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타임머신①]이 난리통에 일본인 묘에 절한 과천시 윤미현의장, 왜?
2019-07-10 10:26
추사 자료 기증한 일본인 은인, 후지쓰카 추모현장에 달려간 사람
윤미현 과천시 의장이, 일본인 묘소에 엎드려 절한 까닭
세상의 분위기와는 역주행하는 듯한 길이었다. 지난 1일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경제보복 조치를 발표한 뒤 두 나라 사이엔 전례 없는 긴장이 흐르고 있는 때였다. 멀 것만 같았던 그 길은 두 시간 남짓이었다. 5일 아침 일찍 출발한 김포공항발 여객기는 우리 일행을 한달음에 도쿄 하네다(羽田)공항에 내려준다. 우리는 어느 일본인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일행 중에는 윤미현 과천시의회 의장(45)도 끼어 있었다. 한·일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이 공직자는 왜 하필 이런 여정에 합류했을까.
지난 4일은 일본인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의 13주기였다. 5일(음력 6월 3일)은 조선 후기의 지식인 추사 김정희(1786~1856) 탄신일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아키나오는 추사 관련 서화(書畫) 46점과 옛책 2750여점을 한국에 기증한 사람이다. 추사를 깊이 존경했던 그의 부친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가 조선을 돌아다니며 사들여 물려준 애장품들이었다. 그중 국보 180호인 ‘세한도’를 지카시가 1944년 소전 손재형에게 넘긴 사건은 유명하다. 그러니까 4일과 5일은 두 나라 문화교류의 주인공들을 기억할 만한 날이 겹친 '한일 추사(秋史)팬 골든데이즈'랄까.
이제, 추사 김정희와 후지쓰카 집안, 그리고 최종수 회장의 인연을 간단히 짚어보자.
2006년 추사 타계 150주년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던 최종수 당시 과천문화원장. 그는 그 무렵 지카시의 아들 아키나오를 일본에서 만난다. 그리고 열정어린 설득 끝에 아키나오가 여전히 잘 보관하고 있던 그 많은 자료를 ‘귀국’시켰다. 아키나오는 부친의 자료들을 넘긴 뒤 “이제 죽어도 괜찮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해 눈을 감는다.
도쿄대학 박물관에서 줄기차게 기증 요청을 해왔지만 거절하고, 그 작품들이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라며 아무 대가도 없이 건네주고 세상을 뜬 이 일본사람을, 최종수 원장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해부터 시작해 이번 13주기까지 해마다 그는 도쿄의 고다이라묘지공원(小平靈園)의 후지쓰카 가족묘를 찾았다. 그곳에는 생애 내내 추사의 향기와 함께 살았던 일본사람 지카시와 아키나오 부자(父子)가 잠들어있다.
이 추모의 길에 윤 의장이 참여한 것이다. 윤 의장이 활동하고 있는 과천은, 추사 김정희가 학문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완숙의 경지를 보여준 말년 시기에 머물렀던 곳으로 추사의 자취가 그윽한 지역이다. (추사의 삶을 이루는 지역은 5개 정도의 포인트로 정리될 수 있다. 탄생지는 충남 예산이었고, 성장하고 활동한 곳은 서울의 통의동 월성위궁이었으며, 제주와 북청에 유배를 갔고 이후 풀려나 과천에 머문다.)
윤 의장은 지역의 자부심을 높여준 인물인 추사를 과천의 '특급 문화브랜드'로 여기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김구 선생이 열망했던 '문화대한민국'의 발흥(發興)이 추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중국-한국-일본을 아우르는 국제적 문화코드를 이룬 인물은 3국의 역사 속에서도 추사가 거의 유일하다. 이런 추사를 돋을새김하는 일을 필생의 '미션'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윤 의장은, 그를 깊이 사모해온 일본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추사 동네사람(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으로서 그분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기도 했다. 공적 출장도 아니었다. 자비를 들여서 달려왔다.
