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철의 100투더퓨처] ① DNA 속엔 '늙을 이유'가 없다
2019-08-05 13:28
<100 to the future> 필자 박상철 교수 = 이제 120세 시대로 나아가는 지금. 노화(老化) 연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박상철교수의 ‘100 to the future(백,투더퓨처)’ 시리즈 연재를 시작합니다. 박교수는 서울대 의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30년간 서울대 의대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과기부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전남대 연구석좌교수로 활동중입니다. 노화 분야 국제학술지 ‘노화의 원리’에서 동양인 최초 편집인을 지냈고 국제 백세인연구단 의장, 국제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노화 연구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노화이론을 세운 그의 논문은 과학저널 ‘네이처’지에 소개됐습니다.
<100 to the future>는 100세까지 보편적으로 사는 미래에 대비하자는 의미로 영화 '백투더퓨처'의 미래 귀환의 뉘앙스를 차용한, 시리즈 제목입니다. 이제 우리는 100세 시대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앞당겨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그 길어진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건강하고 풍요로운 내실에 대해 실감나게 짚어나갈 계획입니다.<편집자주>
조선조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 선생의 ‘자연가’라는 시조가 있다. “쳥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 우리 선현들은 사람이 늙는다는 것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담담하게 수용하며 전혀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는 그동안 늙지 않고 오래 더 사는 것을 염원하면서 적극적으로 노화를 거부하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문자가 발명되면서부터 불로장생 염원이 기록되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불로초를 찾거나 연단술 연금술 등의 개발에 매진하여 왔지만 성과는 요원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인 유전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모든 생명현상을 유전적 기전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당연히 노화도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래서 학계는 노화를 관장하는 유전자를 찾는데 혈안이 되고 전쟁같은 경쟁에 들어갔다.
노화를 유도하고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는 작업은 생명체의 노화가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노화결정론 또는 노화프로그램설에 절대적으로 중요하였다. 만약 노화유전자가 발견되면 그 발현을 제어하여 노화속도를 조절하거나 종국적으로 노화를 억제하는 방안도 강구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강한 설득력을 가졌다. 노화유전자를 찾는 작업은 두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즉 노화를 일으키는 유전자(老化促進遺傳子)를 찾거나 또는 노화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유전자(不老遺傳子)를 찾는 일이었다.
우선 시도한 것은 수명을 단축하고 노화를 촉진하는 유전자군을 찾기 위하여 조로증(早老症)환자를 표적으로 하였다. 일반인보다 유전적으로 노화 속도가 10배정도 빠른 프로제리아(Progeria, 허치슨 길포드증후군)와 노화 속도가 2배정도 빠른 워너증후군이 좋은 사례였다. 결과적으로 이들 질환을 야기하는 유전자를 찾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들에게서 발견된 유전자들은 노화를 직접유도하는 진정한 유전자가 아니어서 학계는 좌절하고 허탈해졌다. 이들은 생체에서 정상적 기능을 담당하는 유전자들이 변형된 형태로 밝혀졌다. 프로제리아는 핵막의 안정화를 결정하는 lamin A/C 변형, 워너증후군의 경우는 DNA 손상복원 유전자의 변형으로 밝혀져, 직접노화유전자가 아니라 정상유전자가 변형되어 결과적으로 노화가 초래되는 간접노화유전자임이 알려졌다. 이후 인체의 모든 유전체를 규명한 게놈프로젝트도 완성되었지만 직접노화유전자의 존재는 찾을 수 없었다. 엄청난 학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노화유전자는 규명하지 못한 것이다. 노화와 관련있는 유전자들은 다양하게 규명되었지만 생명체에 노화를 직접 유도하는 유전자는 찾아지지 못한 것이다. 이는 노화유전자가 원래 없었을 것이라는 반증이라고 결론이 맺어지고 있다. 노화를 유도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서 생명체의 노화를 유전적으로 결정하는 프로그램이 아예 없다는 의미이다.
반면 생명체를 늙지않게 하는 불로유전자는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긴가민가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이가 들어도 전혀 노화 증후가 없는 특별한 사례들이 보고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20살이 넘도록 성장이 전혀 안되고 갓난애의 상태로 남아있으면서 신체 각 조직이 노화 증후를 보이지 않는 불균형발달상태 환자들이 소수 보고되었다. 이들 질환은 유태복합증후군(幼態複合症候群)이라고 명명되었으며 오직 여성에서만 일어나며, X염색체의 변형이 보고되었다. 성장이 중단되었을 뿐아니라 세포에도 노화 징후가 없어 이들의 유전자는 불로유전자로서의 가능성이 검토되고 있다. 이와 같이 생체에는 노화를 촉진하는 유전자는 없으며, 오히려 노화를 억제하는 유전자가 있을 수 있다는 증거는 생체 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노화의 유전적 특성을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차차 무위로 돌아가고 있을 무렵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였다. 바로 노화의 텔로미어 가설이다. 세포가 복제될 때마다 DNA말단은 부득불 일부 소실되게 되어있다. 그런데 염색체 말단에는 이를 막기 위한 완충제 같은 텔로미어가 있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길면 그만큼 여러 번 세포를 복제할 수 있고, 세포의 수명도 길어진다고 추정하였다. 늙어져서 줄어드는 텔로미어가 자손에게는 온전하게 복원되어 이어져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생식세포에는 텔로미어가 짧아지면 원래대로 복구시키는 텔로머레이즈라는 효소가 있기 때문임이 밝혀졌다. 텔로미어 가설이 등장하여 학계의 지지를 받은 까닭은 ‘헤이플릭 한계’로 불리는 세포의 수명한계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너드 헤이플릭 교수가 발견한 현상으로, 정상적인 세포는 복제를 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학설이다. 텔로미어 가설은 헤이플릭 한계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더구나 암세포에서는 텔로머레이즈가 작동하여 세포복제의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노화뿐 아니라 암의 기전을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수명의 한계를 설명하는데는 매력적이지만 노화의 단계를 설명하는데는 문제점들이 많다. 우선 텔로미어의 길이와 종의 수명차이가 관련이 없다. 쥐는 수명이 사람의 30분의 1에 불과한데도 텔로미어는 적어도 50배 이상 더 길다. 또한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면 그만큼 노화 정도가 역비례적으로 심해져 갈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실제로는 그러한 결과가 보여지지 못하였다. 더욱 텔로미어의 길이가 길어지면 그만큼 암 발생의 가능성도 함께 증가한다는 보고는 텔로미어 가설의 정립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접고 가야하는 것은 노화와 장수의 차이이다. 이들은 유전적 영향도 다르게 받고 있음을 차차 설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노화를 유전적인 프로그램으로 설명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생명체의 노화는 그리고 우리 인간의 노화는 운명적으로 프로그램되어 발현하는 특정한 유전자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이 아닐 것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 몸의 노화는 설계되어 있지 않다. 노화는 운명이 아니다.” 하서선생이 읊으신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라는 귀절이 새롭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