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볼턴의 퇴장과 폼페이오의 충성심
2019-09-22 14:48
2016년 초 美 공화당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두고 당시 경쟁자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공화당을 인수하려는 사기꾼(con artist)'이라고 공격했다. 당시 캔자스주 3선의 하원의원이던 마이크 폼페이오 현 국무장관은 루비오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트럼프를 좌절시키기 위해 루비오 상원의원에게 후보 경선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했다. 그해 3월 5일 캔자스주 코커스(당원대회)에서 루비오의 찬조 연설에 나선 폼페이오는 트럼프가 당선이 되면 "우리의 헌법을 무시하는 독재적인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의 병사는 전쟁 범죄라도 대통령의 명령을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겨냥, 미군은 헌법의 수호를 맹세할 뿐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트럼프는 자신을 열받게 하는 연사가 누구인지 신상 파악을 지시한다. 몇 분후, 폼페이오는 "이제 서커스의 불을 끌 때"라며 연설을 마친다. 이전에 전혀 만나본 적이 없던 두 사람 사이 인연의 첫 연결고리 장면이다. 뉴요커 등 미 주요매체들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퇴진으로 트럼프 행정부에서 외교안보 라인의 '원톱'으로 우뚝 선 폼페이오 국무장관(56)에 대해 기사를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는데 여기저기 새롭고 흥미로운 내용이 적지않다.
그해 5월 들어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수 확보에 성공하자, 폼페이오는 달갑지 않지만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 대선 후보 선거 과정에서 폼페이오를 비롯한 많은 공화당원들은 '괴짜' 후보 트럼프가 내세운 정강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다. 폼페이오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아메리칸 파워(American power)를 기반으로 전 세계 질서와 안정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보수파이자 국제주의자이다.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와 군 장교 시절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전통적 보수색채는 트럼프가 내세운 미국 우선주의와 궤를 달리할 수 밖에 없었다. 트럼프 후보는 미국이 언제까지나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수 없다며 미국의 개입주의 외교노선 탈피를 강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오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함께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자리를 거친 후 외교 수장인 국무장관을 역임하면서 트럼프 곁을 무려 31개월 동안이나 지키고 있다. 충동적이며 불 같은 성격의 트럼프와 의견 충돌로 외교·안보 핵심 인물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그의 곁을 떠났지만, 한때 트럼프를 조롱했던 폼페이오(56)가 오래 살아남고 그의 '복심'이 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트럼프의 조롱꾼에서 충성맨으로 자신의 모습을 재빠르게 탈바꿈시킨 점이다.
폼페이오는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등 주요 국제 현안에서 상당히 강경한 입장을 취해온 '매파'로 분류된다. 그는 트럼프와 정책적 견해가 달라도 적어도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대통령과 이견이 있다고 절대 말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그의 성공 비결로 가장 많이 언급된다. 이란 문제와 관련, 정권 교체까지 주장하며 강경한 태도를 취했던 폼페이오는 이란과의 전쟁은 피하고 싶은 트럼프와 다투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설득이 실패해도, 폼페이오 장관은 트럼프의 결정을 존중하고 옹호한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토머스 라이트 외교 담당 전문가는 "폼페이오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만 트럼프가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그와 한배를 탄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폼페이오를 '예스 맨'이나 '아첨꾼'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두 사람의 완벽한 호흡과 조화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의 '찰떡 공조'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의 트럼프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뉴요커는 "국무장관은 대통령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폼페이오의 최근 공개석상 발언을 상기시켰다. 그를 "트럼프 엉덩이를 쫓아가는 열추적 미사일(a heat-seeking missile for Trump’s ass)이라고 비판한 외교관도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과 이란, 아프카니스탄 등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자신의 강경한 입장을 숨김없이 직언하며 자존심 강한 트럼프의 분노를 자아내던 볼턴 전 보좌관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트럼프도 이런 폼페이오를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한다. 자신은 "모든 사람들과 다툰다. 폼페이오만 빼고"라고 지난해 뉴욕 매거진 인터뷰에서 말한 적도 있다.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설에 휩싸였던 볼턴이 '퇴출' 당한 데 이어 자신의 휘하에 있던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무부 인질문제 대통령 특사가 새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되면서, 미국 외교·안보 역사에서 폼페이오 시대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리비아 모델'(선(先) 핵 폐기-후(後) 보상)' 주장 등 대북 초강경 자세로 북한을 몰아세웠던 볼튼의 퇴장으로 북한 비핵화 협상도 속도를 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을 해임한 것은 북·미 관계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하며 북·미 간 실무접촉은 2∼3주 안에 열릴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문 특보는 폼페이오 장관에 대해 "조금 보수적인 면은 있지만, 미 육사 출신으로서 명령에 상당히 익숙하다"는 인물평을 내놨다.
지난 6월 말 트럼프는 한국 방문 당시 장녀인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선임 보좌관을 대동했다. 그는 마지막 일정으로 오산 미 공군기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방카와 폼페이오를 연단으로 함께 호명했다. 장병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가운데, 트럼프는 폼페이오와 이방카를 '미녀와 야수'라고 치켜세웠다. 폼페이오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