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연해주 고려인을 기리며
2019-09-02 18:42
조국 정국으로 뜨거운 지난주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조용히 지났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는 519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110년 전 그해 여름도 뜨거웠다. 여러 선비들은 자결로써 부끄러움을 대신했다. 매천 황현은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며 목숨을 끊었다. 올해는 기려야 할 역사적 사건이 여럿 있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수립 100주년(4.11일)이 그렇다. 가파른 여야 대치 정국에서 경술국치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날 러시아 크라스키노(延秋) ‘동의단지동맹비(同義斷指同盟碑)’ 앞에 섰다.
‘돌바내’ 회원들과 함께였다. 검은색 비석은 연해주 하늘을 향해 곧추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 약지가 없는 손바닥을 새긴 음각은 도드라졌다.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지사 12명은 1909년 2월, 약지를 잘랐다. 조국 독립을 염원하면서다. 그리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적었다. 무엇이 그들을 이역만리 동토로 이끌고, 단지(斷指)를 결행하게 했을까. 생각하면 숙연하다. 안중근은 여덟 달 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단지동맹에서 뜨거운 결의는 제국주의 심장을 관통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언덕에 서면 루스키 섬이 보인다. 섬에서는 푸틴이 심혈을 기울이는 동방경제포럼이 열린다. 푸틴은 동방정책을 야심차게 추진 중이다. 신한촌은 해외 독립운동사를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최재형, 이상설은 물론 홍범도, 이동영, 이동휘, 유인석 등 내로라하는 독립지사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해외 독립운동 중추기지였다. 1937년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1만여 명이 살았다. 낯설고 물선 이곳에 고려인들은 민들레처럼 뿌리내렸다.
신한촌기념탑 비문은 비장하다.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고려인들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3·1운동 80주년을 기념해 1998년 세웠다. 고려인 3세 이 베체슬라브씨가 20여 년째 관리하고 있다. 이씨는 지금 혼수상태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일보 유승호 발행인은 “평소 이씨에게 농담처럼 ‘내가 뒤를 잇겠다’고 말했다”면서도 “하루속히 병상에서 일어나길 기원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남편을 대신해 기념탑을 지키는 이씨 아내의 얼굴은 그늘졌다. 떠나온 뒤에도 오래도록 눈에 밟혔다.
고려인 4세를 재외동포로 인정하는 ‘고려인 동포 특별법’이 이달 2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동안은 3세까지만 재외동포로 인정됐다. 4세부터는 외국인이었다. 이 때문에 19살이 되면 가족을 떠나야 했다. 자식과 생이별해야 하는 현실 앞에 고려인들은 절망했다. 연해주로, 중앙아시아로, 한국으로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유랑의 대물림이다. 다행히 문재인 정부에서 해결됐다. 국회의장실에 있을 때 전국 고려인대회에 다녀왔다. 고려인 4세들이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외교부와 사법부는 부정적이었다. 전해철, 김경협 의원이 숨은 공로자임을 밝혀둔다.
당시 정세균 의장도 “고려인 동포들의 안정적인 정착과 합당한 지위 확보를 위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면서 “법과 제도 이전에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최소한 권리를 방치하는 사회는 야만적이다”며 법 개정에 힘을 보탰다. 100여 년 유랑 끝에 고국에 정착한 고려인들에게 다소나마 미안함을 덜었다. 고려인은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우리 동포다. 약지를 잘라, 재산을 팔아,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 후손임을 잊는다면 죄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