아키나오의 조카딸 고마다 가즈코(駒田和子)의 집을 방문한 우리 일행은 그 집 다다미방 벽 높이 걸려있는 ‘세한도’ 그림을 보았다. 가즈코 또한 조선 문화의 향기를 나날이 맡으며 살고 있었구나. 윤 의장은 마침 세한도가 그려진 우산을 그에게 선물했다. 가즈코는 깜짝 놀란 듯이 우산을 펴보더니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벽에 붙은 세한도를 가리키며 좋아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조선 옛그림 하나에 이토록 마음이 통하며 함께 흐뭇해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윤 의장은 준비해온 ‘한일문화교류 감사장’을 전달했다. 가즈코는 그것을 받으면서도 몹시 쑥스러워했다. 그럴 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넓지 않은 거실 한쪽 위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백년 동안의 맑은 바람은 후지쓰카 지카시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흐르는 그 예술과 문화의 개결한 바람처럼 흩날리는 서체였다.
이튿날인 6일 후지쓰카 가족 묘소가 있는 고다이라묘지공원으로 가는 길, 공원 입구 마을에는 꽃과 추모물품들을 파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일행은 ‘이세야’라는 이름의 꽃집에 들른다. 최종수 선생과 생전의 아키나오가 지카시를 추모하기 위해 함께 들렀던 추억의 장소다. 꽃집 주인은 차를 건네며 후지쓰카 집안과 추사 김정희에 대한 얘기를 했다. 여기에도 조선 문화의 향기는 감돌고 있었다.
공원 안쪽 깊숙이 들어간 뒤에야 만난 ‘등총가(藤塚家, 후지쓰카 집안)’묘비는 우람하지 않고 단아했다. 그 옆에 윤 의장은 ‘추사 김정희를 세계에 알린 고 후지쓰카 지카시와 고 후지쓰카 아키나오 선생을 참배합니다’라고 씌어진 현수막을 걸었다. 아침의 습기가 살짝 눅눅한 풀밭과 상석에 향이 피워졌고 음식들이 놓였다. 새로 발행된 추사 관련 서적들이 제단에 함께 올려졌다. 기증받은 자료들이 꾸준히 연구되고 있음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윤 의장은 젖은 땅에 몸을 아끼지 않고 엎드려 절을 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이국의 고인이지만, '추사'로 이어진 인연은 문화의 동지 같은 기분이 들게 했을까. 그가 오래 엎드린 동안 숙연한 정적이 고였다. 한때 스스로를 과로(果老, 과천노인)라 불렀던 추사 김정희. 그를 대신해서 윤 의장은 후지쓰카 집안에 감사의 절을 올리고 있는 셈이었다. 향을 피운 연기들이 마치 무슨 말이라도 하는 듯 두텁게 피어 올랐다.
지리적으로 서로 이웃한 한국과 일본. 역사적으로 불행한 시간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때로 침략과 갈등의 사건들로 얼룩지기도 했지만, 그 ‘이웃함’이라는 특징 때문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문화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성장시켜온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백제나 가야, 고구려의 문화들을 호흡하면서 일본 또한 풍성한 역사적 안목을 확대해온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일본인들 중에는 한국이 자신들의 뿌리라는 생각을 가진 분이 많아요. 이웃한 나라이다 보니 역사 속에서 은원(恩怨)이 생기는 건 불가피했겠지만, 그래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느 외국인들보다도 편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더군요. 외교란 것이 사실 큰 것 같지만, 결국 사람 사이의 이해와 공감 아닐까요. 조선시대 지식인 한 분으로 인한 인연이 이토록 아름답게 이어지는 것을 봐도, 한국과 일본이 미래 속에서 어떻게 공존해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동해에 노도(怒濤)가 몰아치는 느낌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민간의 저류로 흐르고 있는 이런 네트워크가 양국 사이의 관계를 성숙시킬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한·일 관계에서도 서로가 한 차원 높은 '국가의 품격' 같은 것을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힘을 주어 털어놓는 윤 의장의 꿈과 비전이 후지쓰카 묘소 앞에서는 유난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지금 한·일 간에 불거진 갈등과 거친 숨소리들 가운데서도, 저류를 흐르는 문화와 예술과 일상의 교류는 끊이지 않는다는 희망의 사인일지 모른다. 한 자치단체 시의회 의장이 감행한 ‘추사 오딧세이’는 지금 쏟아지는 어떤 고성의 목소리보다도 진지하고 강하고 오래 가는 ‘한·일외교’의 본령이 아닐까.
글 · 사진 도쿄(일본) = 이상국 논설실장