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역사 앞에서 극일의 의미 되새겨야
2019-08-20 18:20
지난주 일본과 관련 몇 가지 인연이 스쳐갔다. 덕분에 차분하게 일본과 일본 국민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됐다. 방학을 이용해 일시 귀국한 육사 생도가 첫 번째다. 그는 2, 3학년 과정을 일본 방위대에서 보내고 있다. 내년 초 육사 4학년으로 복귀한다. 화제는 단연 한·일 갈등이었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일본 생도들과의 관계를 물었다. 양국 갈등 때문에 불편하지 않으냐고 떠봤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동료들은 빠른 시일 내 관계가 회복되었으면 한다. '일본과 한국은 친구다'는 말을 전해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가파른 정치 언어를 주고받았지만, 그들은 그저 청춘이구나 싶었다. 결국 정치 셈법은 복잡해도 신세대는 불편한 현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 정치인과의 만남이 두 번째다. 일본 중의원 3명, 현의원 3명, 그리고 주한 대사관 참사와 반나절을 보냈다. 그들은 국회 선진화법을 배우러 국회에 왔다. 일본 총무성 전자정부 전문위원으로 있는 염종순 박사를 통해서였다. 염 박사는 2000년부터 일본에 한국 전자정부를 알리고 있다. 전자정부 시스템은 단연 한국이 일본에 앞서 있다. 방문단은 언론에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한·일 갈등 상황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선진화법 제정 배경과 시행, 그리고 부작용까지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카타니 가즈마(中谷一馬) 의원은 “어려운 시기임에도 환대해줘 감사하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김병욱 의원은 “오히려 우리가 고맙다”고 했다. 관계 정상화를 위해 지혜를 모으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살얼음판에도 한국을 찾는 일본 정치인이 있고, 또 이들을 환대하는 한국 정치인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어쨌든 파국은 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맹렬했던 불볕더위도 어느덧 한풀 꺾였다. 긴장감으로 고조됐던 현해탄에도 이성이 찾아들었다. 시간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새삼 절감한다. 8·15 광복절 경축사가 분기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잡겠다”고 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강경하고 자극적인 비판은 피했다. 대신 절제된 대일 메시지를 보냈다. 대결과 반목보다 대화와 협력을 강조한 것이다.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 갈등을 성숙한 자세로 풀어나가자는 의지다. 이제 공은 아베 정부에게 넘어갔다. 단호하되 대화에 필요한 문은 열어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아베 정권과 일본 국민은 분리해 대응해야 한다. 감정적인 민족주의는 분풀이에 그칠 뿐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되풀이된다. 서애 유성룡은 참혹한 임진왜란을 겪고 ‘징비록’을 썼다. 같은 재앙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치욕스런 기록이라며 금서로 낙인찍고 봉인했다.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 ‘징비록’은 베스트셀러였다. 임진왜란 7년 동안 국토는 황폐화됐고 민심은 무너졌다. 무엇이 부끄러워 감췄는지 황당하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연암은 1780년 건륭제 70세 생일을 축하는 사절단으로 북경을 다녀와 견문록을 썼다. 그는 중원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세력으로서 청나라를 인정했다. 그리고 더 이상 ‘되놈’이 아닌 본받아야 할 나라로 평가했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매몰된 당시 사대부들에게 ‘열하일기’는 불온서적이었다. 그들에겐 중원에서 세력교체는 안중에도 없었다. 망한 지 130년 지났어도 명나라 찬가만 불러댔다. 실록에 따르면 병자호란(1636~1637) 당시 16만여명이 끌려갔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스런 삼두고배 의식을 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