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nk You! 아베] [김신회의 스페셜칼럼]경제보복으로 드러난 日민주주의의 민낯
2019-07-29 00:02
삼권분립 원칙 부정하는 수출규제 몽니..."'수출관리'로 쓰라" 언론통제도
천황제 아래 세습정치인 득세...아베 내각 20명 중 19명이 극우조직 소속
일본 '민주주의의 질', '언론자유지수' 바닥권...일본인 56% "민주주의 불만"
천황제 아래 세습정치인 득세...아베 내각 20명 중 19명이 극우조직 소속
일본 '민주주의의 질', '언론자유지수' 바닥권...일본인 56% "민주주의 불만"
일본은 한국에 '수출규제'를 한 적이 없다. '수출관리'를 강화했을 뿐이다. '부적절한 사안'이 발생해서다. 극우 성향 산케이신문 계열인 후지TV가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부적절한 사안'이 뭔지 넌지시 알려줬다. 지난 10일 한국에서 4년간 무기로 전용 가능한 전략물자의 밀수출이 156차례 적발됐다는 내용의 자료를 보도하면서다. 현지 다른 언론들도 이 보도를 뒤따르며 일본 정부의 조치를 정당화했다.
그럼에도 일본 언론들이 '수출규제'와 '수출관리'를 가려 쓰지 않자, 주무부처 수장인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장관)이 직접 나섰다. 이번 조치를 '규제'가 아닌 '관리'라고 쓰라고 언론에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지난 24일 첫 표적이 된 공영방송 NHK는 곧장 '보도지침'대로 표현을 바꿨다. 세코 장관은 트위터에 다른 매체들의 관련 기사 제목도 함께 나열해 분위기를 잡았다. 한·일 갈등이 세계무역기구(WTO) 일반 이사회에 의제로 오른 가운데 한국을 수출우대국인 '백색국가'에서 빼는 추가 조치를 앞두고 입단속을 하며 명분 강화에 나선 셈이다.
외신엔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주요 외신들은 무역으로 한국에 정치 보복 조치를 취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다를 게 뭐냐고 비판한다. 블룸버그는 지난 22일 '한국을 상대로 한 아베의 무역전쟁은 가망 없다(Abe’s Trade War With South Korea Is Hopeless)'는 제목의 사설에서 "일본 지도자는 정치분쟁에 통상무기를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다"며 참의원 선거 승리로 정치 장악력을 얻은 아베 총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한국을 상대로 시작한 어리석은 무역전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아베 정권의 도발 배경도 정확하게 짚었다. 통신은 "일본 관리들은 이번 조치가 첨단기술 수출의 불법적인 북한 이전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의 피해를 배상하라는 한국 법원(대법원)의 최근 판결에 대한 보복임이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아베 총리가 정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역조치를 남용하는 건 중국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호하는 '괴롭히기 전술(bullying tactics)'을 따라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이때 개인 피해자들의 청구권도 소멸됐다고 본다. 그러니 한국 대법원이 지난해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고 배상 판결을 내린 건 협정 위반이자, 국제법 위반이라는 논리다. 일본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응하지 않고 있다. "강제징용이라는 반인도적 '불법' 행위를 전제로 한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해서다. 대법원은 한일 청구권협정이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다룬 협상이 아니라고 봤다. 협정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5억 달러가 미수금이나 미불금 등 한국인 징용자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일 수는 있어도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이 반영된 배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 정부는 사법부 판결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인데, 일본이 이에 반발하는 건 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인 삼권분립 원칙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의 억지와 뒤따른 수출규제 보복, 언론 통제는 일본 정치, 일본 민주주의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덕분에 우리 정부는 민주주의 국가의 상징인 미국을 상대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요구와 경제보복 조치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임을 상기시키며 한국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일본 정치체제의 후진성은 이 나라가 입헌군주국으로 '천황(일왕)'을 모신다는 구조적인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 일왕은 일본의 상징일 뿐이지만, 행정부인 내각 인사들은 명목상 일왕의 신하인 '대신'일 뿐이다. 아베 총리 역시 '내각총리대신'이다. 지난 21일 치른 참의원 선거도 일본 정치의 낙후성을 드러냈다. 아베 총리는 이번 수출규제 조치가 참의원 선거용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사활을 걸었지만, 일본인들은 선거에 무관심했다. 투표율이 24년 만에 처음 50%를 밑돌았을 정도다. 현지 언론들은 유권자들이 변화에 관심이 없었다고 짚었다.
