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정권의 실체]평화주의자의 손자...국회 입성 후 '군국주의 괴물'로

2019-08-13 03:39
①아베가 할아버지를 말하지 않는 이유
할아버지 간은 중의원 지낸 평화·반전주의자...부친 신타로는 '평화헌법' 옹호
외조부는 'A급 전범 용의자' 기시 전 총리...아베, 외조부 따라 '평화헌법' 개정 추진
北 일본인납치 강경론으로 부상...아베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 불러도 좋다"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 도발에 곳곳에서 '극일(克日)'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일본을 이기려면 먼저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 정권과 이를 떠받치고 있는 극우세력의 뿌리와 실체부터 짚는 게 급선무다. 앞으로 5회에 걸쳐 이를 집중 분석해본다.<편집자주>

일본 선거 정치의 3대 요소로 꼽히는 게 이른바 '3반'이다. ‘지반’(지역기반), ‘간반’(간판·지명도), ‘가반’(가방·자금력)을 일컫는다. '3반 프리미엄'은 일본 특유의 정치세습 풍토에서 비롯돼 이를 뒷받침해왔다. 현재 일본 중의원(하원) 의원 가운데 세습의원이 20%가 넘는다. 집권 자민당 내에서는 3명 가운데 1명, 내각 각료의 절반 이상이 세습의원이다.

일본 세습정치의 정점에 선 이가 바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닦아 놓은 야마구치현 선거구를 물려받은 3대 세습의원이다. 아베의 정치 혈통이 얼마나 강한지, 세습정치가 흔한 일본 정계에서도 아베를 '사라브렛도(サラブレッド)'라고 부를 정도다. 뛰어난 혈통의 경주마 '서러브레드(thoroughbred)'의 일본식 표현이다.

아베의 '정치 금수저' 후광은 주로 외가에서 나온다. 외할아버지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기시의 동생으로 역시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가 작은 외할아버지다. 아베 정권 실세로 그의 정치적 동지이기도 한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도 외가 쪽 먼 친척이다. 아소의 외할아버지는 일본의 전후 경제부흥을 주도한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다.

외가에 비해 아베 총리의 친가 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아베 가문이 만만한 집안은 아니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마이니치신문 기자 출신으로 관방장관, 외무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을 지내다 총리 자리를 눈앞에 두고 급사했다. 할아버지인 아베 간은 중의원 의원을 두 번 지낸 걸출한 정치인이었다. 그럼에도 아베가 할아버지를 입에 올린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할아버지 간은 '반골 평화주의자'

 

아베 간[사진=위키피디아]

일본 교도통신 기자 출신 작가인 아오키 오사무는 2017년 아사히신문사를 통해 낸 <아베 삼대>(한국에서는 같은 해, 같은 제목으로 서해문집에서 펴냄, 길윤형 옮김)라는 책에서 아베가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게 간이 현재 아베 정권과 정반대의 지평에 서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썼다. 그러면서 국회의사록에서 찾아낸 아베의 관련 언급을 소개했다.

"내 친할아버지는 아베 간이라는 분이다. 익찬선거라는 것에 반대해 익찬회가 아닌 비익찬회로서 당선된 매우 드문 의원이었고, 반도조 정권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지켜 온 의원이기도 했다."

익찬선거는 1942년 4월 치른 21대 중의원 선거를 말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에 실시한 유일한 국정선거로 일종의 어용선거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당시 도조 히데키 정권은 '대정익찬회'라는 어용단체를 기반으로 '익찬정치체제협의회'를 만들어 군부에 협력하는 인사들만 중의원 후보로 추천했다. 이 결과, 전체 의석(466석) 가운데 81.8%인 381석을 익찬회 소속이 휩쓸었다. 당시 비익찬회 후보들은 선거운동 내내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야마구치현 오쓰군 헤키촌(현재 나가토시)에서 태어난 간의 집안은 지역에서 대대로 간장 등을 만드는 양조업을 하고, 대규모 논밭과 산림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간은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를 나와 도쿄에서 자전거를 만드는 '산페이(三平)상회'를 설립했다.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베 삼대>에 따르면 간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성실하고 신념이 강했고, 청렴결백했으며 인망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생가 인근에 사는 한 60대 여성은 "아베 간은 아마 아흔살까지 살았다면 일본의 정치를 바꿀 수도 있을 정도의 사람이었다"며 그가 마을 묘지를 위한 토지를 제공해줬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간의 아들이자, 아베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와 동갑내기로 절친했다는 90대 노인은 "기시 노부스케에 필적하는 아베 간이라는 사람을 세상이 그다지 잘 모르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간이 1937년 4월 무소속으로 중의원 선거에 처음 도전할 때 낸 선거공보에 담긴 문구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웅변해준다. '이번 총선거는 시대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각오를 묻는 중대한 총선거', '국제 정세가 극도로 긴박해 2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는 상황', '아무리 일을 해도 생활의 안정을 얻을 수 없는 노동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등이다. 그는 “국민의 이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재벌 특권계급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고 기존 정당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익찬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간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전 건강이 나빠져 귀향한 뒤 다시 선거를 준비하다 이듬해 1월 51세의 나이로 숨졌다.
 

