 정사를 듣고 살피는 일에 게으르면, 한명회와 같이 아첨하는 신하가 넉넉히 공략할 만하며, 나라의 일이 그릇되게 할 수 있다''고 실록에 토를 달아놓았다. 사냥 마니아였던 연산군(성종의 아들)이 풍양궁 주변 이곳저곳에 금표(禁標)를 세우고 민가를 쫓아내고 백성의 출입을 막은 악폐를 사관이 예견한 듯 하다.

 

왕들이 군사훈련과 사냥을 할 때 묵던 풍양궁은 전란에 불타 없어지고 궁궐터임을 알리는 비각만 서민주택들의 한가운데 서 있다. [김세구 전문위원]


 연산군은 주변의 민가에서 백성들이 풍양궁을 바라보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풍양궁에서 바라보이는 민가를 모두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미색들을 불러 흥청망청 놀아나다 지금은 남양주 금대산 자락에 잠들어 있는 박원종에게 쿠데타를 당했다. 연산군을 폐하고 집권한 중종은 이따금 풍양궁에서 묵으며 군사훈련을 했다.

 풍양궁 비각 지붕 위에서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새들을 막기 위해 비각에 온통 그물을 쳐놓았는데 문화재를 새장에 가두어 둔 것 같다. 진접읍 내각리 궁궐터에 옛날의 영화는 간 곳 없고 4층 연립을 비롯한 서민주택이 들어차 있었다.<澤>
-----------------------------
자료지원 - 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 - 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 - 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조선왕조실록 2, 이덕일 저, 다산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