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수명,숙명인가 노력인가...다시 질문하는 인류
2019-10-03 14:00
박상철의 100투더퓨처 (7)
<100 to the future> 필자 박상철 교수 =이제 120세 시대로 나아가는 지금. 노화(老化) 연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박상철 교수의 ‘100 to the future(백, 투더퓨처)’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박 교수는 서울대 의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30년간 서울대 의대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과기부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전남대 연구석좌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노화 분야 국제학술지 ‘노화의 원리’에서 동양인 최초 편집인을 지냈고 국제 백세인연구단 의장, 국제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노화 연구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노화이론을 세운 그의 논문은 과학저널 ‘네이처’지에 소개됐습니다.
<100 to the future>는 100세까지 보편적으로 사는 미래에 대비하자는 의미로 영화 '백투더퓨처'의 미래 귀환 뉘앙스를 차용한 시리즈 제목입니다. 이제 우리는 100세 시대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앞당겨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그 길어진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건강하고 풍요로운 내일에 대해 실감나게 짚어나갈 계획입니다.<편집자주>
선사시대부터 불로장생을 희구하여 온 것은 인류의 근원적이고 공통적인 속성이었지만 동양과 서양의 문화권에서 불로장생을 염원해온 모습은 매우 다르다. 우선 서양에서의 불로장생에 대한 인식부터 먼저 살펴본다. 서양 문화의 실질적 근원인 그리스철학을 바탕으로 구축된 생명에 대한 개념은 로마를 거쳐 기독교 문화권으로 승계되고 확대 발전되어 왔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서는 생명의 한계에 대하여 인간과 신(神) 간에 분명한 구별을 짓고 있다. 신은 영생하는 불로불사의 존재이나 인간은 일정한 기간만이 허용되는 제한적 숙명이 있다고 보았다. 신과 인간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고 차별화하였으며, 가끔은 인간이 신에게 탄원하여 더러 수명을 연장해볼 수가 있기도 하지만 결국 그러한 시도는 처참한 결과를 초래함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죽지 않고 천년을 넘게 살았지만 몸은 닳아 사라져버리고 목소리만 남은 신을 사랑한 여인 시빌레의 비극이나, 신을 사랑하여 죽지 않고 오래 살았지만 결국 몸이 말라 비틀어져 매미로 변해버린 남성 티토노스의 경우가 그 사례이다. 인간 최고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경우는 더욱 안타깝고 참혹하다. 12가지 대업을 이룰 만큼 신과 대등할 만한 역량을 가졌던 헤라클레스는 반신반인의 존재로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원한을 품은 네소스의 꾀임으로 질투에 찬 부인 데이아네이라가 입혀준 히드라 독이 묻은 옷을 입어 살이 찢기는 고통을 받으며 결국 스스로 불 속에서 죽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였다. 아무리 절대지존의 헤라클레스일지라도 인간인 이상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는 엄정한 결과였다. 이와 같은 신화는 인성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강한 자일지라도 죽음 앞에 굴복하고 만다는 사실을 적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신과 인간의 이분법적인 구분은 신을 절대적 숭배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런 전통의 연계상에서 기독교는 신인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 간에는 생명의 한계에 대한 차별이 있지만,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부활되고 하느님이 계시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영생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반면 동양에서의 불로장생에 대한 인식은 서양과 전연 달랐다. 불로장생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진시황과 같이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였다. 그래서 불로초 탐구가 시작되고 연단술이 발전하였다. 더욱 제자백가의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한 중국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구별을 거부하는 경향이 높아 있었다.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달생(達生)과 인간의 모든 소양을 풍요롭게 하려는 양생(養生)의 노력을 통해서 인간이 최고의 경지인 지인이나 달인에 이를 수 있으며, 이들은 바로 신과 다름없는 선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수명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신체적 능력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가능성을 향한 도전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서 백년의 수명이 아닌 천년까지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도교를 중심으로 파급되었지만 유교나 불교에도 이러한 철학이 스며들어 민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간수명의 한계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노력 즉 수행의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수명을 늘이고 생체기능을 증진하는 일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가능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불로장생에 대한 인식이 전연 다른 철학이 인도문화권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생명체의 생명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순환되는 체계의 일부라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바로 윤회(輪廻, Samsara) 사상이다. 모든 생명체는 이생에서의 인간이 저승에서는 개미, 개, 소, 뱀 등으로, 나중의 생에서는 다시 인간으로 윤회할 수 있다는 개념은 유럽이나 중국 문화권에서의 생명에 대한 철학과는 전연 다른 이질적인 사상이었다. 이승에서 살아있는 동안 행한 업(業, Karma)에 따라 다음 생애에서 존재의 형태를 결정하는 질서(秩序, Dharma)에 의한 윤회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윤회 사상에서 제안된 생명의 무한성은 생명이 유한하다고 믿어왔던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나아가 영속되는 생명의 무한성이 오히려 문제가 됨을 지적하고, 세상에서 업(業)으로 맺게 되는 인연(因緣)의 굴레를 금욕과 절제의 삶을 통하여 벗어나 결국 해탈(解脫, Moksha)의 경지에 이르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본디 생명은 일회적이고 한정적이라고 보는 경우에는 이를 연장하는 것만이 지상의 목표였다. 연장의 방법으로 신에게 부탁하는 길을 택한 서양적 사고와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이를 쟁취하려는 동양적 사고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삶에 대한 태도, 살아가는 방법, 삶의 가치 등에 대하여 바라보는 시각이 전연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저변으로 하여 고대 동서양 문화의 차이가 빚어졌다고 생각한다. 더욱 생명의 일회성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믿어온 인류에게 생명이 순환적이고 윤회적이라는 지적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막연한 영생(永生)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생명이 돌고 돌아 끝없이 이어져 간다는 생각은 숫자의 무한이라는 개념을 창안하게 되었고 생명의 무한성에 대한 전연 다른 생각을 하게 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영생을 염원하여 온 것과는 달리 생명의 지속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역설적으로 이러한 윤회의 고리를 끊어내는 일이 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게 되었다. 윤회의 고리를 끊어 모든 인연의 굴레를 벗어난다는 것은 생명에의 집착을 털어내 버리는 일이다.
인간 생명 한계의 결정 요인이 숙명적으로 주어진 운명인가 아니면 인간의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가라는 인식의 차이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엄청난 파급효과의 차이를 가져왔다. 그 결과 철학, 종교, 예술, 과학 등의 발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더욱 역사적으로 볼 때 차별화된 생명을 바라보는 생각들은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특정사상만이 아니라 다양한 개념들이 있어 왔음을 이해하고 생명에 대한 보다 개방적 사고를 하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