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희 칼럼] 미디어, 문화산업 그리고 문화자본

2019-09-17 10:15

 

[노창희]


지난주는 우리나라 최대 명절 추석이었다. 농경민족이었던 우리 조상들은 봄과 여름의 수확을 추수하는 데다 만월이 뜨는 시기였기 때문에 추석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은 추석이 그만큼 풍성한 시기임을 은유하는 표현이다. 현대로 넘어와서 추석은 방송, 영화와 같은 미디어 산업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로 자리 잡았다. 방송사들은 추석 특집 방송을 편성하고 극장에는 추석을 겨냥한 대작들이 대거 개봉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디어를 소비하는 이용자 입장에서 추석을 맞이하는 감회는 갈수록 조금씩 심드렁해진다. 나만 그런 것일까?

이제 추석을 기다려 추석 때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콘텐츠나 행사는 많지 않다. 가령, 방송사들이 편성하는 추석 특집 편성 영화를 꼼꼼히 챙겨보는 시청자들은 과거와 비교할 때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영화든, 드라마든, 음악이든 이용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매체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추석이라는 명절 이벤트가 특정한 방향으로 미디어 소비를 유도하기는 어렵다.

국내의 미디어, 문화산업이 크게 발전한 것도 추석이라는 명절을 산업적인 관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게 만든다. 횡적인 관점에서 시장 규모가 제한되어 있던 시기에는 종적인 관점에서 특정 시기에 소위 ‘대박’을 내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콘텐츠를 해외로 판매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던 시기에는 추석과 같은 특정한 이벤트가 갖는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내 아티스트들이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과거에 비해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식처럼 받아 들여져 왔던 미디어,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어 가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문화라는 개념은 태생적으로 광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구에서 ‘경작하다’라는 의미로 시작된 이 개념은 문화연구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정의를 빌리면 ‘전반적인 삶의 양식’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방송, 영화, 공연 등 특정 장르로 국한되어 왔던 것이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미디어 분야에서 융합의 진전, 문화와 기술의 합성어인 CT(Culture Technology)의 발전은 협의의 문화로 분류되었던 장르들이 전 영역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촉진시키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동력 중 하나로 평가받고 데이터 기반 서비스와 사물인터넷은 미디어, 문화 관련 산업과 생활과 관련된 서비스와의 관련성을 높이고 있다.

2019년에도 대한민국에 의미 있는 문화적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BTS는 웸블리를 가득 채웠으며, 봉준호 감독은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이제 대한민국을 문화적으로 변방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문화적 중심이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국가 성장동력으로서의 미디어 산업, 문화콘텐츠산업 육성과 함께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문화적 기반 구축도 중요하다. 국가 전체의 문화자본을 높이는 방향으로 미디어, 문화산업의 발전을 유도해 나가야 한다. 문화자본은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계층 간의 불평등을 분석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지만 이를 적용하여 사회 전체의 문화자본을 확충해 나가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적 변화, 기술의 발전을 고려할 때 국내 미디어, 문화산업의 발전과 질적 성숙을 통해 국가 전체의 문화자본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긍정적인 변화들을 주로 언급했지만 글로벌 사업자들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디즈니, 아마존과 같은 글로벌 사업자들도 OTT(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국내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글로벌 사업자들이 혁신적인 기술과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플랫폼을 구축한 반면 국내에서는 아직 경쟁력 있는 차별화된 플랫폼 기술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사업자는 여전히 소수이며, 플랫폼이 늘어나고 있으나 이를 채울 수 있는 콘텐츠는 부족한 상황이다.

이처럼 미디어, 문화산업과 관련해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성과와 국내만의 고유한 한계, 기회와 위기가 공존하는 시점이다. 미디어와 문화산업이 중요한 이유는 산업적 가치 이전에 고유한 정치, 사회, 문화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 문화산업은 단순히 산업적 경쟁력의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문화자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미디어 산업, 문화산업이 몇몇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는 한정적인 영역이 아니라 전국민의 생활 전반과 두루두루 연관을 맺고 있으며,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연관성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미디어와 문화산업을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미디어와 문화산업이 궁극적으로 국가 전체적인 문화자본을 축적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