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빗나간 애국심, 이기적 민족주의
2019-07-30 13:15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한 마디로 잘 표현한 바 있다. 애국심은 자기 국민에 대한 사랑을 우선시하는 것이고,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는 다른 나라 국민에 대한 증오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지금 전 세계에서는 애국심으로 거짓 포장된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주 새로 취임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 그리고 브뤼셀에 있는 유럽 연합의 관료들을 적으로 몰아세우면서 권력에 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서 브렉시트를 올가을 안에 단행하려고 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이민자, 중동의 난민 등 역시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공격하며 당선되었고 재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 밖에도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 많은 국가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역사 문제로부터 시작된 갈등이 격화되어 통상 문제로 비화되고 있고, 그 배경에는 깊은 민족주의 정서가 깔려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국의 현상을 관제 민족주의라고 칭했지만,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민족주의는 지금 한·일 갈등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의 확산을 우려하고 있지만 쉽게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한국민들은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와 이에 대한 사과와 보상에 인색한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해 분개하고 있고 이러한 민족주의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일본 여행 취소 사태로 확산되고 있다. 양국관계는 1965년 국교정상화 후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전 세계적인 확산은 향후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킨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의 민족주의는 고립주의의 성격을 함께 보이고 있어 더욱 심각하다. 이것이 심화된다면 기존의 국제질서가 밑바닥부터 송두리째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먼저 양 세계대전 후 어느 정도 세계 평화에 기여한 바가 있는 유엔의 위상이 갈수록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이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갈수록 개발도상국이나 제3세계의 입김에 휘둘리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유엔에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는 미국이 유엔을 계속 비판하며 공격을 가하게 되면 유엔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소될 수밖에 없다. 이는 유엔이 수행하는 평화유지군 활동이나 인권, 환경 등 지속가능 개발 목표(SDG) 사업에 심각한 차질을 주게 될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계획도 같은 우려를 자아낸다. 유럽은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른 후 다시는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유럽 통합을 이뤄냈다. 거대한 단일 시장으로 재탄생해 상당한 번영과 안정도 누렸다. 그러나 난민 문제, 부채 문제 등 여러 가지 시련이 유럽연합(EU)을 덮치고 있다. 이에 영국은 더 이상 자신의 주권을 EU에 넘기지 않고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브렉시트를 추구하고 있다. 여기에도 바다 건너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경시하거나 경멸하는 영국인의 민족주의적인 태도가 곁들여져 있다. 한 전문가가 지적했듯이 “영어가 아닌 이상한 언어를 쓰고 마늘을 먹는 국민들”과는 같이 놀지 않겠다는 일종의 우월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한 대서양 건너 대국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보가 2차 세계대전 후 국제사회가 꾸준히 노력해 이뤄온 현재의 국제 질서를 흔드는 점이다. 앞서 말한 유엔이나 EU의 위치가 흔들려 국제 협력이 어려워지는 것 말고도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되어 전후 구축한 세계 금융·경제 질서도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서로의 윈윈(win-win) 원칙에 입각한 자유주의적인 국제 협력 분위기가 자국의 이익 극대화에 매몰되는 현실주의적 제로섬(zero sum) 게임으로 바뀌는 것이다.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 행위자의 힘이 증대됨과 동시에 국제기구, 비정부기구 등 국제 협력을 위한 비정부 행위자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약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