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봉준호와 이춘재가 영화와 현실서 벌인 숨바꼭질
2019-09-21 09:14
[낱말인문학]봉감독은 왜 살인사건에 '추억'이란 표현을 썼을까
# 새디즘에 가까운 변태적 관점?
이 영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사뭇 꺼림칙했던 것이 '추억'이란 말이었다. 여성 10명을 무참히 연쇄적으로 죽인 사건에, 아무리 영화라지만 '추억'이라는 뷰프레임을 붙이는 건 '아니다' 싶었다. 새디즘에 가까운 변태적 관점이 아닌가.
2003년 당시 신예 감독이었던 봉준호로서는 당연히 뭔가 자극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제목을 달고 싶었을 것이다. 그 자극을 뺀 정직한 제목이라면 '살인의 기억' 정도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추억'이라는 위험한 낱말을 골랐을까.
# 전두환 시대의 역사적 내면을 담고 싶었다?
이 영화에 시대적 혹은 역사적 내면을 부여하는 관점도 있다. 스토리가 단순히 화성 사건을 변주하는 것을 넘어서서, 군사정권 시절의 '살인적인' 권력의 공기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연쇄살인 사건이 시작됐던 1986년은 전두환 통치의 말기였다. 이후 여성들이 거듭 죽어나간 기간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을 짓누르는 폭압의 시대와 겹치는 때였다. 아무 죄없이 희생당한 국민들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영화는 시대적 '주름'을 접어넣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그 격한 시절을 한번쯤 찬찬히 돌아보는 '의미'로서의 '추억'이, 동의할 만한 수준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관객이 유추해내기는 쉽지 않다. (저런 '추억'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런 깊이로 영화의 내면을 들여다볼 만한 여유를 지녀야 하는데, 상당한 이해력을 요구하는 표현을 과연 대중영화의 제목으로 채택했을까.)
아마도 영화의 원래 제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서 골랐을 가능성도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살인의 추적'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박두만 형사다. 그가 살인을 추적했던 기억을 풀어놓는 형식이니만큼 이 제목이 정상적이고 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봉감독은 여기에 성이 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른 제목은 '화성의 추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제목 또한 흥미롭고 직관적인 장점이 있어서 미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제목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특정 지역의 참극을 떠올리게 하는 일도부담스러운데, 그 지명을 제목에까지 담으면, 지역 주민들을 그야말로 두번 죽이는 일이 된다. '화성의 추억'이란 제목이 나왔던 까닭은, 형사가 화성사건을 추적하던 일종의 '수사 추억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성의 추억'이 부담스럽다면, 좀 길지만 '연쇄살인 추적형사의 추억'으로 달아주는 것이 훨씬 영화 제목다운 서비스일지 모른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고민하다보면, 이 말 저 말 곁말을 쳐내고 '살인의 추억'이란 좀 뒤틀린 표현이 슬그머니 도출된다.
# 제목의 열쇠가 된 장면, 살인현장 재방문
물론 저 말이, 사람 죽인 추억이 아니라, 살인사건을 쫓던 자의 고단하고 답답했던 기억을 그렇게 표현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영화 속에서 박두만이 범죄 혐의자를 대하는 태도에선, 권위주의 시대의 잔혹과 비민주적 행태가 뚝뚝 흐른다. 그런 형사의 관점에선 처참한 살인 현장들이 '추억'같이 기억될 수 있을까.
'추억'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박두만이 형사 생활을 청산한 뒤 화성 살인현장을 찾는 장면 때문이라는 관점도 있다. 영화의 백미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거기서 옛 삶의 추억을 떠올리며 현장을 유심히 들여다 본다. 그때 지나가던 한 아이가 "그것을 왜 보느냐"고 물었을 때, 전직 형사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뭐라고 답할 게 없어 "그냥 좀 봤다"고 말하자, 아이는 얼마 전에도 누군가가 여기를 그렇게 보더라는 '팁'을 무심코 던져준다.
그 누군가는 살인마일 가능성이 있다. 박두만은 영화에서 "살인마는 반드시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말을 강조했다. 살인현장을 두 사람이 다시 찾아왔다. 범인(성공한 살인을 추억하는)과 형사(수사에 실패한). 왜 현장을 찾아오는가. 이유는 없다. 바로 '살인'을 추억하기 위해서이다. 추억하는 이유는 다르다. 형사는, 미완의 수사에 대한 깊은 미련으로 혹여 놓친 단서가 있을까 싶어 서성거리는 본능적 직업의식이다. 범죄자는 자신의 범죄가 완성된 것을 즐기고 싶은 자기 만족감의 발로나 과시일 가능성이 있다.
