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일, 손가락질로 할 건가…시스템으로 할 건가

2019-08-07 17:54

[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서울시청 앞 환구단(圜丘壇)은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나마 조선호텔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호텔에 딸린 정원으로 여긴다. 한국인이 이럴진대 일본인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지난해 4월, 이곳에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 심포지엄이 열렸다. 당시 차담을 나누던 중 다케시타 중의원이 환구단에 대해 물었다. 정세균 의장이 설명했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다케시타 의원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환구단에서 천제(天祭)는 433년 만이다. 천제는 1464년(세조 10년) 이후 폐지됐다. 황제만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명나라 외압 때문이다. 결국 천제는 조선도 당당한 자주국가임을 만방에 알린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일제가 강제 병합 3년만인 1913년 환구단을 헐어버린 것은 이 때문이다. 참석자 가운데 오부치 유코 중의원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 딸이다. 20년 전 아버지 오부치는 “식민지배로 인해 한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 통절한 반성과 함께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했다. 딸 유코는 “지금, 한·일 관계는 그리 화창하지 못하다. 20년 동안 다짐만 하고 큰 진전이 없는 것은 정치인들에게 책임이 있다”며 소회를 밝혔다. 1년이 흐른 지금 한일관계는 한층 악화됐다.

한·일관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한 해 1000만 명이 오가는 관계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754만 명,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은 295만 명이다. 서울 강남에 이자카야, 일본 신주쿠에 한국 음식점이 보편화된 지 오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가서는 안 될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학자들도 자기검열을 걱정해야 할 만큼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1차적 책임은 선을 넘은 일본에 있다. 아베 정부는 한·일 갈등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역사에서 시작된 갈등은 경제, 안보로 불길이 번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무차별적인 반일 공세는 우려스럽다. 민주당은 제2 독립운동으로 규정한 것도 모자라 정제되지 않은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 전역을 여행 금지 구역으로 검토하고, 도쿄 올림픽을 보이콧하자고 한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또 서울 중구청은 'No 재팬' 깃발을 게시했다 철거했다. 다분히 감정적이며 아슬아슬하다.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벌이는 반일 선동은 비이성적이다. 이대로 막가도 괜찮은 것인지, 우리 정치인과 공무원 의식 수준은 이 정도인지 묻게 된다. 우리 목표는 아베 정부다. 일본 국민까지 적으로 돌리는 행태는 자해나 다름없다. 반일 불매운동은 민간차원에서 진행될 때 설득력을 얻는다. 정치가 끼어들면 진정성을 잃는다. 친한 세력을 잃고 혐한 감정만 부채질하게 된다.

물론 어차피 벌어진 싸움이니 이겨야 한다. 그러려면 결의를 다지고 도덕적 우위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최근 반일 선동은 일본을 때리는 것에 머물러 있다. 상대를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싸움은 누구나 한다. 제대로 된 극일은 냉정함과 현실적인 정책에 있다. 중부지방국세청장을 지낸 왕기현 회장(세무법인 다솔)은 “정말로 소재·부품산업을 육성할 의지가 있다면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 정책은 찔끔찔끔 땜질에 그친다. 더불어 공직사회가 솔선수범 나서고 사회적 공감대가 뒤따를 때 극일은 힘을 얻는다”고 강조했다.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실질적인 정책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100개 핵심 소재·부품 기술 개발에 연간 1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관련 업계는 크게 새로울 것 없다는 반응이다. 지난해 말 대통령 업무 보고와 판박이라는 것이다. 당시 산자부는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에 매년 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올 6월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전략’에서도 같은 말이 반복됐다. 일본은 기술 축적 역사가 길다. 기술 격차를 따라잡으려면 과감해야 한다. 매년 1조원이 아니라 30조원씩 5년 동안 집중 투자하자. 법인세 인하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회적 합의다. 4급 이상 고위 공무원 임금동결, 노조 파업 자제다. 5년 시한을 두고 결의하자.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럴 때 진정한 극일도, 추격 속도도 좁힐 수 있다. 입으로 떠드는 애국은 누구나 한다.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극일이다. 이미 우리는 위기를 극복한 전례가 있다. IMF 외환위기 당시 350만 명이 돌 반지, 결혼반지를 꺼냈다. 이렇게 모은 금 226t(2조6000억 원)으로 위기를 넘겼다. 국제사회는 경이를 표했고 한국 돕자는 여론으로 돌아왔다.



셋째, 도덕적 우위다. 도덕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은 기꺼이 팔을 걷었다. 구조대를 급파했고 성금 450억 원을 전달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성금을 보탰다. 그러나 일본은 그 뒤로도 여전히 망언을 되풀이하고, 독도 영유권을 기술한 교과서를 채택했다. 누가 진정한 승자일까. 일본이 힘을 앞세운 깡패라면 우리는 달라야 한다. 그럴 때 국제사회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

환구단에서 천제를 지낸지 다시 122년이 흘렀다. 당시는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퍼포먼스 성격이 짙었다면 지금은 그때와 달라야 한다. 무분별한 선동은 자제하고 냉정함과 치밀함으로 맞서야 한다. 그래서 국민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