그도 그럴 게 일본 선거는 지난 수십년간 사실상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적수 없는 싸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수세력이 이합집산하던 일본에서 1955년 11월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당해 탄생한 첫 단일 보수정당이 바로 자민당이다. 이때부터 60여년에 걸쳐 자민당이 집권하지 않은 기간은 1993년 8월~1996년 1월, 2009년 9월~2012년 12월로 6년이 채 안 된다. 자민당 세력이 사실상 메이지유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파벌·세습정치의 악습은 19세기 말부터 지속됐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일본 중의원 5명 가운데 1명, 자민당 내에서는 3명 가운데 1명 이상이 세습의원이다. 아베 총리 자신도 3대째 세습 정치인이다. 북한의 3대 세습을 탓할 처지가 못 된다. 자민당 천하 아래 여권이 안전운전을 고수하고 야권이 야성을 잃으면서 일본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
아베 내각의 면면은 민주주의와는 더욱 거리가 멀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제4차 아베 내각 20명 가운데 집권 자민당과 연립한 공명당의 이시이 게이이치 국토교통부 장관을 제외한 19명이 모두 일본 대표 극우조직 소속이다. 아베 총리부터 일본 최대 우익단체인 '일본회의' 산하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의 특별고문이다.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 회장이기도 하다. 신도정치연맹은 일본 내 신사를 포괄하는 종교법인 '신사본청'을 모태로 설립됐다.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역시 민간종교법인인 신사본청 관할이다. 아베 총리는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다함께)'에도 속해 있다.
일본회의에는 아베 총리와 함께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장관 등 15명이, 신도정치연맹과 '다함께'에는 이시이 장관을 제외한 19명이 모두 속했다. 일본회의는 1997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통합해 출범한 임의단체다. '아름다운 일본의 재건과 자부심 있는 나라 만들기'를 설립 목표로 내세웠다. 천황제 고수, 강요된 평화헌법 개정,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공식 참배, 외국인 지방참정권 반대, '사과외교' 중단, 대동아전쟁 긍정론, 자학적 역사 교육 및 지나친 권리 편중 교육 시정 등을 주장한다. 신도정치연맹과 '다함께'의 주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일 갈등 배후에 일본 극우단체가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데, 아베 총리가 새로 짤 내각 인사들의 성향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상황이 이러니 일본 민주주의에 대한 외부 평가가 박한 게 당연하다. 독일 싱크탱크인 베텔스만재단의 '지속가능거버넌스지수(SGI)'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지난해 '민주주의의 질' 항목에서 전체 41개국 가운데 33위(5.80)에 그쳤다. 한국은 31위(6.22)로 2014년에 비해 점수가 0.59점 올라 5계단 뛰었지만, 일본은 제자리에서 점수만 0.33점 더 잃었다. 보고서는 정치자금의 불투명성, 언론의 과점 및 편향성 등을 문제 삼았다. 일본 언론은 2012년 2차 아베 정권이 들어선 뒤 독립성이 크게 훼손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국경없는기자회(RSF)가 지난 4월 발표한 일본의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는 67위로 2011년 32위에서 두 배 넘게 추락했다. 한국은 올해 41위에 올랐다.
미국 초당파 싱크탱크인 퓨리서치센터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엔 민주주의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만이 반영됐다. 일본 내 민주주의에 만족한다고 답한 이는 40%에 불과했고, 56%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했다. 특히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변화가 크지 않다는 데 62%가 동의했다. 일본인 1000여명을 상대로 지난해 5~6월 설문조사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