# 봉준호는 그 도랑 속에서 두 눈이 마주치는 걸 봤다
봉준호는 저 도랑의 살인현장 장면을 '추억'이란 말로 집어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전직형사의 추억을 빌미로 하고 있지만, 거기에 온 범인의 시선이 닿았던 곳과 '추억 지점'이 정확하게 겹친다. 형사도 다시 보고 범인도 다시 봤던, 그 지점이 바로 '첫 살인'이 일어난 원점이다.
'추억'이란 말은, 봉준호가 이 영화를, 현실 세계와의 강력한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태도를 노출시킨다. 이 야심찬 감독은, 감히 화성 연쇄살인범과 '눈'을 마주치고자 한 것이다. 그 눈을 마주치는 접점은 바로, '추억'이다. 이 잔혹한 범인이 자신이 해놓은 일을 자랑스럽게 돌아보기 위해 살인 현장을 찾는 심리처럼, 자신의 일을 다시 풀어놓은 추억의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영화의 끝장면에서 관객이 민망할 만큼 박두만이 스크린 밖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은, 관객 중에 들어있을지 모르는 살인범과 눈싸움을 벌이는 시도였다.
# 영화와 현실이, 진실의 눈을 마주치는 상상
이 영화감독은 살인마와의 눈 맞추기를 통해, 어떤 소통을 하기를 원했고, 그가 영화를 보면서 공포감 같은 감정을 느끼고 어떤 행동을 취하기를 바랬을지 모른다. 그 행동은 바로 미궁에 빠진 사건의 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을까.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 현실에 간섭하고 현실을 바꾸는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화성 살인범을 향해 쏘는 '추억'으로 입증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최근 살인범을 DNA조사를 통해 찾아낸 뒤, 봉준호는 살짝 허탈했을지 모른다. '살인의 추억'을 개봉했을 때, 그는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봉준호가 의도했던 대로, 그는 이 영화를 보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범인으로 특정(特定)된 이춘재와 교도소 생활을 한 재소자가 한 언론(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이씨와 부산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2년 동안에 영화 '살인의 추억'이 3번 이상은 상영됐다"고 밝혔다. 교도소에서 영화를 틀어주는 이유는 교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연쇄살인을 다룬 작품이 그토록 빈번하게 나왔을 가능성이 적다는 반론도 있으나, 적어도 이씨가 동료 수감자와 함께 '살인의 추억'을 봤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그런데 범인 이춘재는 오랜 재소생활을 거치면서 모범수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 있었다. 영화로 재현된 범죄현장을 돌아보는 이춘재의 시선에서 어떤 특별한 감정을 눈치챘던 재소자도 없었던 듯 하다.
# 노려보는 송강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영화의 도발은, 현실의 뜻밖의 변수(구속 수감)에 좀 시시해진 감이 있지만, 봉준호는 오랫 동안 화성 살인범과 자신의 분신인 송강호가, 객석과 스크린 사이에서 서로 '추억'의 눈을 맞추는 꿈을 꾸었고, 이 상황은 영화와 현실의 접점에서 일단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제목 '살인의 추억'은 이런 말 건네기의 암호같은 것이었다.
"어이, 살인마. 영화를 보면서 살인의 추억을 되새겨 보게. '나'는 화면 속에서 네가 누구인지 뚫어지게 바라볼 테니까. 완전범죄는 없어."
이 메시지를 이제 이춘재는 수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살인범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에 대한 진술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더욱 철저히 자신을 숨기며, 가석방으로 감옥을 나가려는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봉감독이 상대적으로 낭만적이었다면, 살인범은 상상보다 훨씬 차갑게 현실적인 행동을 해나가고 있었다.
봉감독이 객석을 노려보며 찾았던 '범인의 눈'과, 이춘재가 영화 속을 보며 만났던 '형사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 냉혹한 살인범의 '추억'이 미세하게 흔들렸을지라도 영화는 영화일 뿐, 그를 바꿀만한 현실적 위력을 지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