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치(無恥)의 나라③] 조국 때문에 식언(食言)한 '문대통령 취임사'
2019-09-26 07:59
# 부끄러움을 아는 게 왜 용기인가
공자는 ‘知恥(지치)는 近乎勇(근호용)’(중용 20장)이라 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용기에 가깝다는 뜻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일은, 태도를 바꾼다. 조 장관이 지난 인사청문회 때 했던 그 태도를 180도로 돌리는 일. 그에겐 그 용기가 필요했다. 공자를 추앙한 주희는, 저 말에 대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곧 용기는 아니다”라고 거꾸로 풀면서, 하지만 공자가 말한 뜻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지식인의 마음가짐을 바로세우는(起儒, 기유) 일을 해낼 수 있기에, 용기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석을 달았다.
조국의 무치(無恥)는, 우리 사회 지식인 정신이 쓰러지고 있는 풍경이다. 진영의 문제도, 여야의 문제도, 혹은 조국 개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가책이 사라진 지식인이 스스로 정의를 자임하려는 일이 정상적인 세상을 어떻게 난도(亂刀)할지 어찌 알겠는가.
조국 법무장관을 여론의 역풍에 아랑곳않고 기용한 문재인 대통령은, 굳센 소신을 지닌 분임에 틀림없지만 그 일이, 스스로 한 말들을 얼마나 많이 식언(食言)하는 일인지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대통령의 말 중에 취임사만큼 국민의 뇌리에 박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조국 사태는 이 취임사의 신용을 누덕누덕한 누더기로 만들어 놨다. 지금 다시 읽으면 행간마다 조 장관이 떠오를 만큼, 언행 불일치의 치명타를 입혔다.
# 조국 임명 강행에 누더기 된 ‘문대통령 취임사’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예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힘들었던 지난 세월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습니다. 대통령은 바로 그 질문에서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대학생들까지 촛불을 들고 ‘이건 나라냐’라고 묻고 있다.)
“전국적으로 고르게 인사를 등용하겠습니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의 대원칙으로 삼겠습니다.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일을 맡기겠습니다.”(정치 원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그들이 ‘탕평인사’를 말했을 때 뭐라고 답변했던가. 적폐청산부터 해놓고 고려하겠다고 시간을 물리지 않았던가.)
# ‘기회 평등, 과정 공정, 결과 정의’ 이 말을 비웃는 지금
“거듭 말씀드립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상식대로 해야 이득을 보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소외된 국민이 없도록 노심초사 하는 마음으로 항상 살피겠습니다.”(조국의 딸이 받은 ‘특혜와 반칙’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에 대해선 과연 살폈는가.)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제가 했던 약속들을 꼼꼼하게 챙기겠습니다. 대통령부터 신뢰받는 정치를 솔선수범해야 진정한 정치 발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 치지 않겠습니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습니다. 공정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조국 법무장관의 수사와, 국민여론, 그리고 장관 임명과정을 돌이켜보면 이 말이 적절했는가.)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낮은 사람, 겸손한 권력이 돼 가장 강력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광화문시대 대통령이 되어 국민과 가까운 곳에 있겠습니다. 따뜻한 대통령, 친구 같은 대통령으로 남겠습니다.”(교수들이 3000명 이상 서명을 하고, 대학에선 촛불을 들고 기회의 불공평을 따지고, 야당에선 줄줄이 삭발을 하고 특검을 거론하며 장관 해임을 외치는데, 낮은 사람이 되려는 대통령은 어떤 소통을 했던가.)
# 도덕적 권위 무너지면 개혁의지 불타도 결국 공염불
2017년 5월 10일에 했던 말을, 2019년 9월 25일에 읽는 마음에는 참담함이 일어난다. 2년 4개월 만에 대통령의 말이 스스로 얼마나 멀어져 왔는지를 돌이켜 부끄러워할 수 있다면, 아직 염치가 남은 나라일 것이다. 지금 조국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 ‘나라’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나라가 나라여야, ‘검찰개혁’도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개혁은 쉽지 않다. 전 중국 역사를 통틀어 성공한 개혁으로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 딱 두 번밖에 없다고 한다. 진(秦) 효공 때 상앙이 한 변법개혁과 조(趙) 무령왕의 호복(胡服)개혁을 꼽는다. 진나라를 부국으로 만들어 훗날 천하통일의 기틀을 다진 변법개혁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누구보다 솔선해야 할 태자가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까닭은 위에서부터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태자를 처벌하려 했다. 차세대 제왕을 벌줄 수는 없었기에 태자의 스승과 비서를 엄벌에 처한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진나라 백성들은 법을 목숨처럼 지켰다.
저 전제군주의 나라에도 그게 통했다. 굳이 효공을 문대통령, 태자를 조국장관, 상앙을 윤석열총장이라고 유치하게 연결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개혁은, 오직 국민의 신뢰에 기반한 도덕적 권위에서 나온다는 것을 역사는 오늘 대한민국에게 가만히 말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두면 될 일이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