 

◆아버지 신타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베 신타로[사진=위키피디아]

아들 신타로는 보수정치인이었지만 반전, 평화주의를 추구하고 금권부패를 규탄한 아버지 간을 평생 자랑스러워했다. 1985년 자신이 젊은 시절 기자로 있었던 마이니치신문에 쓴 자전적 연재 '젊은 날의 나'에서 "아버지는 대정당(익찬회)을 적으로 돌리고 그 금권부패를 규탄했으며, 평생 일관되게 전쟁에 반대하는 자세를 이어갔다...(아버지에게서) 신념과 청렴결백함을 배웠다"고 밝힌 바 있다.

신타로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장인으로 둔 덕분에 출세가 빨랐지만, "나는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아베 간의 아들이다"라고 즐겨 말하곤 했다. 기시 전 총리는 산업계를 지배한 채 사실상 만주국 경영을 주도하다가 도조 정권에서 상공장관, 내무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일본 패망 뒤 'A급 전범' 용의자로 수감됐다가 1948년 석방된 뒤 정계에 복귀해 승승장구했다.

신타로는 '따놓은 당상'이었던 총리 자리에 끝내 오르지 못하고 1991년 췌장암으로 갑자기 숨졌다. 마이니치신문은 “기시, 후쿠다(후쿠다파는 아베파 전신)라는 자민당의 매파(강경파) 계보를 이어 보수의 본령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평화헌법 옹호론자로 야당과의 관계에서도 유연한 노선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신타로는 1985년 12월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의 외무장관으로 출석한 중의원 외교위원회에서 "나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을 망국의 위기에 빠뜨린 매우 잘못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국제적으로도 이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는 엄혹한 비판이 있다. 정부도 그런 비판을 충분히 인식하며 대응해 가야 한다. 그것이 일본이 앞으로 걸어갈, 그리고 지금까지 일본이 걸어온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기본자세가 돼야 한다"며 역사적 균형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척점에 선 아베...'군국주의자'가 된 '도련님'

 

기시 노부스케[사진=위키피디아]

신타로는 아들 신조에게도 "나는 아베 간의 아들이다. 난 반전평화니까"라고 말하곤 했다는데, 신조는 끝내 할아버지, 아버지 대신 외할아버지의 길을 걷게 된다. 아버지가 부재하는 일이 많았던 아베를 지극히 사랑해준 건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였다고 한다. 아베는 신타로가 숨졌을 때 추도문집에 쓴 글에서 "내가 철이 든 뒤 아버지가 함께 놀아준 기억이 거의 없다"며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기시는 '쇼와의 요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그는 쇼와시대 군국주의 화신으로 점령국이 강요한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다시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드는 게 전후 최대 염원이었다. 반전·평화주의자인 간과 평화헌법을 옹호한 신타로와는 대척점에 서 있던 셈이다.

아베 총리 역시 집권 이후 줄곧 개헌에 전력을 쏟아붓고 있다. 그는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면 부디 그렇게 불러 달라"며 개헌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아베는 전쟁과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전력(군대)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헌법 9조 1·2항, 이른바 평화헌법을 유지하면서 자위대의 근거를 명기하는 개헌을 추진해왔다.

아베 총리는 1954년 9월 21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요코는 기시 노부스케의 장녀다. 아베에겐 두 살 위로 형 히로노부가 있었고, 5년 뒤 남동생 노부오가 태어났다. 막내 노부오는 후손을 보지 못한 기시 가문에 양자로 가게 된다. 어린 시절 아베 총리는 평범하고 순진한 아이로 기억될 뿐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는 게 당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이다. 특별할 게 없는 좋은 집 아이, 지극히 평범한 도련님이었다고 한다.

소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입시를 치르지 않고 자동으로 진학하는 사립학교 세이케이학원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띄는 유형이 아니었고, 정치를 지망한다는 낌새 또한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아베를 가르친 한 교수는 아베가 보수주의를 주장하는데, 대학시절에 그는 관련 공부를 한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 경제, 재정, 금융 관련 수업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1977년 세이케이학원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아베는 미국에 어학연수 겸 유학을 갔다가 귀국해 고베제강에 정략입사했다. 2년 만인 1982년 외무장관이 된 아버지 신타로의 비서관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1987년 일본 유명 제과업체 모리나가제과 공동창업주 외손녀인 아키에와 결혼한 아베는 1993년 아버지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중의원에 입성한다.

정계에 들어선 아베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로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북·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다. 이때 북한은 일본이 납치 피해자라며 조사를 요청한 이들에 대해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고 통보했다. 당시 관방부장관으로 동참한 아베는 평양에서 강경론을 주장했고, 이 사실이 알려져 보수층에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아베는 이듬해 자민당 간사장, 2005년에는 관방장관에 올라 사실상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발탁된다.

아베는 마침내 2006년 9월 총리로 취임한다. 당시 52세로 최연소 총리, 전쟁을 겪지 않은 첫 총리였다. 1993년 위안부 동원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 무력화에 실패한 가운데 각료들의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아베는 1년 만인 이듬해 9월 물러났지만 2012년 12월 재집권에 성공한다. 올해 11월만 넘기면 작은 외할아버지인 사토 에이사쿠의 기록을 깨고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가 된다. 아베는 지난해 9월 치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연임에 성공해 2021년 9월로 임기를 연장해뒀다.

순진한 도련님에 불과했던 아베가 우익 군국주의자로 돌변한 건 비단 외할아버지의 영향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일찍이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로 정한론(조선정복론)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아베의 친가는 물론이고 외가가 모두 요시다 쇼인과 같은 야마구치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참고문헌
▲<아베 삼대>(서해문집)
▲<아베 신조의 일본>(세창미디어)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해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